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4.
지난시간은 정말 기적과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지금껏 알고 있던 포도주의 기적이 단순하게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는 구원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이것은 그야말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며 전 재산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일입니다.
포도주는 가게에 가서 돈을 주고 살 수 있지만 영혼은 아무리 많은 돈과 귀한 보석을 준다 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인생에서 로또를 열 번 맞는 것보다 더 귀한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겁니다.
다만 여러분이 이런 사실을 얼마나 믿느냐의 문제이지요.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하셨으니 여러분의 영혼이 거듭나는 영광은 여러분의 믿음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도 믿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겨자씨만큼의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인가 하겠지요.
하지만 여러분에게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성령께서는 이 말이 참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허락하실 것이며 거짓말같이 여러분은 성령과 하나 됨을 깨닫게 됩니다.
나 홀로목사와 함께하는 동안 여러분께 이러한 영광이 주어지길 기원하며 3장의 문을 열겠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요3:1)
There was a man of the Pharisees, named Nicodemus, a ruler of the Jews: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
유대인의 관원이 찾아와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바리새의 뜻은 “분리된 자” 이고 니고데모의 뜻은“백성의 정복자”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리(a ruler of the Jews)라고 해석했지만 직역을 해보면 유대인의 통치자이지요.
이렇게 보면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일반인들과 구분된 하나님을 믿는 이들(유대인) 가운데서도 지도자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절에서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뜻을 알아차렸다고 한 겁니다.
그만큼 영적 등급이 특출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사람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7)
예수께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3절)
그러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냐고 되물었는데 엄마뱃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4절)
이와 같은 니고데모의 질문에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말씀하셨습니다.(5절)
앞서 2장에서 포두주의 기적을 통해 보았듯이 사람들마다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을 물에 비유했지요.
그처럼 우리몸 안에 생명이 들어있음을 깨닫게 될 때 성령이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한 겁니다.
육신과 영이 별개라는 것을 아는 것이 곧 거듭나는 것이니 그렇게 신기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말씀하셨습니다.(7절)
그런 다음 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지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3:9)
바람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다는 것을 소리를 들어 알 수 있는 것 같이 성령도 그러하다는 뜻입니다.(8절)
사람의 몸 안에 생명(물, 성령)이 담겨있지 않으면 살수 없다는 것은 알아도 정작 성령이 자신 안에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이 같은 예수님말씀에 니고데모는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3:10)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요3:11)
하나님을 믿는 백성(유대인, 이스라엘)들의 스승정도면 영에 대한 일은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지요.(10절)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은지라 11절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 한다는 말은 성령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 같은 사실을 모두 안다는 뜻이며 사람들이 성령을 못 깨닫는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영의 일을 믿는다는 것은 힘들고 어렵다는 말이며 믿음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2)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And no man hath ascended up to heaven, but he that came down from heaven, even the Son of man which is in heaven.
12절은 바람에 비유해서 말해준 것도 믿지 않는데 영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질타의 말씀입니다.
13절은 아주 중요한 내용으로 성령의 실체에 대해 언급하신 겁니다.
또한 이 내용은 예수와 같은 큰 스승이 태어나는 과정 및 성령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상에 머무는 높은 영적존재가 특정한 아이의 몸으로 들어와 어느 시기가 되었을 때 성령이 드러나는 것을 묘사한 거지요.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모세의 뜻은“건져내다, 들어 올리다”이며 광야에서 뱀을 들었다는 말은 세상을 통해 지혜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성령을 깨달았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한 것인데 예수님(인자)역시 이렇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지요.(14절)
이렇게 영적스승이 성령을 드러낸 것은 그를 믿음으로 인해 소멸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좀 더 면밀하게 15절을 분석해봐야 합니다.
