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번드 2022. 2. 26. 08:19
728x90

아들아!

오늘은 밤늦은 시간 너와 마주했구나.

보통의 경우 저녁 6시만 되면 컴퓨터를 끄는데 오늘은 초저녁에 명상을 하고 10시가 넘은 지금 너와 마주하게 되었어.

이례적인 일이긴 하지만 이 세상에 어떠한 것도 고정불변의 것은 없다 하였으니 너와의 대화 역시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하는 셈이구나.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온 우주의 비밀이 우리 옆에 내려와 있어.

단지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인식의 변화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우리들의 고정된 인식에 변화를 가져보자꾸나.

사실 오늘 하려는 너와의 대화는 지난번 한번 다루어 보았던 것이기도 한데 지난번과는 약간 다른 방향에서 조명을 해보자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데 그렇게나 서두가 기냐고?

궁금하지?

그것은 말이야.

아들과 나누는 대화로는 곤란할 것 같았던 성에관한 이야기거든.

지난번 그것을 충분히 말했지 않느냐고?

딴은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객관적인 이야기보다 좀 더 사실적인 내경험을 말함으로서 속 깊은 곳까지 헤집어 보자는 거야.

지난번 말한 것만으로 내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지식으로 알고 있는 일들을 몸소 체험하듯이 하여서 성적인 일들이 어떻게 신과 가까워 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자는 거지.

지금부터 내가 경험한 성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의 합일점을 찾기 위해 들어가 보기로 해.

아마도 내가 처음 성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쯤 이었던 것 같아.

친구 녀석 하나가 쉬는 시간만 되면 화장실을 가는데 이상하게도 화장실을 들어가서 한참을 있다가 나오기에 궁금했던 적이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인가 도저히 궁금해서 안 되겠기에 화장실 담을 올라가서 기어 다니며 그 친구 녀석이 들어가 있는 화장실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어.

그랬더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은 일을 보게 된 거야.

그놈이 쉬를 하는 폼으로 서서 손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니?

자위를 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때만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때라 여간 이상한 것이 아니었어.

나중에 친구 녀석에게 이실직고를 듣고서야 그것이 어떠한 행위인지를 알게 되었고 나 역시 그러한 행위를 따라 해보게 되었으며 그녀석보다 더욱 열심히(?) 자위를 했던 거지.

그런데 이 같은 자위행위가 나에게 성에대한 호기심을 만족하도록 만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심하게 죄책감이 드는 경험을 하게 만들더구나.

극과 극을 경험하게 된 건데 성적인 만족감 끝에 오는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던 거야.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어.

항시 자위를 하고난 끝은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엄습하였고 그러한 기분 나쁜 감정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깊은 자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나를 발견하곤 했던 거지.

이 같은 감정의 기복은 내행동을 아주 이상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는데 도대체 나의 진심은 무엇일까를 항상 생각하게 되었어.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거야.

어느 것이 나의 진정한 모습일까를 고민하게 된 거였어.

도덕적인 내 모습이 참된 나의 모습인지 아니면 본능에 순종 하는 것이 내 모습인지 헷갈린 거지.

그러면서 타락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 같아.

내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내 젊은 시절의 방탕했던 과거를 핑계 삼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막행막식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것이 갈등 속에 있었던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나를 일깨우기 위한 나의 어설픈 반항을 말하고자 함이라는 것을 네가 알았으면 해.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떠한 행위를 하는가를 깊숙한 내면에서 지켜보는 그 무엇을 이미 그때 내가 느끼고 있었기에 그를 향한 내 반항의 행동들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거야.

나는 말이야.

어린 시절부터 내안에서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를 항상 느끼면서 살았거든.

아들아!

아마 너 역시 이러한 점을 느꼈던 적이 있으리라 생각해.

나는 이것을 아주 어린 시절 경험했어.

그것이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세상에 내가 처음 왔을 때부터 이었던 것 같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그것은 말이야.

내가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개 등에 업혀져 있는 나를 스스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어.

