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요한복음3.

배가번드 2022. 4. 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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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벌써 1월의 달력이 생명을 다하고 이어서 2월이 왔습니다.

이러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해가 지나가게 되지요.

세월 참 빠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실체도 없는 시간과 공간에 매여 사는 사람들의 삶이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하루라고 정해놓은 것 자체가 허망하기 짝이 없지요.

잠시 눈을 감고 뜨고 나면 하루가 지났다 말하고 그 하루가 삼십일이 되면 한 달이 지났다고 하며 또 그 한 달이 12번 지나고 나면 한해가 지났다고 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일까 싶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도 우리가 의미부여를 하게 되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집니다.

하루는 1, 즉 절대자 하나님을 뜻하며 한 달을 가리키는 30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완전하다는(10은 완전의 숫자)(3×10)의미이며 12달(한해)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과 연합(3×4)한다는 뜻입니다.

또 하루(1), 한 달(1), 한해(1)가 모두 하나님 품안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지요.

이렇게 풀어보면 사람에 따라 하루 만에 성령을 깨닫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으며 한 달 만에도 가능하며 한 해 동안에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한 해 동안 완성하지 못하면 또 다른 한해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과 하나 됨이 가능하게 세상을 만들어놓으셨다는 거지요.

너무나 경이롭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이런 일에 감동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나 홀로목사는 순간순간 놀라고 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억지로 추스르며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제일먼저 찾아오는 것은 졸음입니다.

사실 이것은 졸음이라기보다 세상에서 묻어온 거친 파장이지요.

물질세상의 파동은 영적인 것과 상반되다보니 한동안 조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시간정도 비몽사몽 속을 헤매다 겨우 진정을 하고 성경에 집중하노라면 어느새 천상의 문이 열리고 성경의 비밀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이렇게 나 홀로목사는 누구도 맛보지 못하는 천국의 축복을 매일경험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축복이 많은 걸로 치자면 여러분이야말로 대복이 터진 겁니다.

왜냐하면 나 홀로목사가 1주내지는 2주에 걸쳐 힘들게 집중한 끝에 얻은 엑기스를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접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어떨 때는 한 구절을 1달 만에 완성한 적도 있는데 반해 여러분은 그야말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편안히 앉아서 천상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어찌 복이 없다 하겠습니까.

사실 여러분이 이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만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천상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겁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그만큼의 믿음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까지 따라오신 것을 보면 일반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인식을 갖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식만큼 높은 가르침이 오늘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을 기대하며 성경 속으로 뛰어들겠습니다.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요2:1)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요2:2)

 

언제나 그렇듯이 성경의 대부분 내용들은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이 내용을 제대로 알려면 뜬금없이 사흘이라는 말을 한 까닭을 생각해봐야합니다.

성경의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며 인간의 몸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몸이신 성령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갈릴리는 원, 순회의 의미로 영이 세상에 돌아옴(윤회)을 나타내는 말이며 가나의 뜻은 “갈대”이지요.

따라서 갈릴리 가나는 세상살이에 흔들리는 인간의 몸을 비유한 것이며 혼인은 영육이 하나 됨을 비유한 겁니다.

결국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은 특정한 장소에서 영육이 하나 되는 묵상회(수양회, 법회)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 홀로목사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다음내용에 집중해보시기 바랍니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요2:3)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2:4)

Jesus saith unto her, Woman, what have I to do with thee? mine hour is not yet come.

 

성경에 나오는 포도주는 술이 아니라 피를 비유한 것으로서 생명을 뜻함과 동시에 성령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없다고 말한 것은 묵상회(수양회, 법회)에 참석한 제자들이 아직 수양(修養)이 부족해서 영적으로 모자람이 있다는 뜻이지요.

이에 예수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한 것은 성령의 입장에서 하신 말씀으로 성령이 아직 드러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상관없음)

어머니더러 여인이여(Woman)라고 한다면 호래자식 소리를 들어 마땅하지만 성령(하나님)이 육신(어머니의 육신)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 겁니다.

육신과 더불어 무엇인가를 할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육과영이 별개임을 비유함)(what have I to do with thee?)

내 때가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mine hour is not yet come) 성령이 드러날 때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말씀에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2:5)

His mother saith unto the servants, Whatsoever he saith unto you, do it.

 

보시다시피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하인들더러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하인은 예수님 제자들을 가리키는 비유의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여러 복음서를 통해 확인했듯이 예수님의 부모는 영적레벨이 높은 이들이었습니다.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속담이 있듯이 영적인 사람에게는 영적인 아들이 태어나기 마련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후손들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삼아 드린 말씀으로 오해는 마시기 바라며 다음내용에 집중하겠습니다.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요2:6)

And there were set there six waterpots of stone, after the manner of the purifying of the Jews, containing two or three firkins apiece.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요2:7)

Jesus saith unto them, Fill the waterpots with water. And they filled them up to the brim.

