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普施)의 최고봉은 법(法)보시.
수행자 한분과 공덕의 크기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돈을 벌어 가난한 이를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많은 공덕이 있다 말하기에 뭐라 대꾸를 못했지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한 단체에는 대만본부와 한국지부를 연결하는 메신저가 있는데 그분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던 겁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업을 하던 터라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이를 도와주는 것이 공덕이 크다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법문을 알리는 일과 가난한 이를 돕는 일중에 어느 것이 공덕이 큰가를 물었던 것인데 원론적인 대답만이 돌아왔습니다.
둘 다 공덕이 있다는 말이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영적단체의 메신저가 할 말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목적이 영생이나 해탈에 있다면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보다 영적인 가르침을 알리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비교대상이 될 수 없으며 비교할 필요도 없이 영적인 가르침을 우선으로 여겨야하는 거지요.
하지만 이일은 어디까지나 26년 전의 일이었고 그 당시의 내 인식은 물질적인 범주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래서 강한 어조로 물질을 보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것이라 주장했던 겁니다.
사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목적에 관한 일로서 물질 지향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금전보시를 최고로 칠 것이며 해탈이나 영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법보시를 최고로 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일은 물질적인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수행을 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물질세상너머의 세상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금전보시를 최고로 친다면 내가 영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26년 전 나의 바람에 따라 사업은 부도가 났고 물질추구의 삶은 나와 영원히 결별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영적전쟁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온갖 유혹이 산재해있지만 아직까지는 넘어가지 않고 있지요.
적어도 돈으로 나를 위협하거나 겁박, 또는 회유하는 일은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금덩이와 보이지 않는 영을 놓고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영을 선택합니다.
다른 수행자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런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