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요한복음8.

배가번드 2022. 4. 12.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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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요즘은 비가 쉼 없이 내리고 있습니다.

씻어낼 일이 얼마나 많기에 하늘은 이처럼 많은 비를 내리나 싶을 정도로 엄청 퍼붓고 있지요.

비가 내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정도이상이면 재앙을 몰고 온다는 것은 진리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재앙이라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재앙은 업장을 갚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성경을 공부하는 많은 이들이 나 홀로목사의 이 같은 말에 동조하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성경을 공부해보면 이러한 일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이 내용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지요.

현실에서 마주치는 기막힌 일들을 그저 재앙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늘이 주시는 위로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순전히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로서 성령이 자신 안에서 되살아났다면 매순간을 축복과 위로로 삼을 것이며 성령이 죽어있다면 재앙 속에서 살아갈 겁니다.

스스로가 조용히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면 성령이 잠들어있는지 깨어나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이 자신 안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확신이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어떠한 순간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을 알기마련입니다.

반대로 성령이 잠들어(죽어)있다면 이러한 확신은 없으며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에 힘들어 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성령이 살아난 자와 잠들어 있는 자의 차이라 할 수 있으며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이 나 홀로목사의 강해를 듣고 얻어야할 영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하는 동안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내리실 것을 기원하며 강해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Then answered Jesus and said unto them, Verily, verily, I say unto you, The Son can do nothing of himself, but what he seeth the Father do: for what things soever he doeth, these also doeth the Son likewise.

 

19절은 영적체험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번역을 이렇게 해놓은 것인데 한마디로 표현해서 잘못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직역을 해보면 아들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The Son can do nothing of himself)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볼 수는 있다고 했습니다.(but what he seeth the Father do)

이 말인즉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깨닫고 나면 자신(육신)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신(육신)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아버지가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마찬가지로 행한다고 한 겁니다.(what things soever he doeth, these also doeth the Son likewise.)

이어지는 내용도 마찬가지의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5:20)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준다 하셨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을 깨달은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통해 일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고 기이하게 여기게 될 거라고 하셨지요.

그러면 더 큰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

For as the Father raiseth up the dead, and quickeneth them; even so the Son quickeneth whom he will.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

For the Father judgeth no man, but hath committed all judgment unto the Son:

 

아버지께서 죽음에서 일으킨다고 했으며 아들 또한 자신이 원하는 이들을 살린다 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이하고 놀랄 일이지요.

그런데 왜 살린다는 단어를 save나 revive를 쓰지 않고 활발하다, 빨라지다는 뜻의quicken을 썼을까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혼은 시공간의 영역이 무너진 상태에 놓여있으므로 육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진동이 빠른 존재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quicken이라는 단어를 쓴 겁니다.

따라서 21절에 살린다는 것은 육신으로 죽은 이를 살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으로 죽음(잠들어있는 영혼)에 이른 이들을 되살린다는 뜻이 됩니다.

성령을 깨달은이에게는 성령을 살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권한이 주어지는데 심판의 권한까지 주어진다했습니다.(22절)(hath committed all judgment unto the Son)

이 말씀은 세상의 법관처럼 심판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악의 구분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놓인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영체로서 물질과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지요.

바로 이러한 상태에 이른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성령을 깨달은 사람이 육신으로 살아감에 있어 세상법도에 저촉을 받겠지만 영적으로는 하등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태를 불가에서는 불퇴보살의 경지에 올랐다 말합니다.

세상 법으로 사형을 당한다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손톱만큼의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러면 왜 하나님은 누구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을까요.(the Father judgeth no man)

그것은 하나님은 선악을 모두 관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선도 악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천사도 악마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하나님이 악마를 벌한다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이 악인을 벌하실 때는 악을 이용한다하신 겁니다.

상세한 설명은 지금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성령을 깨달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정도로만 말하고 다음내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5:23)

That all men should honour the Son, even as they honour the Father. He that honoureth not the Son honoureth not the Father which hath sent him.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Verily, verily, I say unto you, He that heareth my word, and believeth on him that sent me, hath everlasting life, and shall not come into condemnation; but is passed from death unto life.