그를 믿는다는 부분에 해당하는 believeth in him은 단순하게 그를 믿는다가 아니라 그가 존재함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인즉 예수의 몸이 아니라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존재함을 믿어야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사람마다 성령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이며 자신 안에 성령이 되살아 날수가 있는 거지요.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여기에 대한 보충설명이 이어지고 있으니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He that believeth on him is not condemned: but he that believeth not is condemned already, because he hath not believed in the name of the only begotten Son of God.
16절을 액면그대로 믿게 되면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했다면 예수만 보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자신의 독생자를 보낼 경우 동양 쪽이나 그 밖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멸망하지요.
그래서 저(예수)를 믿는 자 마다가 아니라 그(성령)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합니다.
이런 이유로 17절에서 아들(예수)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인자)를 통해 세상이 구원받게 하심이라 했던 겁니다.
18절은 성령이 존재함을 믿는 자는 심판받지 않을 것이며 믿지 않으면(깨어나지 않으면) 형상화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같아서 심판받은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the name of the only begotten Son of God)
형상이 없는 하나님이 유일하게 이름 지어질 수 있는 것이 성령이 드러난 영적스승이기에 이렇게 기록한 겁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예수께서 성령(구원, 거듭남)에 대해 말해주는데 믿지 않는다면 성령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이미 이자체로 심판을 받은 것과 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영적스승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며 먼저 성령을 드러낸 이가 아니면 우리가 영의 세계에 대해 알 방법이 없다는 말이지요.
여기에 대해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20)
For every one that doeth evil hateth the light, neither cometh to the light, lest his deeds should be reproved.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1)
Bu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that his deeds may be made manifest, that they are wrought in God.
예수님과 같은 영적스승(빛, 성령)이 세상에 내려왔지만 사람들의 업장(악행)으로 인해 눈(영안)이 가려져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자체로 이미 심판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지요.(19절)
악행을 일삼는 이들은 빛을 싫어해서 가까이 못 올뿐 아니라 자신의 행위가 낱낱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빛 아래로 나오지 못합니다.(20절)
그러나 진리를 쫒는 자는 오히려 빛을 향해 나온다고 했습니다.(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으로 인해서라는 사실을 확인하려 한다는 거지요.(his deeds may be made manifest, that they are wrought in God)(21절)
죄 많은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빛에 나서지 못할 뿐 아니라 빛을 피하기 마련이며 성령을 보거나 드러낸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이 작용해서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어있습니다.
요한은 오늘날 영적인 길을 걷노라 자부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점검하고 성령에 대해 제대로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기록한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성령에 대해 확실한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의 다음 행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요3:22)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요3:23)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요3:24)
22절은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펼치신 후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세례를 주셨다고 했고 23절에는 세례요한도 살렘근처 에논에서 물로 세례를 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두 구절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유대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고 물은 성령과 생명(깨닫기 전)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요한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거나 성령에 대한 인식을 가진 이들에게 세례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기본적인 인식이 없는 이들은 세례 받을 자격도, 받을 생각조차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러한 일들이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한대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 같으니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요3:25)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3:26)
And they came unto John, and said unto him, Rabbi, he that was with thee beyond Jordan, to whom thou barest witness, behold, the same baptizeth, and all men come to him.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3:27)
앞서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각자 세례 주는 일을 두고 요한의 제자와 유대인사이에 변론이 일어났다고 합니다.(25절)
누가 진정한 세례자인가 또는 누가 더 높은가를 따지는 일이 일어났던 거지요.
이러한 일을 요한에게 보고했던 것인데(26절)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똑같이 세례를 주는데 모두가 예수에게로 가더라는 내용입니다.(the same baptizeth, and all men come to him)
어찌 보면 제자들을 뺏기는 기분이 들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대해 요한은 하늘이 주신바가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 말의 진정한 뜻은 누군가를 만나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요한에게 오던지 예수에게 가던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깨어나야 한다는 말이지요.
또한 이 내용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내면의 성령이 깨어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세례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요3:28)
Ye yourselves bear me witness, that I said, I am not the Christ, but that I am sent before him.
요한이 말하길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했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앞서 요한복음2편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 요한의 말입니다.
