누가복음24.
안녕하십니까.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시간입니다.
오늘은 시작 전에 여러분께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장 성경을 꺼내들고 오늘 우리가 함께 할 누가복음 15장을 한 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한 번씩 읽어본 후 나 홀로목사의 강해를 들어보면 하나님이 성경 속에 얼마나 귀한 가르침을 심어놓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읽어보았을 때는 별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내용이었는데 성령이 임하신후 나 홀로목사 입을 통해 재해석되는 성경내용을 보면 우리의 이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는 거지요.
이것은 나 홀로목사 역시 경험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여러분에게도 아주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령에 대한 믿음을 크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 여겨지는 만큼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라며 오늘의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눅15: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15:2)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눅15:3)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눅15:4)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눅15:5)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눅15: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1절에 세리와 죄인을 등장시킨 것은 영적인 사람과 반대되는 이들을 묘사하기 위해서입니다.
2절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율법을 중시여기고 자신들이 일반인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이들이며 서기관역시 하나님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지요.
스스로가 영적이라 자부하는 이들인지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몰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영적인 스승이라면 어떻게 함께 어울릴 수 있느냐고 따졌던 겁니다.
이 같은 그들의 항의에 예수님께서는 양백마리를 비유하여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백 마리 양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면 그 양을 찾지 않겠느냐는 말씀과 함께 천국의 상황과 자신의 임무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아흔아홉의 양은 잃어버리지 않은 양, 즉 천국에 있는 양이며 잃어버린 양 1마리는 천국에 이르는 길을 몰라 헤매는 양을 의미합니다.
바로 세리와 죄인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며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온 이유가 바로 이런 사람을 찾기(구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3~6절)
그런데 7절을 보게 되면 죄인하나가 회개하는 기쁨이 아흔아홉 의인으로 인한 기쁨보다 크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이미 천국에 이른 이들(99명의 의인)을 위해 기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 하나가된 99명의 의인들까지 죄인1명의 회개함을 기뻐할 것이므로 그 기쁨이 말할 수 없이 크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성령을 깨닫게(회개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쉽게 비유를 해주어도 못 알아듣는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가르침도 주셨습니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눅15:8)
Either what woman having ten pieces of silver, if she lose one piece, doth not light a candle, and sweep the house, and seek diligently till she find it?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눅15: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10)
8절 말씀은 우리가 아주 깊게 생각해봐야하는 내용입니다.
드라크마는 예수님생존당시 로마화폐로 하루품삯에 해당하는 돈이지요.
그런데 그저 1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 하지 않고 10드라크마가 있는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했다는 것은 뭔가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10을 완성의 숫자로 볼 때 하나가 빠졌다는 것은 미완성을 의미하며 다시 되찾았다는 것은 완전해 졌음을 뜻합니다.
잃어버린 1드라크마는 자신의 영혼, 즉 성령을 비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알라는 뜻에서 이런 비유의 가르침을 주신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해볼 점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는다는 대목입니다.
등불을 켠다는(light a candle) 것은 내면의 빛(성령)을 밝힌다는 의미이며 집을 빗자루로 쓴다는(sweep the house) 것은 수행(신앙생활)을 뜻하며, 부지런히 찾는다는(열심히 노력함) 것은 쉼 없이 정진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을 때 성령을 깨달을 수 있으며(드라크마를 찾음) 이러한 기쁨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이웃을 불러 함께 즐김) 말이지요.(9절)
한사람의 죄인이 회개하여 성령을 깨닫는 것은 이렇게 큰 이로움이 있기에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 했던 겁니다.(10절)
정말 기가 막힌 비유의 가르침인 것 같은데 또 어떤 가르침이 주어질는지 보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눅15:11)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눅15:12)
And the younger of them said to his father, Father, give me the portion of goods that falleth to me. And he divided unto them his living.
11절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며 두 아들은 두부류의 사람들을 비유한 겁니다.
하나님 품안에 있는 자와 품을 벗어난 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불 수 있는 이유는 12절에서 둘째가 아비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몽땅 받아서 분가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자신의 몫으로 된 것들을 달라고 요청하자 (give me the portion of goods that falleth to me) 그들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아비가 살림을 주었다는 대목에서 living의 뜻은 생활비, 생계수단 등이지요.
이런 점을 대입해보면 아비는 하나님이며 아들 둘에게 주신 것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게 되면 나 홀로목사의 이런 해석이 아주 합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눅15:13)
And not many days after the younger son gathered all together, and took his journey into a far country, and there wasted his substance with riotous living.
먼 나라로 여행을 갔다는(journey into a far country) 말은 아버지 집(하나님 품)을 벗어나 세상으로 내려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허비했다는 말은 무절제한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재산을 허비했다는 것은 물질을 말한다기보다 하늘로부터 간직하여온 영적인 면들을 잃어버렸다고 봐야합니다.
성경학자들이 이 내용을 물질적인 시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이런 내용이 된 것일 뿐 직역을 해보면 속뜻이 많이 다릅니다.
먼저 지적할 것은 허랑방탕에 해당하는 riotous living 을 직역하면 소란스러운, 이거나 시끌벅적한 삶이 됩니다.
