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태복음26.

배가번드 2018. 10. 20.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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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서만 존재하는 나 홀로 목사입니다.

지난시간 나 홀로 목사는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고 했는데 많은 분들이 실망을 했을 거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여겨서는 곤란합니다.

이미 2천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부활이 일어났는데 오늘날 우리들에게 알려진 많은 성인들이 그러합니다.

성령이신 예수님이 그들 안에서 되살아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많은 목회자들이나 성직자들안에도 성령이신 예수님이 부활하고 있으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들 내면에서도 예수님은 부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여러분들이 만약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면 목사님이 바로 엘리야가 되어야 할 것이고 성당을 다닐 경우 신부님이 엘리야라 할 수 있겠지요.

진정으로 우리들이 성령을 깨닫기 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을 해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4:5)

Behold, I will send you Elijah the prophet before the coming of the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엘리야를 보낸다고 기록한 것을 볼 때 우리들의 조상들도 마찬가지이며 외국의 경우에도 동일하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를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종교에 국한시킬 수 없다는 겁니다.

이미 수차례 강조했다시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이 아는지라 타종교에도 엘리야가 있어야하며 타 국가에서도 엘리야는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에는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할지라도 예수님이 오셨으니 더 이상 엘리야를 기다리지 않고 예수를 기다려야한다면 또다시 우리들은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류를 되풀이 해야만 하지요.

성경에 기록한대로 성령으로 모세, 엘리야와 하나가된 예수님을 우리들이 인정할 수 있다면 종교가 다르고 이름이나 육신이 다르다할지라도 빛 가운데 거하시는 신(하나님)을 만날 경우 모두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나라에 성경이 들어오기 전의 조상들은 모두가 지옥 갔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게 되지요.

결국 이름이 다르다 해도 모든 종교가 꼭짓점에서 만나야만 하는 겁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인식들이 있겠지만 성경 속에는 그런 내용들이 있으리라 여겨지는바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18:1)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18:2)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And said, Verily I say unto you, Except ye be converted, and become as little children, ye shall not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참으로 어린아이 같은 질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세상과는 달리 영의 세계에서는 높낮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지만 아직 영의 세계를 모르는지라 이렇게 물었던 겁니다.

너무나 단순한 질문에 예수님은 즉흥적으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주위에 있던 어린아이를 불러다 앉히시고는 설법을 펼치신 거지요.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은 아이들처럼 순수해지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라 했지만 그냥 아이(children)가 아니라 아주 어린아이(little children)를 말하는데

어른들처럼 온갖 판단과 계산을 하지 않고 아기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지요.

여담이긴 합니다만 도인(道人)들 세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잠이 오면 잠자고 기쁘면 웃으며 슬프면 운다.”

 

본능에 충실한 것 같아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남들 눈을 의식해서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잠이 와도 참아야하고 기뻐도 남의 눈치를 보느라 마음껏 기뻐하지도 못하고 슬퍼도 참아야한다 배웠기에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의 말씀을 하신거지요.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보다 상세하게 설명을 해놓았으니 보시죠.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Whosoever therefore shall humble himself as this little child, the same is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이 말씀 자체를 보면 천국에도 크고 작은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영의 세계에 대해 모르는 제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해주기 위해서 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많은 이들이 납득하지 않을듯하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복음서에 나와 있는 동일한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10:13)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0:1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10:15)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0:16)

 

누가복음 1815~17절에도 동일한 내용이 담겨있지만 마가복음과 별다른 점이 없기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보시다시피 겸손한자들이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나 천국에 높고 낮음이 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만 약간의 번역에 오류가 보이고 있는데 15절에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이라고 했지만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이라고 고쳐야합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 말씀은 거짓말일까요?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성경말씀이 하나도 틀린바가 없다했으니 분명히 옳은 말일 것이지만 단지 약간의 인식에 전환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겸손이라는 말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낮추는 것이라 알고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흔히들 좋은 일을 하거나 성공한 사람들을 칭찬할 때 겸손함을 내비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지만 성경에서의 겸손함이란 그런류의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어린아이가 그러한 겸손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분명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했으며 성공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들의 눈을 의식해서 안 그런 척 하는 겸손을 아이들은 할 줄 모르며 그저 했으면 했다 안했으면 안했다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 말할 뿐이지요.

바로 이러한 겸손을 예수님은 말씀하신 겁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이러한 세상적인 겸손을 말한다고 여긴다면 예수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공격을 무릅쓰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말씀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겸손과는 거리가 먼 말씀이겠지만 성령을 깨달아 알았고 하나 되었으니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이러한 겸손을 누가 감히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겸손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으시면 다음구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18:5)

And whoso shall receive one such little child in my name receiveth me.