그때 우리가 확인해본바 요한은 영적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요.
그 해답은 28절 뒷부분에 나옵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거나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하는 말의 진정한 뜻을 헤아리는 것은 본인들(요한의 제자)에게 달렸다고 합니다.
예를 든다면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하는 모든 사람이 성령을 깨닫거나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이거나 아니거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믿는 당사자의 능력과 믿음의 크기, 인연공덕의 깊이와 크기가 결정한다는 뜻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말하더라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의 뜻을 제대로 헤아린다면 요한의 진면목을 알아볼 것인즉 누구를 믿던지 상관없다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3:29)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신부는 제자들, 신랑은 예수님, 신랑친구는 요한자신을 비유했습니다.
제자들을 거두는 이는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의 친구인 요한이 더 크게 기뻐한다고 했지요.
이미 영적인 완성을 이룬 이는 성령으로 하나(친구)되어있기에 질투 따위는 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말입니다.(29절)
하지만 한 하늘에 태양이 두 개가 동시에 뜰 수는 없기에 예수는 흥할 것이고 자신은 쇠할 거라 했습니다(30절)
그런 후 덧붙여서 영적스승을 따르는 중요성을 말씀하셨지요.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요3:31)
He that cometh from above is above all: he that is of the earth is earthly, and speaketh of the earth: he that cometh from heaven is above all.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요3:32)
And what he hath seen and heard, that he testifieth; and no man receiveth his testimony.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요3:33)
He that hath received his testimony hath set to his seal that God is true.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신 분은 만물위에 계시고(cometh from above is above all) 육에 속한 이는 육에 대한 일을 말한다고 했으며(31절)(he that is of the earth is earthly, and speaketh of the earth)천국으로부터 오신분이 영의 세계에 대한 일을 말해주지만 믿는 이가 없다고 했습니다.(32절)
그만큼 영의 세계에 대해 믿는다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33절에 영적스승의 말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참되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 겁니다.(hath set to his seal that God is true)
그러면 또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는지 성경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3:34)
For he whom God hath sent speaketh the words of God: for God giveth not the Spirit by measure unto him.
하나님이 보내신 이가 하나님 말씀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이유가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라 했는데 이는 번역의 오류라 할 수 있습니다.
직역해보면 하나님은 잴 수 있는 영을 준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God giveth not the Spirit by measure unto him)
다시 말해 잴 수 없는 영을 주셨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성령은 잴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성령은 무소부재하고 편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통해 역사하는 영체라는 뜻이기에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3:35)
The Father loveth the Son, and hath given all things into his hand.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verlasting life: and he that believeth not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abideth on him.
하나님의 품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아들이라 그 손에 모든 것을 주셨다 했습니다.(35절)
삼라만상을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그 아들이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그런 만큼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고(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verlasting life) 그를 믿지 않으면 생명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he that believeth not the Son shall not see life) 하나님의 진노가 깃들 것이라 했습니다.(the wrath of God abideth on him)
이 말씀은 저주의 말씀이 아니라 영생에 대한 일을 영적스승이 말해주는데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곧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인데 이를 믿지 않으면 결국 영생을 얻지 못하는 거지요.
깊은 잠에 빠져있는 성령을 깨우는 힘은 자신의 믿음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믿음을 유발하는 매개체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가 바로 예수나 요한과 같은 영적스승들입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거부한다는 말은 결국 성령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깃든다는 표현을 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3장을 모두 마쳤는데 여러분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나 홀로목사와 함께하는 성경강해시간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 홀로목사로서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말씀을 성령의 역사함을 힘입어 여러분께 드리고 있습니다만 여러분은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궁금합니다.
진정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면 여러분은 얻을 것이고 가볍게 여긴다면 가볍게 여긴 만큼 가벼운 것이 주어질 겁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점을 세례요한이 말하고자 한 거지요.
이제 여러분의 오해가 풀렸으리라 믿고 이쯤에서 3장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