그리고 substance는 물질, 실체, 본질, 중요성, 핵심, 요지 등의 뜻이지요.
이런 뜻을 적용시켜 보면 요란스러운 삶(세상살이)으로 그의 본질(성령, 하나님의 품성)을 낭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복잡한 세상살이에 빠져 자신본성(성령)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천국으로부터 간직해온 것들이 소진되면 삶에서 뭔가 빠져나간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다음내용이 잘 보여줍니다.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눅15:14)
And when he had spent all, there arose a mighty famine in that land; and he began to be in want.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면 그 아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나누어받아 이 세상에 내려온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니 그 땅(that land)은 아들의 육신을 비유한 걸로 봐야합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은 육신이 영적으로 메말라 가는 것을 비유한 거지요.
하나님의 품성(성령)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동안에는 몰랐으나 완전히 소진되고 나면(had spent all)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began to be in want)
큰 굶주림이 일어난다(arose a mighty famine)했는데 여기서의 굶주림은 배고픔이 아니라 영적인 갈망을 뜻합니다.
이렇게 굶주림에 시달린 가련한 영혼은 어떤 길을 걷게 될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눅15:15)
And he went and joined himself to a citizen of that country; and he sent him into his fields to feed swine.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눅15:16)
And he would fain have filled his belly with the husks that the swine did eat: and no man gave unto him.
여기에서의 그 나라(that country)는 물질세상을 가리키며 그중의 하나는 물질 세상에 속한 선생(목자, 성직자)을 뜻합니다.
그 나라 백성중 하나에게 붙여 살았다는 말은 그와 연결되었다는 말로서(joined himself to a citizen of that country) 그 사람처럼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질 세상에 내려와 살게 된 것을 돼지를 치게 된 것으로 비유한 겁니다.
여기에서 돼지를 먹이게 되는 부분을 상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데 백성중 하나가 그를 들로 보낸 것이 아니라 돼지 사육장에 보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he sent him into his fields to feed swine)(15절)
물질적 욕망을 버리지 못한 이들을 돼지로 비유했다는 사실을 볼 때 사육장은 영적인 가르침을 주는 장소, 즉 오늘날의 교회를 비유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16절은 번역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the husks that the swine did eat) 해석한 부분을 이대로 두면 전혀 다른 뜻이 되어버리는지라 반드시 고쳐야만 합니다.
돼지가 먹고 난 껍질로 배를 채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싶기에 쥐엄열매라고 해석을 했을 테지만 이것은 돼지가 먹고 난 껍질로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하늘로부터 내려온 이가 하나님 품성을 다 잃어버렸으니 영적인 가르침을 주지 못하고 물질적인 가르침만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비유했기 때문입니다.
알맹이(성령)는 빼버리고 껍질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비유한 거지요.(영적인 허기를 달래지 못함)
아무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누구도 아들에게 영적인 허전함을 채워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것이 돼지를 먹이라고 고용을 했으면 밥을 먹여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조차 주는 이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래서 이것은 비유의 가르침이 맞으며 이런 여러 가지 상황들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의 품성을 나누어받은 이가 이 세상에 내려와 성령의 깨달음 없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게 되면 이 같은 나 홀로목사 해석의 당위성(當爲性)을 알게 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
And when he came to himself, he said, How many hired servants of my father's have bread enough and to spare, and I perish with hunger!
돌이켜 말했다는 것은 자신에게 자신이 말했다는 거지요.(he came to himself, he said)
육신이 자신의 영혼에게 말했다는 의미인 동시에 육적인 자아를 영적인 자아로 돌이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단순하게 아버지에게 양식이 많은 것이 아니라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다는 대목을 보면 이 내용이 얼마나 영적인 가르침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가 가진 풍족한 빵을 나누어줄(my father's have bread enough and to spare) 고용된 품꾼이라(hired servants) 했으니 영적 스승을 뜻하지요.
그리고 여기서 주려 죽는다는 말은 물질세상에서 성령을 깨닫지 못하면 영적인 죽음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각의 순간에 이르자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눅15:18)
I will arise and go to my father, and will say un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before thee,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15:19)
And am no more worthy to be called thy son: make me as one of thy hired servants.
18절과 19절은 회개의 과정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18절에 일어났다는 말은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만약 육신에 머물렀다면 이런 생각조차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면 영혼이 깨어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겁니다.(육신은 죄악덩어리)
영적이지 못한 삶을 살았기에 천국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표현을 한 거지요.(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before thee)
자신이 비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스스로를 낮추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19절에 지금부터(no more)라고 한 것은 더 이상이라고 바꿔야합니다.
물질적이고 육적인 삶을 오래 지속해 살아온 탓에 하나님 품성을 잃어버렸으니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못하겠다는 자책이자 회개이기 때문입니다.(no more worthy to be called thy son)
이렇게 회개를 하자 곧바로 변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다음내용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And he arose, and came to his father. But when he was yet a great way off, his father saw him, and had compassion, and ran, and fell on his neck, and kissed him.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눅15:21)
And the son said un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in thy sight, and am no more worthy to be called thy son.
