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32.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지난주부터 아침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어나기 시작했는데 여러분은 느끼셨는지요.
해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반드시 가을이 시작됩니다.
절정의 순간 뒤에 찾아오는 것은 허무함이 아니라 평온함과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깨닫는 과정에서 겪는 숱한 어려움과 고난 끝에는 성령의 임하심과 평화가 찾아오고 새롭게 시작되는 거듭남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성령을 만남과 동시에 물질세상과의 이별을 고하기 위한 고통의 순간이 시작되고 내면의 성령이 빛을 발하기까지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지요.
그 다음에 찾아오는 평화와 함께 타인을 위한 고난의 행군이 또다시 시작되는 겁니다.
성령을 깨닫는데 까지는 자신 업장과의 싸움이라하면 성령을 드러낸 후부터는 희생양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찾아온 후 겨울이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계절을 느끼는 마음이 다른 것처럼 외형적인 삶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를 뿐이지요.
무더운 여름과 매서운 추위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인생에서 마주하게 되는 고통과 고난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며 감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가 늘 즐거움 속에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기 바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 여보겠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눅22:35)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눅22:36)
35절은 예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러 보낼 때 하신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가라하신 것은 오로지 성령의 힘에 의지하고 나아가라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36절에서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전대와 주머니를 가진 자는 가질 것이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이렇게 달리 말씀하신 걸까요.
이 말씀은 복이 있는 자(전대와 주머니를 가진 자)는 가질 것이라는 말로서 오는 복을 억지로 걷어찰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은 복이 있어 돈이 생기더라도 영적인 일을 더욱 가치 있게 여기라는 말이지요.(겉옷=물질, 검=하늘의 권능)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눅22:37)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53:12절)
Therefore will I divide him a portion with the great, and he shall divide the spoil with the strong; because he hath poured out his soul unto death: and he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and he bare the sin of many, and made intercession for the transgressors.
37절 말씀은 이사야서53장 12절을 인용한 내용임으로 함께 올렸습니다.
예수께서 이사야서에 기록된 일을 이루는 분이라 했으니 이사야서를 제대로 보면 37절은 저절로 이해가 됩니다.
이사야서 12절에서의 나는 하나님을 뜻하며 그로 존귀한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한다는 것은 인자로 하여금 성령을 드러낸 많은 이들과 같은 지위를 갖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강한 자와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한다는 말은(he shall divide the spoil with the strong) 영적승리에 따른 결과물을 나눈다는 의미이지요.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인자가 자신의 영혼을 바쳐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범죄자를 위해 기도하였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범죄자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자신의 영혼을 바쳐(he hath poured out his soul unto death) 많은 이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희생양이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러한 분이라는 말씀이며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그들과 섞여서 생활하라 말씀하신거지요.
따라서 36절처럼 말씀하신이유는 외형적인데(겉옷) 가치를 두지 말고 심판의 하늘(검)을 중시여기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눅22:38)
하나의 검은 땅의 심판, 또 하나의 검은 하늘의 심판을 가리키며 심판이 땅과 하늘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인과응보의 법칙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진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어디론가 간다고 하니 따라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눅22:39)
And he came out, and went, as he was wont, to the mount of Olives; and his disciples also followed him.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예수께서 습관에 따라 감람산에 가셨다고 한 것은 늘 깊은 묵상을 하여 심판의 주가 머무르는 곳(감람산)인 성전(내면)에 도달하였다는 말이며 제자들에게 이런 방법을 가르쳤다는 말입니다.(his disciples also followed him)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거지요.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눅22:40)
그곳은 주가 머무르는 곳(감람산)이니 곧 성령을 만나는 내면을 가리키는데 성령을 만났다 해서 자신을 내세우게 되면 한순간에 사탄에게 이용당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막에서 시험받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만큼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다음 장면을 보겠습니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눅22:41)
And he was withdrawn from them about a stone's cast, and kneeled down, and prayed,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22:43)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해석에 앞서 번역에 대한 문제를 말해야할 것 같습니다.
