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5.
나 홀로 목사입니다.
지난시간 우리는 너무나 중요한 순간을 맞이했지요.
오늘날의 크리스천들 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성경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부활이란 육신의 예수님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서 우리들안에서 되살아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몇몇 분은 예수님의 공중 재림을 기대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목숨을 걸고 말 하건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만약 예수님이 오늘날이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공중 재림한다면 그는 분명 외계인이거나 귀신나부랭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2천년동안 수없이 많은 크리스천들이 화형을 당하고 기름에 튀겨 죽임을 당하거나 사자 밥이 되는 동안에도 예수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수백 년에 걸친 십자군전쟁에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으니 그런 인정머리 없는 예수가 지금 돌아온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구세주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나 홀로 목사의 이 말에 분노하는 크리스천들이 많을 거라 여겨지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신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영적인 구원자일 뿐 육신의 구원자는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활이란 우리내면에서 성령이신 예수님이 되살아나는 것이며 공중 재림이라는 것은 우리가 육신을 버리고 영으로 돌아가게 될 때 하늘에서 영접하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육신의 몸으로 부활하거나 공중 재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부활을 하실 것 같았으면 이미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이나 왔어야했지만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을 하다 보니 언젠가 어떤 교회 목사님과의 대화내용이 생각나는군요.
그때 예수님께서 조만간 공중재림하신다기에 목사님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동안이나 부활을 하지 않으셨는데 그동안 죽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어디로 갔나요?”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하늘의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면 속이 상할 것 같아서 대화를 서둘러 마쳐버렸습니다만 어떻게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나 홀로 목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생존당시에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학식이 많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조차 잘못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아마도 이글을 읽는 많은 이들은 본인들만큼은 그렇지 않다 자신하겠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나 홀로 목사와 함께 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지 못했던 분도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생각지 못하던 일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시간우리들이 보았던 일들만 보더라도 예수님의 공중 재림이 뜻하는바가 뭐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
Verily I say unto you, There be some standing here, which shall not taste of death, ti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his kingdom.
만약 예수님의 재림이 천국에 올라가는 절대적인 조건일 것 같으면 이러한 말은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조차 어떤 이들은 예수의 재림을 볼 수 있었고 어떤 이들은 볼 수 없었다고 한다면 2천년동안 죽은 자들이 하늘의 특정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일이며 예수님이 재림을 해야만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예수님이 부활해야만 영생을 얻거나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면 왜 그 당시 예수님과 함께했던 많은 제자들은 모두가 영생을 얻지 못했으며 어떤 이들은 부활한 예수를 볼 수 있었고 또 다른 이들은 그럴 수 없었을까요?
아직도 나 홀로 목사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분들은 그야말로 대단하신 분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의 머리는 다이아몬드보다 더욱 단단하리라 여겨지는바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시기를 부탁드리며 성경 속으로 뛰어들겠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마17:1)
And after six days Jesus taketh Peter, James, and John his brother, and bringeth them up into an high mountain apart,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 가지 연상되는 것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엿새 후라는 말을 서두에 썼을까를 생각해보면 창세기에 기록한대로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천지만물을 만드신 것이 떠오르게 되지요.
그러고 나서 7일째 되는 날 안식일을 맞이하는데 바로 이와 같은 의미로 엿새 후라는 말을 서두에 썼던 겁니다.
안식일이란 경건한 마음으로 오로지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는 날이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깊은 묵상에 잠겨 높은 인식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아쉽게도 특별한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으니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높은 산에 데리고 올라갔다는 말은 높은 인식의 세계로 함께 올라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구절에 나오는 것처럼 제자들 역시 성령이 역사하는 일을 경험하게 되는 거지요.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
And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and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여기에 오시는 많은 분들 중 어떤 분들은 이러한 경험을 하셨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경험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일들이 우리주변에도 있다는 겁니다.
나 홀로 목사의 주변에는 이러한 분들이 있으며 지금도 그들과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강조를 하는가하면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딱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볼 수 없으면 다른 이들도 볼 수 없다고 여기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와 마찬가지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볼 수 없는 걸까요?
그것을 알려면 성경을 다시 한 번 더 깊이 있게 상고해 봐야합니다.
그동안 보았다시피 얼마나 많은 대중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으며 함께했었는지 우리들은 잘 압니다.