 

유대인의 결례란 하나님백성이 깨끗해지는 과정을 뜻하며 두세 통 드는 항아리는 사람의 몸을 가리킵니다.

영과 육으로(둘) 이루어진 사람이 삼위일체(셋) 하나님을 깨닫는 과정이라는 뜻이지요.

성부(하나님)가 성자(스승, 깨달은 자, 인자)를 통해 성령을 깨닫게 만드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며 돌 항아리 여섯은 제자들 몸을 비유한 겁니다.(six waterpots of stone)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물 항아리(waterpots)가 사람 몸을 비유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바 있습니다.(누가복음31편 참조)

그저 물 항아리라 하지 않고 돌로 만든 항아리라 한 것은 아직 성령(물, 생명)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성령)로 항아리(몸)를 채우라 했던 겁니다.(Fill the waterpots with water)

성령이 충만케 한다는 뜻으로 아구까지 채웠다고 했지요.(And they filled them up to the brim)

이렇게 성령이 충만한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인해보겠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요2:8)

And he saith unto them, Draw out now, and bear unto the governor of the feast. And they bare it.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요2:9)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요2:10)

And saith unto him, Every man at the beginning doth set forth good wine; and when men have well drunk, then that which is worse: but thou hast kept the good wine until now.

 

8절에 연회장은(the governor of the feast) 하나님을 뜻하며 떠서가 아니라 끄집어내서이고(Draw out) 갖다주라가 아니라 드러내라 입니다.(bear)

성령을 드러내어 하나님께 확인 받으라는 말이지요.

이런 까닭에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았다 했던 것이며 어디서 났는지 모른다는 말은 하나님과 하나 되었음을 뜻합니다.(9절)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을 때는 인식할 수 있어도 하나가 되고나면 더 이상 인식할 방법이 없기에 이렇게 기록한 겁니다.

하지만 제자(하인)들은 아직 육신이 있어 인식할 수 있으므로 물 떠온 하인들이 안다고 한 거지요.

일반적으로 혼인잔치의 연회장은 신랑의 아버지이겠지만 보시다시피 신랑과는 남처럼 묘사되어있다는 사실을 볼 때 연회장은 하나님을 비유한 겁니다.

10절은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봐야합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낸다는 대목은 모든 사람이 (영적여행을)시작할 때는 성령이 완전하다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Every man at the beginning doth set forth good wine)

그리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낸다는 것은 세상살이에 빠져 살다보면 영혼이 오염된다는 뜻이며(when men have well drunk, then that which is worse)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는 말은 성령을 완전히 드러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는 것은 깊숙한 내면에 잠들어 있는 영혼이 깨어나게 되면 성령과 하나 된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물도 생명이고 포도주도 피를 비유한 것이니 다 같은 생명이라 할 수 있지만 깨어나지 못한 영혼은 물에 비유되었고 거듭난(깨어난) 영혼은 포도주에 비유된 거지요.

또한 이 내용은 스승(예수)이 제자(물 항아리)들에게 새 생명(포도주) 즉, 성령을 깨닫게(하나 되게, 드러나게) 해주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 포도주의 기적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으리라 여기며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요2:12)

After this he went down to Capernaum, he, and his mother, and his brethren, and his disciples: and they continued there not many days.

 

여기에서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내용을 지금껏 믿어왔던 대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으로 아는 것이 좋은지 나 홀로목사가 해석해준 성령을 드러내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좋은지요?

아마도 물질적인가치관을 벗지 못한 이들은 포도주의 기적을 좋아할 것이고 영적인일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라면 나 홀로 목사의 해석을 믿을 겁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영적인 해석을 따라야할 것인바 11절의 표적과 영광은 확실히 성령의 드러냄을 뜻합니다.

12절에 그 후(After this)는 성령을 드러내는 과정을 격은 후라는 의미로 묵상을 통해 성령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가버나움의 뜻은 “나훔의 마을” 이고 나훔은 “위로, 동정”이라는 뜻으로 어머니와 형제 및 제자들이 성령(하나님)을 드러내(만나) 위로 받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여러 날 계시지 않았다고 했던 겁니다.

아무리 성령을 깨달았다고(드러냈다고) 해도 육신을 가진 이상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 풀어서 해석해주면 소라도 깨달았으리라 생각되는바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요2:13)

And the Jews' passover was at hand, and Jesus went up to Jerusalem.

 

유대인의 유월절이란 모세시절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이 피해간 것을 기념하는 행사이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음을 우리는 미리 보았습니다.(누가31편, 마태36편, 참조)

따라서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유월절과 성전의 진정한 뜻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을 예고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가신 예수께서 어떤 가르침을 펼치실지 확인해보겠습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요2:14)

And found in the temple those that sold oxen and sheep and doves, and the changers of money sitting: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요2:15)

And when he had made a scourge of small cords, he drove them all out of the temple, and the sheep, and the oxen; and poured out the changers' money, and overthrew the tables;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2:16)

And said unto them that sold doves, Take these things hence; make not my Father's house an house of merchandise.