41절에 a stone's cast를 돌 던질 만큼이라 번역한 것이 잘못된 이유는 앞서 우리가 예수와 제자들이 내면으로 들어가 성령을 만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것은 돌과같이 굳은 유형의 그들로부터 떨어진 걸로(withdrawn from them about a stone's cast) 해석되어야합니다.(cast는 틀, 거푸집, 주형 등의 뜻이 있음)
육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내면으로 들어가) 영체로서 기도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해놓은 거지요.
결정적으로 42절을 보면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물리라고 한 것은 내면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육신예수가 기도 속에서 성령이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 기도했던 겁니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과 하나 된 예수가 아버지께 기도할 까닭이 없습니다.
43절에 하늘로부터 천사가 나타나 예수께 힘을 주었다는 말은 예수의 기도에는 하늘의 권능이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비록 육신으로 기도한다고 해도 하늘의 축복이 내린다는 것을 강조하기위해 이렇게 말해 놓았으며 예수역시 인간의 몸을 가졌고 일반인들과 마찬가지의 신체기능을 가졌다는 뜻에서 땀을 핏방울 흘리듯이 했다고 기록한 겁니다.(44절)
그러면 예수께 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눅22:45)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22:46)
And said unto them, Why sleep ye? rise and pray, lest ye enter into temptation.
45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일을 미리 말해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제자들이 알고 있기에 슬픔으로 인해 잠들었다 했던 거지요.
그리고 46절은 늘 깨어있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육적인 감정에(슬픔을 인하여 잠듦) 치우치게 되면 시험에 빠지기 쉬우니 성령이 깨어나게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마태복음37편, 마가복음19편에 해놓았으니 참조하시기 바라며 다음내용에 집중해보겠습니다.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눅22:47)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눅22:48)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눅22:49)
When they which were about him saw what would follow, they said unto him, Lord, shall we smite with the sword?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눅22:50)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눅22:51)
여기까지 보면 유다가 예수께 키스를 하는 것으로 신호삼아 넘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49절을 보게 되면 될 일을 보고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쳤다한 것은 뭔가 이상합니다.(saw what would follow)
단순하게 사람들과 함께 유다가 와서 키스를 한 사실만으로 넘겨주려한다 여기고 검으로 귀를 자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리고 50~51절에 귀를 잘랐는데 예수께서 만져서 낫게 했다는 것은 더욱더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앞서 우리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공부해본결과 물리적인 기적보다는 영적인 기적이 많았었습니다.
그러니 이 내용도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예수님의 다음내용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이 같은 말이 납득이 갈 겁니다.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눅22:52)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눅22:53)
52절을 보면 예수를 잡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검과 뭉치를 들고 온 것 같습니다만 53절 내용을 보면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 및 장로들이 교회에서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이 내용은 뭔가 이상하다는 거지요.
아마도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많아서 손을 대지 못해서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럴 경우 유다가 신호로 키스를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매일같이 함께 했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신호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뭔가 담긴 뜻이 있는 겁니다.
아직은 결말이 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다 물음표를 찍고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눅22:54)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눅22:55)
And when they had kindled a fire in the midst of the hall, and were set down together, Peter sat down among them.
그런데 위내용은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54절에 예수가 잡혀갈 때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다는 것도 이상하며 대제사장 집에 들어가 불 가운데 앉았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많은 이들이 함께 갔었음으로 알아보는 이들이 많을 텐데 함께 들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다음 내용을 보면 이런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을 것도 같은 만큼 주목해보겠습니다.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눅22:56)
But a certain maid beheld him as he sat by the fire, and earnestly looked upon him, and said, This man was also with him.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눅22:57)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눅22:58)
And after a little while another saw him, and said, Thou art also of them. And Peter said, Man, I am not.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눅22:59)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눅22:60)
이 내용을 보는데 하루가 걸렸습니다.
한 구절씩 살펴보고 한 단어씩 살펴보아도 도무지 속 깊은 뜻이 보이지 않았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전체적인 내용을 삼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니 엄청난 내용이 들어앉아 있음을 알았습니다.