그때 내 눈에 비쳤던 것은 어머니께서 이불을 털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이불이 색동으로 된 것이라 너무나도 선명하게 알록달록 거리고 있었기에 더욱 내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던 것 같아.

내가 개 등에 업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갓 난 아기였던지라 어디 마땅하게 놓아 둘 곳이 없었기에 궁여지책으로 개 등에 업혀 놓았던 거라 말씀해 주시더구나.

그때가 아주 어렸을 때라 내가 기억하는 것이 신기하다며…….

이것은 누구나가 모두 가지고 있는 점인데 단지 내가 조금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것뿐이라 생각해.

이것이 내 성장과정에서 항상 따라다니는 그 무엇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의 스승님을 만나고 나서야 확신을 할 수 있었으니 육신의 스승이야말로 내 정체성을 알게 하신 육신을 입으신 신이심에 틀림이 없어.

그래서 내가 찬미가를 올리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관음법문의 힘은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신을 확신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방법임에 틀림이 없어.

이것은 결코 관음법문을 선전하고자 말하는 것만은 아니야.

진정 내 인생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확실하였기에 찬양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거든.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안에서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반항하듯이 살아온 내과거가 내행동을 지켜보는 나를 확신하지 못해서였다고 한다면 관음법문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니 어찌 내가 스승을 향한 찬미가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니?

이제 내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지?

그런데 내안에서 나를 지켜보는 이가 있는 것을 아는것과 막행막식을 한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그것을 너는 아직도 모르겠니?

나를 지켜보는 그가 진정 있다고 한다면 내가 잘못하는 것을 분명히 막아 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실지로 어느 정도의 범위를 넘어서는 내행동을 제지 받기도 했고 말이야.

가령 예를 들자면 누군가와 싸움을 할 때 상대방이 나보다 턱도 없이 약하다 싶으면 오히려 나를 얻어터지게 만든다든지 마약과 같은 중독성 깊은 일을 하려면 내주변의 환경을 바꾸어서라도 말린다든지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거든.

지난번에도 말을 했지?

마약을 하고자 해도 친구 녀석들이 절대로 나에게 주지 않더라는 일 말이야.

바로 이와 같이 내 인생을 좌주우지 하는 그가 있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게 철저히 반항하고자 했던 거지.

내행동이 잘못 되었다면 나타나서 나를 꾸짖어 주던지 하라는 식이었거든.

그러나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마치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는데 결국 손해를 보고 가슴 아파하는 이는 나 자신이었지.

그러나 이러한 감정도 그 당시였고 나중에는 내안의 신이 함께 아파했음을 알게 되었는데 최근까지 이러한 일을 까맣게 모르고 살아나온 거지.

그때 중학생 시절의 자위행위 역시 그러했던 거야.

절대 내행동을 막거나 제재하지는 않으며 지켜만 보는 그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본능과 죄책감 속을 헤매는 나를 그는 묵묵하게 지켜만 보더구나.

이러한 내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20대를 맞이하였는데 이때는 보다 왕성한 성욕으로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어.

건장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열혈남아의 기질을 십분 발휘를 해야겠는데 대상이 없어서 슬픈 수컷이 되어야만 했던 거야.

그다지 싹싹한 성격의 소유자가 못되다보니 변변한 애인하나를 만들지 못하였는데 어찌 보면 내 탓을 해야겠지만 사실은 그 역시 내면의 그 무엇이 막았기 때문이었지.

어떻게 아느냐고?

그것은 평상시의 내행동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는데 평소에는 말도 잘하고 보다 사교적인데 불구하고 여자 앞에만 서면 도무지 대화를 이어가지를 못하고 쩔쩔매는 내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어.

아무런 느낌이 없을 때는 대화가 순조롭다가도 막상 무엇인가 섬씽을 만들어 보려고 하면 여지없이 숫기가 사라져 버리고 얼토당토 않는 괴변을 주절거리다가 관계가 끝나버리고 말거든.