 

예문을 보면 예수님은 영적인일을 통해 돈 버는 행위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의 내용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했던 겁니다.

대속 제물로 쓰이는 짐승들을 쫒으셨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물은 짐승이 아니라 스스로의 육신이라는 것을 가르치려 했던 거지요.

또한 모든 것을 물질적인 시각으로 판단하는 성숙되지 못한 인식을 고쳐주려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일은 정말 있었다기보다 어디까지나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그 옛날이라 해도 성전 안에서(in the temple)짐승을 팔거나 돈을 바꾸는 행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당 입구라면 모를까 교회당 안에서도 못할 일을 성전 안에서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지요.

무엇보다도 정말 이렇게 행동했더라면 장사꾼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겁니다.

따라서 요한이 이렇게 기록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았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2:17)

And his disciples remembered that it was written, The zeal of thine house hath eaten me up.

 

이 말씀은 시편69장9절을 인용한 것이니 잠시 보고난 후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시69:7)

Because for thy sake I have borne reproach; shame hath covered my face.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시69:8)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시69:9)

For the zeal of thine house hath eaten me up; and the reproaches of them that reproached thee are fallen upon me.

 

성경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편은 다윗이 써놓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이 내용역시 하나님에게 다윗이 넋두리하듯이 써놓은 거지요.

주를 위하여(thy sake) 비난을 견디다보니(I have borne reproach) 수치심이 얼굴을 덮었다고 했습니다.(7절)

8절에 내형제는 영적인 길을 걸어가는 동료를 가리키며 모친의 자녀는 육적인 관계를 가리킵니다.

영적으로나(성숙하지 못한 인식) 육적으로나(물질적 시각에 얽매인 인식) 모두에게 이방인 취급받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9절 말씀은 성전을 향한 열성이 지나치게 많다보니 주를 향한 비난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겁니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나를 삼켰다는 말은(For the zeal of thine house hath eaten me up) 하나님과 하나 되었음을 뜻하며 주를 비난하는 비난이 나를 덮쳤다는 대목(the reproaches of them that reproached thee are fallen upon me) 역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비유한 말로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구약을 해석하고 보니 요한복음17절 내용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꼬집는 동시에 제자들로 하여금 물질적인 인식너머 영의 세계를 가르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속의 다윗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을 선택했음을 상기시키려 함과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 되었음을 말했던 거지요.(내 아버지의 집)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2:18)

 

당신말대로 물질보다 영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려면 뭔가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지요.

여기에 대한 예수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요2:20)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21)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22)

 

예수께서는 성전을 허물면 삼일 만에 일으킨다 하셨고 유대인들은 성전이 사십육 년 동안 지어졌는데 어떻게 삼일 만에 일으키느냐 되묻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건데 예수님과 사람들의 인식차이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성전)이 허물어져야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이 되살아난다는 것을 말씀하신반면에 사람들은 돌로 지은 성전으로 받아들인 탓에 그렇게 말한 겁니다.(19~20절)

성령(하나님)을 담고 있는 성전이 육신인데 물질적 인식하에서는 성령이 깨어나지 못함으로 육적인 인식의 벽이 허물어져야 영의 부활이 이루어진다는 뜻이지요.

21절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기록한 내용으로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 했습니다만 사실은 사람의 육신은 모두가 성전입니다.

다만 자신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예수님처럼 먼저 알게 된 이가 나서서 말해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어서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고 했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믿었다고 했습니다.(22절)

그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믿는 것이 힘들다는 뜻입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요2:23)

Now when he was in Jerusalem at the passover, in the feast day, many believed in his name, when they saw the miracles which he did.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2:24)

But Jesus did not commit himself unto them, because he knew all men,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2:25)

And needed not that any should testify of man: for he knew what was in man.

 

예루살렘은 성전을 비유한 말이니 예수께서 성전에 계셨다는 말은 성령을 드러낸 분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깨달음을 얻은 분인데 사람들은 기적을 봐야 이런 사실을 믿는다는 거지요.(23절)(many believed in his name, when they saw the miracles which he did)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는데 (But Jesus did not commit himself unto them)그 이유는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라 합니다.(24절)(because he knew all men)

또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for he knew what was in man) 누구의 증거도 필요하지 않다 했지요.

이 말씀인즉 예수님은 성령과 하나 되신 분이기에 사람들안에 들어앉은 성령과 통한다는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성령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아시기 때문에 따로 자신을 입증해줄 사람이 필요 없다는 거지요.

포도주의 기적에서 보았듯이 깨닫지 못한 사람의 성령은 물로 비유되고 거듭난 후의 성령이 포도주로 비유된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2장의 핵심인겁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성령을 간직하고 있는지요.

아직도 물에 불과한 성령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영적스승을 만나 포도주로 거듭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부디 여러분이 나 홀로목사와 함께하는 동안 영적부활을 이루시길 바라며 2장의 막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