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6.
안녕하십니까.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 시간에 참석하신여러분 환영합니다.
시간관계상 인사말은 생략하고 지난시간에 이어 4장의 마지막을 시작하겠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요4;28)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4;29)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30)
Then they went out of the city, and came unto him.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갔다고 말한 것은 영을 깨닫고 난후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28절)
예수님을 만나 생명수를 얻었으니 성령을 깨달은 것이고 성령이 임한사람의 임무인 복음전파에 나선거지요.
29절에 여인의 행한 모든 일을 말했다는 것은 여인에게 다섯 명의 남편에 관한 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에는 담긴 뜻이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잠시 언급이 있었듯이 영의 세계가 성별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에 대해 설명하신거지요.
다시 말해 예수님이 영의 세계를 정확하게 설명하셨기에 그가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말한 겁니다.
그리고 30절은 여인의 이러한 설명에 사람들이 세상에서(동네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예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또 어떤 가르침을 주셨을지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요4;31)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4;32)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 대(요4;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제자들이 예수님께 식사하실 것을 권하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자신이 먹을 양식이라고 하셨는데(31~34절)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4;35)
Say not ye, There are yet four months, and then cometh harvest? behold, I say unto you, Lift up your eyes, and look on the fields; for they are white already to harvest.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4;36)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4;37)
넉 달이 안 되었는데(There are yet four months)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and then cometh harvest?) 말하지는 않는다고(Say not ye) 합니다.
이 말인즉 때가 되어야 추수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눈을 들어 밭을 보고 희어져(깨끗해져, 순수해져) 추수할 때가 된 것을 확인하라고 했습니다.(35절)
36절의 거두는 자는 하나님을 가리키며 뿌리는 자는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한다는 것은 둘이 아니라는 말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7절에서 한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말이 옳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은 삯을 받았다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죄 많은 이들의 영혼은 사망에 이른다는 말이며 영생에 이를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같은 분을 보낸다는 뜻이지요.
여기에서 여러분께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2천년에 오셔서 하나님의 일(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일)을 하셨는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누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요.
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2천 년간 이런 일을 하신분이 한분도 없었을까요.
나 홀로목사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아직도 예수님이 오셔야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야한다는 것은 육신의 예수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빛이고 영이신 성령을 뜻하는 겁니다.
자신내면에서 빛을 본 이들이 바로 성령을 깨달은 분이자 예수님이 자신 안에서 부활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이 같은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시길 바라며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요4;38)
I sent you to reap that whereon ye bestowed no labour: other men laboured, and ye are entered into their labours.
예수님이 제자들을 복음전파를 위해 보냈는데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두러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제자들은 그저 끼어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했지요.(ye are entered into their labours)
이 말씀은 37절과 연계된 내용으로 누군가 심어놓았기 때문에 누군가는 거둔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 믿음의 씨앗을 뿌렸으며 때가 이르러 열매를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기에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이 받아들여진다는 거지요.
또한 이 말씀은 제자들의 복음을 듣는 일부사람들이 그 당장 열매를 맺지는 못할지라도 믿음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훗날 누군가의 말씀을 듣고 영생을 얻게 될 거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요한이 높다느니 예수가 높다느니 하는 말은 무의미한 겁니다.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라 여기며 다음 장면을 보겠습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요4;39)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요4;40)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요4;41)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요4;42)
앞서 말씀드린 데로 예수께서 여인의 행한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성령의 실체를 가리킵니다.
성령에 대해 예수님이 정확하게 가르쳐주신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자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었으며(39절) 사마리아인들이(영적으로 갈망하는 이들) 예수께 와서 함께 유하시기를 간청했고 이틀을 유하신 끝에(40절)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졌던 거지요.(41절)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은 이에게 전해 듣는 것과 성령이 드러난 분의 가르침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42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여인의 말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찾아왔지만 직접 만나서 들어보니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요 세상을 구할 메시아라는 사실을 완전히 깨달았다는 말이지요.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요4;43)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요4;44)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요4;45)
43절은 영적인 축복의 장소에서 세상으로(갈릴리) 돌아간 것을 뜻하며 44절은 성령을(선지자) 육신(고향)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말해놓은 겁니다.
그리고 45절에 갈릴리인 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은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영적인 성과(예루살렘)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성령)을 영접하려면 물질적인 인식을 벗어나 영적인면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해 놓은 거지요.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요4;46)
So Jesus came again into Cana of Galilee, where he made the water wine. And there was a certain nobleman, whose son was sick at Capernaum.
가나의 뜻은 “갈대”이고 갈릴리는 “원, 순회, 지역”이며 지난번 물로 포도주를 만든 곳이라고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포도주에 해당하는 영어를 보면 the water wine이라 기록되어 있다는 겁니다.
직역하면 물 포도주가 되겠지요.