만약 그들 모두가 볼 수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향해 공격을 퍼붓거나 비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같은 사실을 볼 때 누군가는 볼 수 있지만 누군가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이미 몇 차례에 걸쳐서 말씀드렸다시피 남의 체험을 비웃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절대 자신에게 그러한 체험이 올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절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자신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우리스스로가 이러한 일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해 주어지지 않는 거지요.
이러한 일에 대해 경고해주는 구절도 성경에는 있는 걸로 아는데 아직은 나오지 않은 관계로 관련구절이 나올 때 다시 한 번 더 언급하기로 하고 성경에 집중해보겠습니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마17:3)
And, behold, there appeared unto them Moses and Elias talking with him.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
Then answered Peter, and said unto Jesus, Lord,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if thou wilt, let us make here three tabernacles; one for thee, and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as.
여러분들이 얼마나 성경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의 세계가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기록해놓은 겁니다.
처음에는 제자들 눈에 예수님이 빛으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가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까지 동시에 출현했다는 것은 진정으로 영생을 얻게 될 경우 너와나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져 여러 사람이라 하지만 빛 안에서 모두가 하나임을 나타내 보이는 거지요.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납득이 갈 거라 여겨집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17:5)
While he yet spake, behold, a bright cloud overshadowed them: and behold a voice out of the cloud, which said,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hear ye him.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마17:6)
And when the disciples heard it, they fell on their face, and were sore afraid.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마17:7)
And Jesus came and touched them, and said, Arise, and be not afraid.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17:8)
And when they had lifted up their eyes, they saw no man, save Jesus only.
보시다시피 앞서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였는데 갑자기 빛난 구름이 나타나서 말을 하고 난후 예수님만 남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했지요.
모세와 엘리야, 예수 모두가 빛의 세계에서 하나라는 말인 동시에 영생을 얻어 성령과 하나가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성령)안에서 하나가 되어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비밀하나가 숨겨져 있는데 영의 세계라는 것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제자들이 두려워했다고 나와 있지요.
하지만 영역 본을 보면 많이 다릅니다.
직역을 해보면 제자들이 들었을 때 그들의 얼굴이 화끈거려(쓰라려) 두려워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등급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으로서 아직까지 육신적인 인식아래 놓인 제자들인지라 영의 세계와 완전히 하나가 되지못하였기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진동력이 달라서 육신이 적응을 하지 못하였던 겁니다.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영은 물질을 통과할 수 있지만 물질은 물질을 통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의 수준이 결코 낮다고 할 수는 없지요.
여러분들 중에 이와 같은 이들이 몇이나 될는지요?
혹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이러한 경험을 못했더라도 실망을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나 홀로 목사와 함께 하다보면 언젠가는 경험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보다 더욱 좋은 선물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기대하시라 말씀드리며 성경에 집중하겠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마17:9)
And as they came down from the mountain, Jesus charged them, saying, Tell the vision to no man, until the Son of man be risen again from the dead.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마17:10)
And his disciples asked him, saying, Why then say the scribes that Elias must first come?
제자들이 이상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것까지 보았던 제자들이 궁금했던 겁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 모두가 구약을 믿고 있었기에 구세주인 엘리야가 오기를 기다렸지요.
그런데 분명히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었으니 제자들로서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겁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기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야)인데 어떻게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가 했던 거지요.
이 같은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봐야할 것 같으니 먼저 말라기에 예언되어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보고 난후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
Behold, I will send you Elijah the prophet before the coming of the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바로 이 같은 내용 때문에 많은 이스라엘사람들이 엘리야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으십니까?
오늘날 교회의 수많은 목회자들은 이 내용을 예수님이 오시기를 예비하여 요한이 올 것을 예언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보이시는지요?
만약 그렇게 보이고 있다고 한다면 시급하게 안과를 가보시거나 정신과에 가보셔야 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말라기내용을 다시 한 번 더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어떻게 예수(메시야)의 출현을 알리는 거라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세상멸망을 말하는 것이며 그 당시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파하실 때 세상멸망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잠시 보도록 할까요?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여러분!
이제 감이 잡히시나요?
말라기에서 말하는 크고 두려운 날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의 뜻은 멸망을 말하는 것인데 이세상이 멸망한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죽음을 멸망으로 본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하게 이해가 갈 것인데 죽음이란 개인에게 있어서 온 세상의 멸망과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이 같은 나 홀로 목사의 말이 틀리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아주 심각한 모순에 빠져들게 됩니다.