56절에 베드로가 홀에 피워놓은 불빛을 향해 앉아있었던 것이 이상했기에 다시금 살펴보게 되었는데 처음 베드로는 여인의 물음에 예수를 부정했지요.(57 절)
또 다른 사람의 물음에도 부정했는데 이번에는 당이었습니다.(58절)
그들 중 하나라는(Thou art also of them) 말은 단체, 혹은 종교, 또는 이념과 사상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59절에서 당신도 같은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도 부정을 했고 이때 새벽닭이 울었다고 했는데 갈릴리의 뜻은 “원, 순회, 지역”이니 곧 윤회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영생을 더 이상의 돌아옴(원, 순회) 없이 영원한 하나님 왕국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 내용은 윤회를 인정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뜻하며 새벽닭이 울었다는 것은 해가 솟아오르는 아침을 비유하는 것으로, 곧 빛을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을 부정하고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부정하며) 윤회를 인정하지 않을(부정)때 진정한 영적자아(성령)를 깨달았던 겁니다.
어떻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놀라운 내용을 우리가 알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눅22:61)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2)
결국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다고 말씀하신 뜻은 빛(성령)을 보기전에 거쳐야하는 시험이라는 것을 베드로가 알았기에 감격에 복받쳐 울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육신)을 부정하고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고(부정하고) 영원하지 않는 것을 부정할 때 성령을 깨달아 영생을 얻게 되었던 겁니다.
61절에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 한 것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뒤돌아 봐주셨다는 뜻으로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 가르침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던 거지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같은 말을 인정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지만 나 홀로목사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해주시는 말씀이신지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눅22:63)
그의 눈을 가리우고 물어 가로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눅22:64)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눅22:65)
63절에서 65절까지의 내용은 예수를 끌고 가서 희롱하고 때리며 욕보였다기보다 성령을 드러낸 인자를 대하는 일반인들의 행동을 비유한 걸로 봐야합니다.
물론 겉보기에는 예수께서 당한 걸로 보이겠지만 속 깊은 뜻은 그렇다는 겁니다.
성령을 깨달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놀리기 좋아하고 공격하며 시험을 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성모독적인 말을 퍼붓기도 하지요.
바로 그러한 상태를 비유한 겁니다.
아무튼 액면 적으로는 끌려가신 것으로 되어있으니 그다음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눅22:66)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눅22:67)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눅22:68)
And if I also ask you, ye will not answer me, nor let me go.
66절에 예수를 공회로 끌어들여 당신이 그리스도가 맞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라 했지요.(67절)
이 말씀인즉 내가 그리스도가 맞지만 너희가 믿지 않지 않느냐는 반문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만약 너희가 질문한 것과 같이 내가 묻는다면 너희가 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갈 거라고(nor let me go)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곧 성령이라는 말씀으로서 사람들마다의 내면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질문을 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내면에도 그리스도(성령)가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자신들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에 그리스도는 떠난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믿지 않는 자 안에 성령이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다음내용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말이 이해가 될 겁니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눅22:69)
Hereafter shall the Son of man sit on the right hand of the power of God.
69절에 Hereafter는 “후로는” 보다 “내세에는” 이라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왜 그런가하면 육신으로 살아가기에 예수님(인자)이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내세에는 하나님 권능의 우편에 앉을 것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항의하듯 묻고 있습니다.
다 가로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눅22:70)
이 내용은 성령을 드러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물음에 예수께서 너희 한말과 같이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대답한 겁니다.
달리표현해서 자신 안에 성령이 있음을 깨닫고 드러내는 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간단명료한 대답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습니다.
저희가 가로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눅22:71)
And they said, What need we any further witness? for we ourselves have heard of his own mouth.
자!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은 71절 내용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 예수의 죄인 됨의 증거를 찾는 것으로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입에서 들었다하면we have heard of his mouth 될 것을 구태여 ourselves와 own이라는 단어를 붙여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내면의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자신들 내면으로 들었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해놓은 거지요.
어떻습니까?
나 홀로목사의 해석에 믿음이 가십니까?
믿음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