회개를 한 후 곧바로 영혼이 깨어났다는 것을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상거가 멀다는(he was yet a great way off) 것은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한 단계일 뿐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는 못했다는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하나님)는 회개한 아들(영혼)에게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것으로 자신의 아들임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20절)
그런데 이 내용은 영적인 길에서 일어나는 체험을 묘사해놓은 겁니다.
우리가 영적인 길을 걷기시작하고 자신내면에 성령이 깨어나기 시작하면 많은 체험들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을 아버지가 목을 껴안고 키스를 하는 것에 비유한 거지요.
하지만 이러한 영적체험에도 불구하고 구도자(아들)는 자신을 더욱 낮추며 겸손을 표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계속해서 뉘우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대목으로서 자신이 영적체험을 했다고 해서 초발심을 잃어버리고 거만하거나 교만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인 됨을 거듭 고백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대접을 하실지 성경을 통해 확인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15:22)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15:23)
And bring hither the fatted calf, and kill it; and let us eat, and be merry:
22절을 보면 아들을 귀하게 대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의(義)에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며 손에 가락지를 끼운다는 것은 언약을, 발에 신을 신긴다는 것은 땅으로부터 벗어남을 뜻하니 영(성령)의 세계로 들어 올림 받아 의(義)에 왕으로 언약 받는다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
23절에 살진 송아지를 잡는다는 것은 정말 송아지를 도살한다는 뜻이 아니라 죄 사함의 의식을 뜻하며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한 것은 천국에서 다 같이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수차례 말했듯이 구약에 기록된 제사방식은 죄 사함의 의식이자 부활에 대한의식이지요.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다음내용이 보여줍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15:24)
For this my son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And they began to be merry.
송아지(육신, 죄악덩어리)가 죽음으로서 영이 되살아났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영의 부활은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것(he was lost, and is found)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며 천국의 존재들이 다 같이 즐거워하는(they began to be merry)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대해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오해를 할 수도 있음으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의 가르침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눅15:25)
Now his elder son was in the field: and as he came and drew nigh to the house, he heard musick and dancing.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눅15:26)
And he called one of the servants, and asked what these things meant.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눅15:27)
And he said unto him, Thy brother is come; and thy father hath killed the fatted calf, because he hath received him safe and sound.
맏아들은 두 아들 중 믿음 안에 있는 자과 믿음밖에 있는 자 중에 믿음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떠나지 않고 하나님품안에 있는 자)
아들이 들판에 있었다는(son was in the field) 것은 물질적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집 가까이 왔다는(he came and drew nigh to the house) 것은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하나님과 가까이 있음) (25절)
이렇게 믿음아래 있던 큰 아들이 집에서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하인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26절) 뜻밖의 소식을 들었는데 하나님 품을 벗어나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던 이(동생)가 돌아왔다고(회개하고 돌이킴) 아버지(하나님)가 송아지를 잡아(죄 사함) 주었다고 했지요.(27절)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할 점은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인다는 부분입니다.
건강한 몸에 해당하는 safe and sound를 직역하면 안전하고 정상적이 되는데 이는 영적으로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회개하고 돌이켜서(돌아옴) 죄 사함(송아지를 잡아 드리는 죄 사함의 의식)을 받았으니 완전해졌다는 뜻이지요.
하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맏아들의 반응이 어떠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눅15:28)
맏아들이 화를 내고 들어가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맏아들에게 아버지가 나와서 들어가자고 권하고 있지요.
왜 이렇게 큰아들이 화를 내게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15:29)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15:30)
큰아들이 염소새끼 조차 잡아주지 않았기에 서운했던 것이 아니라 재산을 탕진해버린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을 축하해 주기위해 살진 암송아지를 잡아주는데 대해 서운했던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송아지를 잡는 것은 죄 사함의 의식이니 큰아들도 죄 사함의 작은 의식(염소새끼)이라도 해주었으면 한 거지요.
이 같은 큰아들의 불만에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15:31)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32)
여러분!
어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말씀을 주셨을까요.
큰아들에게 죄 사함의 작은 의식이라도 해주지 않은 것은 이미 하나님과 하나 되어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삼라만상이 하나님이 지으시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 품안에 있는 것인 동시에 큰아들 것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죄 사함의 의식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며 동생에게 죄 사함의 의식을 베풀어주신 이유는 죽었다가(영혼, 성령) 살아났기(부활) 때문이며 이 같은 일은 하나님입장에서 보면 잃었다가 찾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믿음의 길(영생을 향한 길)을 걷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 체험이나 죄 사함의 의식이 필요 없다는 말이며 잃어버린 양이 집을 찾아오면 반기고 기뻐해주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지요.
이러니 어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영적인 길을 선택함에 있어 하나님의 응답(체험)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많은 영혼들에게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주 큰 위로를 주신듯합니다.
이모든 것은 여러분의 변치 않는 믿음이 가져온 선물이자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귀한 선물을 받았는지는 각자의 믿음에 달렸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15장의 막을 여기에서 내리고 16장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