예수님 생존당시에 요한과 예수님을 비롯하여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멸망을 말했지만 2천년동안 멸망의 순간은 오지 않고 세상은 건재하니까요.
이러한 나 홀로 목사의 말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인증해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마17:11)
And Jesus answered and said unto them, Elias truly shall first come, and restore all things.
엘리야가 먼저 와서 회복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회복할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말라기를 다시 봐야 합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4:6)
예수님은 이미 이러한 내용을 아시는지라 회복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정리를 해보면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기 이전에 엘리야가 와서 하나님을 떠나있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든다는 거지요.
이런 까닭으로 요한이나 예수님이 공히 회개하라 외쳤던 겁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요한을 예수님앞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 비하시키고 있지만 다들 성경을 잘못해석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영적인 경험조차 없는 이들이 제멋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게 되면 나 홀로 목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거라 여겨지는바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마17:12)
But I say unto you, That Elias is come already, and they knew him not, but have done unto him whatsoever they listed. Likewise shall also the Son of man suffer of them.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마17:13)
Then the disciples understood that he spake unto them of John the Baptist.
눈을 크게 뜨고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저희들 마음대로 여겼다는 것이니 요한을 가리키며 인자(예수)또한 요한과 마찬가지로 고난을 받게 될 거라 했으니 요한과 예수님이 동일선상에 놓인 영적스승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다는 말을 성경을 통해 듣기는 했어도 실지로 우리들의 삶에서 적용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야 우리들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만이 성령이 깨어날 수 있고 다른 이들은 모두가 죽어야만 성령과 하나 된다고 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은 모두 엉터리가 되어야하지 않겠냐는 거지요.
어떤 교회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들 교회에서 전해주는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게 되면 영적인 구원만이 아니라 생활구원이 이루어지고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서 나중에는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분명 지극히 성경적이며 보다 영생에 가까운 가르침인데 불구하고 그분은 아직도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성경해석이 일괄적이지 못해서 육신의 부활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목사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점점 예수님을 닮아서 하나가 된다고 한다면 육신의 부활을 기다릴 이유가 없지요.
이미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 보았듯이 이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한 것처럼 지금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과 하나 됨의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죽어서도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사실 영의 세계라는 것을 한순간에 설명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인지라 지금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미 높은 영의 세계에서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는 영혼(성령)과 인간의 육신으로서 성령을 깨달아가는 영혼이 있습니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란 이러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만 성령 안에서는 하나일 수밖에 없지요.
앞서 보았던 대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동시에 나타났음을 볼 때 요한이 부활한 엘리야라고 한다면 영의 세계에서는 예수님과 하나가 분명합니다.
우리역시 그러할 수 있음은 물론인데 아직은 우리들이 이러한 인식을 하기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확인한 사실을 비추어볼 때 나 홀로 목사와 함께하는 동안 가능하리라 여깁니다.
이제 또다시 성경 속으로 발길을 옮겨볼까요?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마17:14)
And when they were come to the multitude, there came to him a certain man, kneeling down to him, and saying,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마17:15)
Lord, have mercy on my son: for he is lunatick, and sore vexed: for ofttimes he falleth into the fire, and oft into the water.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마17:16)
And I brought him to thy disciples, and they could not cure him.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마17:17)
Then Jesus answered and said, O faithless and perverse generation, how long shall I be with you? how long shall I suffer you? bring him hither to me.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마17:18)
And Jesus rebuked the devil; and he departed out of him: and the child was cured from that very hour.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17:19)
Then came the disciples to Jesus apart, and said, Why could not we cast him out?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And Jesus said unto them, Because of your unbelief: for verily I say unto you, If ye have faith as a grain of mustard seed, ye shall say unto this mountain, Remove hence to yonder place; and it shall remove; and nothing shall be impossible unto you.
예문으로 올린 성경말씀은 단순하게 간질병 걸린 아이를 치유한 사실을 말하고자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 하고자 한 것입니다.
17절에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faithless and perverse generation)라고 하셨는데 이는 제자들과 환자의 부모 모두에게 하신말씀입니다.
시술자(제자들)와 치료를 받고자하는 사람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한마음으로 믿어야만 치유가 되는 것인데 치료를 부탁하는 사람도 반신반의 하는 상태였고 시술자(제자들)역시 믿음이 약한지라 치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꾸짖었던 겁니다.