이것은 타고난 내 성격과도 연관이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내재한 그 무엇의 농간 때문이라 여기고 있었지.

왜 그러냐 하는 것을 앞서도 말했지만 내행동을 주관하는 이가 너무나도 뚜렷했기 때문이었어.

심지어 상대방이 오해하도록 만들기도 하는데 어떤 때는 안타깝기까지 했던 거야.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이 절대 내 곁에 오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얼마나 야속했는지 몰라.

그러기에 내가 그토록 막사는 인생을 살고자 했던 건지도 몰라.

이러다보니 자연스레 내 주변에는 여자들 보다는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자리하게 되었고 그들과 주로 술좌석을 함께 하며 이성교제는 소위 말하는 화류계의 여성들을 상대하게 된 거야.

그들과 비정상적인 육체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게 되었는데 항상 내가 느낀 점은 두 가지의 감정이었어.

본능과 죄책감…….

술을 마시고 본능에 따라 행위를 치르고 나면 언제나 찾아드는 허무감과 죄책감으로 언제나 괴로워해야 했는데 자위를 할 때와 별 다를 바가 없었어.

내가 막사는 인생을 살아갈 무렵 한국 사회는 문화영화라 불리는 포르노 영화 상영이 판을 치고 있었는데 얼마나 그 도가 심했냐하면 동네 다방에서조차 대낮에 틀어줄 정도였거든.

웬만한 여관에서는 무조건 보여주었고 심지어 여관을 선전하는 입간판에 선전 문구를 쉽게 발견할 수 있기도 했지.

"문화영화 상영이렇게 써 붙인 곳이 아니면 여관에 들어가지도 않던 때가 바로 그때였거든.

나 역시 지방으로 장사를 다닐 때라 여관생활을 내 집 생활하듯이 해야 했는데 보고 싶던 그렇지 않든 선택의 여지없이 봐야만 했어.

마음속의 죄책감과 본능과의 투쟁에서 언제나 승리자는 본능인 듯 했지만 마지막을 보자면 항상 죄책감의 승리였지.

이것은 투쟁이라 할 수도 없었던 것인데 본능은 행위를 부추기고 행위에 따라 죄책감이 따르는지라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언제나 행위에 따른 결과물인 죄책감이었던 거야.

그렇다면 그러한 행위를 안 하면 되지 않느냐고?

네 말이 맞긴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워야 말이지.

건강한 수컷의 본능은 언제나 욕구의 발산을 요구하는지라 죄책감은 뒤로하고 본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거든.

그런데 이러한 본능도 너무나 심하게 다가오니까 어느 순간 지겨워 지더구나.

항상 똑같은 패턴의 그러한 포르노물에 식상하기 시작한거야.

어떤 경우는 영상물을 틀어놓은 체 잠이 들기도 하였는데 나중에는 그러한 테이프만 보면 잠이 오기까지 하였어.

처음 한순간은 좋아하며 보다가도 변화 없는 장면에 곧 식상하여 잠이 들고 마는 거지.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어떠한 것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충분히 즐긴 후에는 더 이상 그것이 흥미의 대상일수가 없다는 것이었어.

혹 그것이 천국이라 할지라도 한동안 지속 되고나면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지난번 말을 했지?

아무리 천국이라해도 수천 년을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천국이 될 수 없을 수도 있다고 말이야.

아들아!

이것은 결코 너에게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거든.

이것은 말이야.

우리들이 신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기에 이렇게나 말이 많은 것이란 것을 네가 알아야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들의 본능은 항상 최고의 희열을 추구하고 마지막의 클라이맥스를 맛보는 것을 지상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기에 하는 말이야.

다시 말해서 언제나 우리들이 천국을 맛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데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거지.

잘 못 알아듣겠지?

그렇기도 할 거야.

이것을 좀 더 우리들 생활에 접근시켜 보기위해 내가 살았던 과거로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하자꾸나.

내가 화류계의 사람들을 상대로 내육신의 욕구를 충족 시켰을 때 나에게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허탈감과 동시에 죄책감이었어.