요한이 이렇게 기록해놓은 것은 이어지는 내용이 세상 사람들의 흔들리는(약한) 믿음에 대한 가르침이며 지난번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과 같이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46절)
그렇다면 이어지는 내용은 액면대로 볼 것이 아니라 담겨진 뜻을 봐야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요4;47)
When he heard that Jesus was come out of Judaea into Galilee, he went unto him, and besought him that he would come down, and heal his son: for he was at the point of death.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
47절에 왕의 신하라고 해석한 a certain nobleman 은 직역하면 어떤 귀한사람인데 요한이 이렇게 묘사한 것은 이 사람이 영적으로 등급이 높았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유대(영의세계)에서 갈릴리(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내려오셔서(come down) 아들을 고쳐 달라 간청했던 겁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영적인 눈이 어느 정도 뜨였다는 거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표적과 기적을 보지 않으면 영의 세계를 믿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는데(48절) 그만큼 영안으로 세상을 본다는(인식한다는)것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음내용은 영적인 시각으로 봐야합니다.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요4;49)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요4;50)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요4;51)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요4;52)
49절에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달라는 말은 영적인 죽음을 뜻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신 예수님(성령)이 내려오셔야(임해야) 살 수 있다 믿었던 것이며 그 믿음에 따라 아들이 살았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50절)
51절과 52절은 설정된 내용으로 영이 되살아난 과정과 방법을 말하는 겁니다.
7(칠시)이라는 숫자가 일시적으로 완전함을 나타내는 동시에 사람(4)과 하나님(3)의 연합을 나타낸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우리 육신 안에서 영이 되살아남을 뜻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요한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요4;53)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요4;54)
This is again the second miracle that Jesus did, when he was come out of Judaea into Galilee.
성령을 드러낸 예수의 말씀이 힘이 있다는 말이자 믿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53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은 이 내용이 두 번째 기적이라고 했는데(This is again the second miracle) 첫 번째 포도주의 기적과 같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밝혀놓은 겁니다.
이렇게 해서 4장을 모두 마쳤는데 여러분은 이 내용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만약 아직도 기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신다면 이 내용과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기록한 마태복음(8:5~13)과 누가복음(7:1~10)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홀로목사는 이 내용을 마태복음 12편과 누가복음10편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우리가 액면으로는 볼 수 없는 엄청난 영적가르침이 담겨있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점을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만 있을 뿐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지요.
사실 나 홀로목사는 요즘도 교회를 나가고 있습니다만 안타까운 마음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과 하나님의 연합을 가르치고 있는데 항상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모두가 육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성령의 실체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합니다.
자칭 구원을 받았다는 목사님은 50년이 넘게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주면서 정작 자신은 육신적인 구원을 못 받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 나 홀로목사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공중 재림의 뜻은 예수가 육신으로 공중에서 내려온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영의 실체를 뜻하는 거지요.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영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영이 되살아나는 겁니다.
우리 안에 내재한 성령이 세세생생 쌓아놓은 업장으로 인해 가려져 있다가 영적인 눈을 뜨기 시작함과 동시에 되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영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영이 맑아졌다는 말이며 때가 되었다는 거지요.
본문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예수께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4;35)” 하신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 내용은 사람들이 영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내용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믿음의 형태를 확인하게 됩니다.
살아감에 있어 기적과 같은 순간을 보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가 조금만 자신에게 손해 보는 일이 생기면 샐쭉해져 믿음이 약해져버리곤 하지요.
과거 나 홀로목사가 환자를 위해 기도하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믿음이 약해지고 불신이 마음이 들자 병이 재발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나 홀로목사는 성령의 도구로서 기도하는 입에 불구하며 치유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환자 자신 안에 들어앉은 성령이며 자신의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믿음이 내재한 성령을 일깨운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정말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면들은 그저 살아가기 위해 취해야할 수단으로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목적을 영으로 삼아야지 물질에 두어서는 성령을 일깨울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합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고 믿음생활을 해나온 나 홀로목사의 지인한분은 양심의 소리는 눈 한번 질끈 감으면 그만이지만 법을 어기면 콩밥을 먹게 된다고 걱정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정말 잘못된 인식이며 이래서는 성령을 되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매사 양심을 따를 수는 없겠지만 내면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를 매번 무시해버리면 더 이상 양심이 작동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한다는 거지요.
우리가 정말 성령이 되살아나길 바란다면 성령을 깨닫게 만들어줄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양심이 작동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성령이 내안에 있음을 알았는데 누구를 만나 무엇을 얻을 것이냐는 말입니다.
부디 여러분이 이점을 깨닫길 바라며 4장을 마칩니다.
천국이 하늘에 있다하면
새가 먼저 닿을 것이요.
바다에 있다하면
물고기가 먼저 닿을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들어도
뜻을 모르는 이들이 많도다.
예수가 천국을 줄 수 있었다면
이세상은 벌써 천국이 되었겠지만
여전히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고 있도다.
보라!
천국은 너희 안에 있노니
가지도 말고 오지도 말며
너희 안에서 찾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