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누가복음을 마침.

배가번드 2022. 3. 23.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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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의 긴 작업을 끝내고나니 짐 하나를 어깨에서 내려놓은 것 같습니다.

새벽4시에 기상해서 잠이 드는 11시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들고 다녀야만 했던 지난2년이 이제는 멈추어선 것 같은 기분입니다.

한눈을 판 기간을 제외하면 만 1년 넘게 성경을 들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사복음서중에 3개를 마친 것인데 이제 갈수록 강해시간이 단축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한 장을 넘기려면 한 달이 넘게 걸릴 때가 많았지만 갈수록 기간이 짧아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때만 해도 구약을 인용한 내용들이 많아 작업도중 짬짬이 생각해야만 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기간이 짧아져 당일에 메시지를 받곤 합니다.

마태복음 때나 마가복음과는 달리 누가복음에는 구약을 인용한 내용이 적은 탓도 있지만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지라 시간이 많이 단축되기도 했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갈수록 천상의 메시지가 순간순간 주어지고 있으며 이럴 때마다 남모르는 기쁨을 만끽하며 웃음이 절로나 흥분상태가 됩니다.

이러다 보니 속내모르는 이들은 내가 늘 웃으며 돌아다닌다고 하지요.

그런데 정말 내가 흥분되는 것은 성경의 속 깊은 내용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내인생자체가 성경의 기록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겪어야했던 많은 고통과 인내의 순간들이 성령을 깨닫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나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은 공히 겪는 일이며 겪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반드시 넘어야할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며 누구도 이런 일을 피해갈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 둘러쳐진 불 칼이 인생마다 있다는 거지요.

이렇게 말을 하면 많은 이들은 믿지 않겠지만 성경은 이런 일에 대해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So he drove out the man; and he placed at the east of the garden of Eden Cherubims, and a flaming sword which turned every way,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fe.

 

이 내용만 잘 이해해도 우리가 영생을 얻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동쪽이라 한 것은 해가 떠오르는 쪽, 즉 빛을 보는 것을 뜻하며 두루 도는 화염검은 온갖 종류의 시험과 고난을 뜻합니다.

구도자가 걸어가는 영생을 향한 여정에 놓인 갖은 시험들이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러한 시험은 모든 방향에서 온다고 했습니다.(a flaming sword which turned every way)

어떤 인생도 이러한 법칙을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이며 빛이신 성령을 드러내지 못하면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중에서도 그룹이라 기록된 케루빔은 특정한 계급의 천사로 알려져 있는데 여러 인식의 세계를 의미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의 세계가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영역에 따른 의식세계가 있다는 의미로 복수형인 그룹들(Cherubims)이라 한 거지요.

모세가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의식의 세계가 워낙 방대해서 풀어서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 홀로목사역시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이 인식의 폭이 확장되지 않은 이에게 아무리 영생에 대해 말해봐야 소용이 없으며 오해만 가중되어 역효과만 생깁니다.

실지로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불과 얼마 전에도 댓글로 나 홀로목사를 나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정말 구원받았는지 의심이 간다며 링크를 걸어 나에게 방문할 것을 권유했지요.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지만 이제는 워낙 많이 겪어본 일이어서 대꾸를 아예 안 해 버렸습니다.

말해봐야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니와 내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내 글을 비판하려면 내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알아야하고 그 주장이 틀리다싶을 때 그 주제를 가지고 비판을 해야 마땅한 겁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다짜고짜 비판부터 하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는 거지요.

이런 까닭으로 복음서를 마칠 때마다 들어가는 글과 마침 글을 올리고 있는 것인데 그조차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비판을 가하는지라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고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안타까운 것이 그렇게나 말씀이 좋으면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 가만히 붙어있지 왜 나한테 왔나 입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해서 왔으면 제대로 알아보고 아니다싶으면 돌아서면 될 것을 구태여 구린내 나는 뭔가를 남기냐는 겁니다.

누가복음을 강해하는 중에도 몇 번 언급이 있었지만 각 복음서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나는 것은 각자가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서이기도 하고 원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인식을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많은 내용이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다르게 기록해놓은 면도 있습니다.

이방인인 누가가 예수의 가르침을 스승으로부터 전해 듣고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스승과 제자가 한 짝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만큼의 영적성과물이 주어졌던 겁니다.

나 홀로목사가 아무리 열심히 강해를 해도 믿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말로는 믿는 것처럼 하면서 시험을 하는가 하면 자신이 믿는 교회목사나 선생과 다른 말을 한다고 비난을 한다면 나에게 와서는 안 되는 거지요.

지금도 이런 일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조만간 주변정리를 제대로 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마음껏 활보하도록 만들지 않겠다는 겁니다.

아마 그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리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요한복음이 시작되면 다들 멀어지게 될 거라 확신합니다.

빛이 드러나면 어둠은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어있으니 가지 말라 해도 갈 것이며 오라해도 오지 못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마태, 마가복음은 누가복음의 시작을 가져왔고 누가복음의 마침은 요한복음의 시작을 가져올 것이며 또 다른 시작은 마침표와 함께 시작될 겁니다.

창조와 파괴는 동시에 일어난다는 불변하는 진리가 누가복음 강해의 부산물로 내려오는 것을 확인하며 마침 글을 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