이것은 중학교 때 배운 자위의 순간에도 어김없이 찾아왔고 포르노 영화를 볼 때도 찾아오는 감정이었거든.

이 같은 감정을 내가 살아온 삶의 형태가 건전하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내말을 오해하거나 자신은 귀족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라 여길 수밖에 없어.

사실 귀족들이 오히려  본능적인 삶에서는 타락한 내 과거 행위보다 정도면 에서 결코 덜하지 않아.

괜히 이 같은 말로서 말꼬리를 잡아 시간을 뺏기지 말고 본론에 충실 하자꾸나.

우리들이 언제나 천국 속에 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절정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다 사실화 시키는데 대화의 목적이 있는 만큼 타락여부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거든.

그렇다면 우리들이 항상 천국 속에 머물 수 있으려면 어떡해야 하느냐고?

그것은 말이야.

우리들이 절정의 문턱에서 내려오는 거라 할 수 있어.

 

아니 그게 무슨 말이지요.

천국을 가지 않고 천국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천국 같은 기분이라는 것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 맛볼 수 있는 것이지 천국도 가지 않고 문턱에서 내려왔는데 어떻게 천국을 맛볼 수 있느냐 말입니다.

 

아들아!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말을 들어보렴.

네가 만약 여성을 상대로 성행위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꾸나.

그럴 때 네가 진정 절정에 달해버려서 사정을 했을 때는 너에게 무엇이 찾아왔는지를 생각을 해보자는 거야.

아직 네가 여성을 상대로 성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네가 자위를 했다고 생각해 보라는 거지.

그럴 때 너는 무엇을 느꼈지?

내가 느낀 것과 별다를 바 없는 것을 느끼지 않았는가 말이야.

본능에 따른 네 행위 뒤에 찾아오는 허탈감과 죄책감이 들지 않았냐는 거지.

만약 네가 나의 이러한 말에 자위도 해보지 못했고 이러한 내경험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너는 또 다른 경험을 하기위한 네 영혼의 위대한 선택에 속해져 있으니 내말을 흘려듣기 바라.

모르긴 해도 내가 하는 지금의 말을 들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거라 확신을 해.

너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내이야기가 어떻게 네 귀에 들어오겠니?

이 같은 말이 너에게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와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야.

다시 말해서 본능과 죄책감 사이를 한번 정도 느껴봤다는 말이거든.

그렇다면 보다 분명해졌어.

네가 진정 성행위의 기쁨을 죄책감 없이 즐기기 위해서는 절정에 들어가지 않으면 되는 거야.

절정 뒤에 찾아오는 허탈감과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선택을 하면 된다는 거지.

그렇다면 절정을 맛볼 수는 없지 않느냐는 네 물음에 대한 해답은 네가 절정을 무척이나 많이 경험했다는 것을 네가 인식하는 것이 해답이라면 해답이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으니 좀 더 설명을 해달라고?

그래?

그렇다면 내경우를 예를 들어보자꾸나.

내가 앞서 말을 했듯이 소위 말하는 문화영화를 보면 내가 잠이 온다고 했지?

너무나 많이 봐서 지겹기도 하고 틀에 박힌 스토리라 더 이상 봐도 별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이 보여주고 있으니 잠이 올수밖에 없었지 않니?

그렇지?

이 같은 내말을 좀 더 사실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꾸나.

어떤 여성이 옷을 벗고 있는데 옷을 모두 벗을 때까지는 무척이나 나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다가 그녀의 모든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때는 더 이상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분은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는 거야.

물론 처음에는 벗은 여성의 모습이 너를 흥분시키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극적인 흥분은 사라지고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네 마음을 볼 수가 있다는 거지.

이것이 바로 모든 부부의 생활에 권태가 찾아오는 이유거든.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변화를 주며 부부의 사랑을 지속시키고자 노력 하는 것이 아니겠어?

이 같은 이유로 우리들은 완전하게 알기보다는 완전의 입구에서 즐기는 법을 알아야 하는 거지.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절정의 순간에 이르지 않고 절정을 맛보는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야.