시간관계상 올리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내용이 (막9:14~29) 과 (눅9:37~43)에 나와 있는데 마태복음과는 상당부분 다르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치료된 사실보다는 믿음을 강조하기위한 일이었기에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20절 말씀만 보더라도 우리들은 충분히 알 수가 있지요.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했는데 여러분은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만일 이 구절을 액면그대로 적용시키게 되면 오늘날의 크리스천들 중에 단한명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누군가 자신 있게 믿음이 있다 나서면 그는 산을 옮길 수 있어야하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분명 성령을 말한 것이며 빛(성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성령이신 빛이 드러나게 된다면 못할 것이 없게 된다는 말인데 앞서 본대로 성령이 하지 않는 일이란 없으며 함이 없이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아직은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관련구절이 나올 때 한 번 더 언급하기로 하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결국 14절에서 20절까지의 내용은 제자들에게 영의 일을 가르치기 위한 말씀인 셈인데 다음구절을 보면 나 홀로 목사의 말이 이해가 갈 겁니다.
(없음)(마17:21)
Howbeit this kind goeth not out but by prayer and fasting.
개역개정판에는 없음으로 나와 있지만 영역 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병은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나가지 아니하니라.”
분명 앞 구절에서는 믿음만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으며 무엇이던 못하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나 홀로 목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시고 계십니다.
앞에서도 우리들이 여러 번 경험했듯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여러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내용들이 비유로서 이루어져있으며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내용과는 상당부분 다른 점들이 많았지요.
다음구절의 내용도 그런 것 같으니 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마17:22)
And while they abode in Galilee, Jesus said unto them, The Son of man shall be betrayed into the hands of men: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마17:23)
And they shall kill him, and the third day he shall be raised again. And they were exceeding sorry.
벌써 수차례에 걸쳐서 예수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예고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뭔가 다른 일이 감지가 되고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따로 모여서 뭔가 회의를 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지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성경을 통해 알게 되리라 기대해보며 한걸음 더 나가겠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마17:24)
And when they were come to Capernaum, they that received tribute money came to Peter, and said, Doth not your master pay tribute?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마17:25)
He saith, Yes. And when he was come into the house, Jesus prevented him, saying, What thinkest thou, Simon? of whom do the kings of the earth take custom or tribute? of their own children, or of strangers?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마17:26)
Peter saith unto him, Of strangers. Jesus saith unto him, Then are the children free.
반 세겔(tribute money)이라는 말은 대속 법에 의거한 목숨 값을 대신하는 속전으로 성소에 바치던 화폐단위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내야했는데 예수님도 낼 것을 요구받은 겁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당연히 내야한다 생각하고서 집에 들어가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던 거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베드로를 막아서며 말씀하시길 세상의 임금들이 아들들에게 세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이 성전 세를 내야할 이유가 없음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말씀을 번복하셨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17:27)
Notwithstanding, lest we should offend them, go thou to the sea, and cast an hook, and take up the fish that first cometh up; and when thou hast opened his mouth, thou shalt find a piece of money: that take, and give unto them for me and thee.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서 세를 내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몇 가지 집중해서 분석해 볼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실족에 해당하는 단어 offend 는 불쾌하게 하다라는 뜻과 범죄를 저지르다 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실족하게 한다고 번역한 것은 범죄를 저지르게 한다는 뜻에 가까운데 예수님께서 세금을 주지 않게 되면 세를 받으러 온 사람이 화를 내거나 욕을 하게 되니 죄를 짓게 된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결국 지난시간 언급했던 불교에서 말한 것과 동일한 말씀을 하신거지요.
중생심(衆生心)을 생각해서 세속 법을 지켜야한다 말하는 불교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동일한 까닭은 영적인 말씀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다에 나가 낚시를 던진다는 의미는 세상(바다)에 나가 말씀을 전하면(낚시)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입을 열다) 있을 것이니 그로부터 십일조를 받아 세금을 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17장의 말씀을 모두 마쳤습니다.
사실 후반부에서는 시간이 없어 간략하게 마치긴 했습니다만 참으로 많은 일들이 담겨있었지요.
아쉽긴 하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오늘 못 다한 이야기가 담긴 요한복음의 몇 구절을 남기며 여기에서 쉬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