 

어린 아기처럼 순수한 이를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이지요.

여기에서 내 이름으로(in my name)한 것은 성령을 말하는 것이며 누구든지 성령과 하나 된 자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18:6)

But whoso shall offend one of these little ones which believe in me, it were better for him that a millstone were hanged about his neck, and that he were drowned in the depth of the sea.

 

나를 믿는 작은 자는 성령과 하나 된 이를 가리키는데 이 말씀인즉 누구든지 성령을 깨달은 이를 해치거나 피해를 주면(offend) 엄청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이미 우리들이 확인했듯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인 요한을 죽인 헤롯이 어떠한 지경에 처하게 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또 한 가지 알아야할 일이 있습니다.

(성령)의 세계에는 국경이나 종교의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령이 크리스천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며 하나님 또한 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많은 크리스천들이 나 홀로 목사의 말에 반대를 하시는 것 같으니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44:28)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45:1)

 

바벨론의 진실 편에서 이미 말해놓았듯이 고레스라는 인물은 바사(페르시아)의 초대 왕으로 키루스2B. C (559~530)인데 분명히 이방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종교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며 국가가 다르다고 해서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함부로 대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7)

Woe unto the world because of offences! for it must needs be that offences come; but woe to that man by whom the offence cometh!

 

세상에 불행이(Woe) 있는 이유가 남에게 피해를 입힌 일 때문(because of offences)이라 했지요.

그런데 피해를 입히는 일이 필요한일이라고(it must needs be that offences come)했으니 참 재미있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분명 인과응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고통과 불행이 남에게 상처를 주고 함부로 대했기 때문이라 했으니 종교가 다르고 국가가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특히 빛이신 성령을 깨달아 아는 이를 실족하게 만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지요.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18:8)

Wherefore if thy hand or thy foot offend thee, cut them off, and cast them from thee: it is better for thee to enter into life halt or maimed, rather than having two hands or two feet to be cast into everlasting fire.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18:9)

And if thine eye offend thee, pluck it out, and cast it from thee: it is better for thee to enter into life with one eye, rather than having two eyes to be cast into hell fire.

 

8절과 9절 말씀에서 영생에 들어간다 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번역입니다.

죄를 범하게 만든 손과 발을 찍어 장애인이나 불구자로 사는 것이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보다 낫다고 했을 뿐 영생이라는 단어는 없지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을 것 같은 이 구절을 나 홀로 목사가 문제 삼고자하는 것은 결코 영어실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영의 세계를 모르는 이들이 이러한 번역을 보게 되면 영의 세계에 대해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세계는 빛의 세계인데 불구자로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비록 이 세상에서 불구자라 할지라도 성령과 하나 되어 영생을 얻게 되면 완전한 몸으로 바뀌게 됩니다.

만약 지금과 같이 예수님말씀을 해석할 경우 예수님께서 영의 세계를 모르고 한 말씀이 될 것이니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일과 다름이 없기에 반드시 고쳐져야 합니다.

이 구절들은 어디까지나 앞선 구절들의 연장선에서 하신말씀으로 성령과 함께하는 이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 것을 경고하신거지요.

나 홀로 목사가 사사롭게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증명해주십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8:10)

Take heed that ye despise not one of these little ones; for I say unto you, That in heaven their angels do always behold the face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앞서 말한 대로 작은 자는 성령과 함께하는 이를 말하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이 나왔습니다.

그들의 천사들이 천국의 하나님을 항상 본다고 했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사는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에게 딸린 보호령으로서 수호천사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영생의 세계)과 사람사이를 연결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항상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성령과 함께하는 이를 해치게 되면 하나님에게 그 사실이 보고된다는 말이니 훗날 하나님 전에 올라 심판을 받게 됨을 간접경고하신 셈이지요.

여기까지가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이 어떠하다는 것과 영생(천국)에 이르게 되려면 어떠해야하는지를 말씀하셨고 그들을 함부로 대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까지 가르쳤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는 어떤 가르침이 있는지 볼까요?

 

(없음)(18:11)

For the Son of man is come to save that which was lost.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18:12)

How think ye? if a man have an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be gone astray, doth he not leave the ninety and nine, and goeth into the mountains, and seeketh that which is gone astray?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18:13)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8:14)

Even so it is not the will of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that one of these little ones should perish.