 

이것이 천국에 이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우리들이 신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나요?

겉으로 봐서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네가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할 수 없겠으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떻겠니?

네가 천국을 지겹도록 가보아서 그곳이 어떻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 네가 어떤 선택을 하겠냐는 거야.

가보지도 않은 천국을 어떻게 가보았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렇다면 한번 물어보자꾸나.

너는 가보지도 못했다는 천국을 어떻게 갈려고 하지?

도대체 그곳이 어떤 곳인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야.

 

성경에 나와 있고 다른 불경에 나와 있기를…….

 

그만!

그쯤에서 그만하렴.

그 같은 이야기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이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거든.

성경의 천국불경의 극락코란의 그 어떤 곳등등 유토피아와 파라다이스를 말하는 수많은 종교와 경전들이 하나같이 묘사하는 것들이 우주의 어느 곳에는 있겠지만 그러한 곳을 갔다 해도 그곳이 영원한 기쁨을 너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해.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거야.

우리들이 제한된 육신의 삶을 살기 때문에 천국의 생활에 그토록 동경을 갖는 것이지 시공이 없는 우주공간에서의 수천 년은 잠시 잠깐 일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어.

언젠가 내가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어.

 

"천국의 높은 존재들은 수천 년 수만 년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천국의 우물을 통해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데 그곳을 통해 세상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저곳을 한번 가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먹게 되는데 그 순간 이 세상을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내가 경험해본 이세상의 일을 보자면 참으로 그것은 사실일 것 같았어.

아무리 좋은 섹스의 황홀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나면 허탈감과 죄책감이 들듯이 천국의 즐거움도 시간이 지나면 퇴색하기 마련일 것 같아.

 

천국은 절대 그런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의 쓰레기 같은 섹스와 어떻게 천국의 상황을 비교하려 드는 거냐 말입니다.

 

아들아!

너는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곤란해.

네가 만약 지금의 네 인식에 머물고자 한다면 그 같은 네 말이 소용 있겠으나 진정 네가 신을 체험하고자 하고 네가 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 모든 너의 고정관념들은 내려놓아야만 하는 거야.

지금껏 네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이나 죄의식은 네가 살아나오면서 주위의 환경이 네게 가져다준 인식들이었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절대적인 신 의식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하거든.

우리들은 흔히들 본능은 신의식과는 별개라도 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본능 역시 신이 우리들에게 심어준 훌륭한 도구들이지 결코 없어져야하는 감정들이 아니야.

그 또한 신의 품성임에 틀림이 없어.

만약 누군가 내말이 틀리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 어느 한쪽에 편향된 사고방식을 가진 소유자이며 지독한 편견 속에 빠져있다고 봐야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멘탈에 이상이 생긴 이라고 봐야하는데 그 이유는 정말 잘못된 것이라는 일들은 존재하지를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완벽을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신의 뜻에 위반되는 일이라는 것은 세상에 생겨날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한다면 성행위를 비롯하여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감정들이 결코 배척하고 없어져야만 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해.

문제는 우리들이 그러한 본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들 생활에 이익이 되게끔 만들 수 있느냐는 거지.

내가 지금 네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도 바로 그러한 거야.

우리들이 천국을 가지 않고서도 천국을 맛보는 것은 죽어서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지 않고 이생을 살아가는 동안도 즐길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들이 죽어서 영으로서 신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체 신을 체험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거였어.

우리가 비록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진정한 우리의 본신이 육이 아니라 영이라는 사실을 진정 알게 될 때 영과 육은 내안에서 경계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며 그로인해 우리들은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고 이 세상에 천국을 가져올 수도 있으며 우리들이 신이 될 수도 있는 거지.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지.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27:51)

 

 

하늘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없는 장막을 있도록 만든 이는 누구도 아닌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해.

우리들이 진정 없는 장막을 더 이상 있다고 우기지 않을 때 신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는 것을 말하며 이장을 마무리 하자꾸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