 

11절의 말씀은 개역개정판에는 없음으로 나와 있지만 영역 본에는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다 하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준비가 된 영혼(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이들)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원래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백 마리의 양) 존재로 살던 우리들이 이 세상에 내려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찾으러 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한 말에는 아주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이들이 극히 적다는 것을 말씀하신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백 명이라는 말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기 바라며 다음내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18:15)

Moreover if thy brother shall trespass against thee, go and tell him his fault between thee and him alone: if he shall hear thee, thou hast gained thy brother.

 

이 말씀은 영생의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를 반대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라는 내용입니다.

죄를 범하거든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범죄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반대하는 일을 말한 거지요.

그랬기에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권고하라 말씀하셨으며 그가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는다 했던 겁니다.

앞에서 사용한 형제라는 단어는 육신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며 뒤에 쓰인 형제는 같은 믿음 안에서의 교우(敎友)를 뜻하는 것입니다.

요즘말로하자면 포교활동(布敎活動)을 하는데 있어서의 행동방침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18:16)

But if he will not hear thee, then take with thee one or two more, that in the mouth of two or three witnesses every word may be established.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8:17)

And if he shall neglect to hear them, tell it unto the church: but if he neglect to hear the church, let him be unto thee as an heathen man and a publican.

 

이 구절을 읽어보니 과거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십 수 년 전 동생으로부터 교회 다닐 것을 권고받기 시작했을 때 바로 이러한 일들을 경험해야만 했었지요.

사실 나 홀로 목사가 교회를 처음 다녔던 때는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수요일마다 빵을 나누어주었는데 교회에서 들려주는 성경에 대한 이야기보다 빵에 관심이 더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궁금했던 점이 있었는데 왜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님께서 예수님은 우리들안에 살아계신다고 하면서 예수님 오시는 것을 기다린다고 할까 했었지요.

결국 40년도 넘게 지난 오늘날에야 알게 되었지만 잘못된 믿음 탓에 어린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이 구절들도 잘못 해석하게 되면 싫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게 되는 거지요.

소위(所謂) 성경을 믿는다는 수많은 종파의 사람들마다 어쩌면 하나같이 이 대목을 올곧게 지키려고 노력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다른 구절들은 다들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해석을 해서 종파를 달리하면서 교세확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 구 절 만큼은 한 획도 틀리지 않게 공통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나 홀로 목사가 감히 말하건대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2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 필요했던 포교시의 행동지침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특정 종교단체와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17절에 교회에다 말하라고 한 것을 볼 때 나 홀로 목사가 마태복음 4편에서 언급 했던 대로 에세네파였던 요한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역시 에세네파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한 시기가 3년이 조금 넘는다는 것을 보면 그 짧은 기간 동안 예수님 제자들의 힘만으로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에세네파였던 요한과 예수님이 서로 알고 있었던 일만 보더라도 이와 같은 일은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하지요.

이러한 일들을 종합해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종파 간에 치열한 다툼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가 있습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이렇게 삼강구도로 짜인 유대교 종파간의 다툼은 삼국지를 방불케 했을 거라 여겨집니다.

그중에서도 바리새파와는 그 다툼이 극에 달했을 거라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그들과는 다소 비슷하면서도 틀리는 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선적으로 보자면 영혼의 세계를 믿고 있다는 것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엄격한 계율과 금식의 전통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에세네파는 금욕주의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하나님과 하나 됨을 주장하고 있었지요.

바리새파로서는 인간이 신이신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에세네파와는 원수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처럼 자신이 하나님이라 하는 이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데 나 홀로 목사와 함께하는 많은 이들 역시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지요.

과거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줄때와 마찬가지 상황이라 할 수가 있는데 그 당시 예수님은 어떠한 말씀을 하셨는지 또다시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8)

 

이미 마태복음 24편에서 말해놓았듯이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하늘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니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분명 이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 여러 종파들을 겨냥한 것으로 제대로 된 믿음을 갖지 못하면 우상숭배의 늪에 빠지게 되어 영생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성경에 대해 제대로 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던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한 내용인데 이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과 하나 된 이의 말을 듣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8:19)

Again I say unto you, That if two of you shall agree on earth as touching any thing that they shall ask, it shall be done for them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이 내용을 보면서 크리스천들은 말할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두 사람이 합심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어야함에도 왜 이루어지지 않을까

 

이런 분들이 알아야할 사실은 18절과 19절을 합하여서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18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 땅에서 매인바가 없는 사람, 즉 진리를 얻어 자유롭게 된 이들 두 사람이 합심하면 이룰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For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in the midst of them.

 

이 말씀에 따르면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이 모인 곳에는 당연히 예수님이 함께해야만 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몸으로서 올수 있을까요?

당연히 성령으로서 오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까지 성령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사실 이 같은 일은 바꾸어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 이는 이 세상에 없지만 단지 육적이고 물질적인 사고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는 탓에 성령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드러나고 나면 욕심이 없어지는지라 뭔가를 하고자하는 마음자체가 없어집니다.

이미 하나님(성령)께서 내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주시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저 감사할일만 있게 되지요.

아직 감사만 하고 지내기에는 우리들이 버려야할 마음의 욕심들이 많은 탓에 성령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성경을 공부하다보면 반드시 그런 날이 오리라 확신하며 또다시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18: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18:22)

 

이 말씀을 두고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을 공격하는데 이용합니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타인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거나 비난을 받아도 참아야한다 말하지요.

하지만 이 말씀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이유도 없이 공격을 받거나 피해를 입어도 참아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도할 때 사람들로부터 반대의사에 부딪쳤을 경우의 마음가짐을 말씀하신 겁니다.

15절에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if thy brother shall trespass against thee)하는 내용과 이어지는 말씀이지요.

과격하게 해석을 해놓았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 했지만 순화된 표현으로 보자면 너희에게 반대하여 잘못을 저지르거든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조상 때부터 유대교를 믿고 있는 형제들인지라 이러한 표현을 썼던 겁니다.

비록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들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생을 가르치지 못하고 잘못된 믿음을 가르친다 할지라도 원수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했던 거지요.

지금 나 홀로 목사의 말이 믿기지 않는 분들은 이어지는 예수님말씀에 귀를 기울여주시기바랍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18:23)

Therefore is the kingdom of heaven likened unto a certain king, which would take account of his servants.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18:24)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18:25)

But forasmuch as he had not to pay, his lord commanded him to be sold, and his wife, and children, and all that he had, and payment to be made.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18:26)

The servant therefore fell down, and worshipped him, saying, Lord, hav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pay thee all.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18:27)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18:28)

But the same servant went out, and found one of his fellowservants, which owed him an hundred pence: and he laid hands on him, and took him by the throat, saying, Pay me that thou owest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18:29)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18:30)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18:31)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18:32)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18:33)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18:34)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So likewise shall my heavenly Father do also unto you, if ye from your hearts forgive not every one his brother their trespasses.

 

보시다시피 23절에 곧바로 천국에 대한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내용들이 천국과 복음에 관한 말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지요.

여기에서 말하는 어떤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며 빚진 자는 우리 인간들을 말합니다.

빚을 졌다는 말은 죄를 많이 지었다는 말이며 25절에서 모든 소유를 팔아 갚도록 했다는 말은 인과응보의 법칙을 말해주는 겁니다.

하지만 26절과 27절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뉘우치며 용서를 구할 때(fell down, and worshipped)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말이야말로 기가 막히게 좋은 죄 사함의 방식인데 오늘날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범하는 오류이기도하지요.

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다음구절들을 보지 못했음이 틀림없습니다.

28절부터 34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반드시 용서해주시는 것이 틀림없지만 우리들이 타인들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참회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용서받는 일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마지막 35절에서 예수님은 아주 뜻 깊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반목을 하고 등을 지고 미워할지라도 마음으로부터는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왜 이같이 말씀하셨나 하는 것은 17절 말씀을 보면 알 수가 있지요.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8:17)

And if he shall neglect to hear them, tell it unto the church: but if he neglect to hear the church, let him be unto thee as an heathen man and a publican.

 

비록 이스라엘의 많은 이들이 삿된 믿음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그들 역시 하나님의 형제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기는 하되 마음속깊이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나 홀로 목사가 누누이 강조했던점이 바로 이러한 일이었지요.

사는 곳이 다르고 처해있는 환경이 달라서 종교가 달라졌고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형제이니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인데 오늘 예수님의 입을 통해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과연 어떠한 일이 우리를 기다릴지 기대해보면서 18장의 막을 여기에서 내리겠습니다.

 

 

대저(大抵) 사람들은 남의 잘못이나 흉허물은 볼 수 있지만

자신이 불구(不具)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노라.

 

타인의 잘못을 말함으로 인해

그들이 받아야할 응보를 가져오게 되니

어찌 득이 된다 할 것이며

 

내 잘못을 감추고

애써 변명함으로 인해

뉘우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니

어찌 손해라 하지 않을 손가?

 

구도(求道)의 길을 걸어가려함은

득도(得道)를 하기 위함이며

득도를 한다는 것은

지혜(智慧)를 열기 위함이니

지혜는 불구의 몸을 완전케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