 

아들에게 성령을 살리는 권한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심이라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전체를 대변하고 관장하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누군가를(영적인 존재포함) 심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니 직접 모습을 나타낼 수는 없으며 반드시 인간의 육신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무턱대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행위이며 성령(하나님)을 드러낸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기록한 겁니다.(23절)

바로 이런 이유로 24절에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자신을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heareth my word, and believeth on him that sent me)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 했지요.

하나님을 믿는 이는 무수히 많지만 성령을 깨달은 이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어야한다는 뜻이며 이렇게 되어야 영적사망으로부터 벗어나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passed from death unto life)

어떻습니까.

이제 성령에 대한 믿음이 생기셨습니까.

아직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다음구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Verily, verily, I say unto you, The hour is coming, and now is, when the dead sha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ey that hear shall live.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For as the Father hath life in himself; so hath he given to the Son to have life in himself;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5:27)

And hath given him authority to execute judgment also, because he is the Son of man.

 

이 말씀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면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 걸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의 육신 부활을 꿈꾸고 있는 겁니다.

실지로 어떤 교회에서는 죽은 사람 모두가 예수가 공중 재림 하는 날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말씀을 듣고 난 후 함께 들어 올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음(무덤)에 이른 이들이 예수처럼 성령이 드러난 영적스승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을 뜻합니다.(25절)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The hour is coming, and now is) 한 것은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설법하신 그때를 가리키는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을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6절에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었다고 한 겁니다.

전체인 하나님에게 영생이 속해 있다고 했으며 하나님께서 아들(예수)에게도 영생을 주어 육신 속에 있게 하셨다고 했는데(he given to the Son to have life in himself) 이 말인즉 살아생전(육신을 가진 채로) 영생을 얻었다는 뜻이지요.

또 27절에 인자(the Son of man)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한 것은 정확히 말해 하나님이 예수께 심판하는 권세를 주신 이유가 그가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달리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현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을 깨달은 예수와 같은 분을 통해서라는 거지요.

그리고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은 성령을 깨닫게 만드는 권한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와 같은 분을 통해 성령을 깨닫게(되살아나게) 되면 행위자의 내면에서 각 개인을 심판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심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지요.

이해가 되었기를 바라며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5:28)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And shall come forth; they that have done good, unto the resurrection of life; and they that have done evil, unto the resurrection of damnation.(KJV)

and come out -- those who have done good will rise to live, and those who have done evil will rise to be condemned.(NIV)

 

이런 일은 신기한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령을 깨닫고 나면 자신 안에서 성령이 선악에 대한 심판을 정확하게 함으로 신기하게 생각할일이 아니지요.

28절에 무덤에 있는 자는 죽어서 땅에 묻힌 자들이 아니라 내재한 성령이 죽어버렸다는 뜻에서 무덤으로 표현한 겁니다.

반대로 성령이 살아있다면 성전으로 표현했겠지요.

이런 이들 모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했는데 여기에서의 그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되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이를 가리킵니다.

비록 성령이 죽어(잠자고)있다하더라도 예수님 같은 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는 동안 누구에게나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만 어떤 이는 무심코 지나치고 어떤 이는 듣고 부활의 기회를 얻어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29절에 상세하게 말해놓았지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했는데 이 내용은 약간의 수정이 필요합니다.

심판의 부활보다는 지옥의 부활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damnation의 뜻이 심판보다는 지옥이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한글성경은 NIV를 번역했기 때문이지만 원본에 가까운 것은 KJV이지요.

한글성경이 이렇게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크리스천들의 교리가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고 하는 이분법적인 해석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활은 곧 영생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한 겁니다.

영적인 사망에서 영적부활이 일어나더라도 한동안은 각자의 죄업에 따라 씻김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한 거지요.

이것은 그야말로 중요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예수만 믿으면 그 즉시 천국에 이를 수 있다 말하거나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틀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같은 분을 만나 영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은 맞지만 각자의 업장을 씻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영생을 얻게 되기에 심판의 부활, 즉 지옥의 부활로 나온다고 기록한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통해서도 말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림은 육신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업장소멸을 통한 영적부활을 뜻한다고 봐야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영적으로 완성된 분이었지만 그 당시 제자들의 업장을 나누어 받았다고 봐야하며 오늘날의 많은 크리스천들의 업장 역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의 많은 목회자들도 공히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나 홀로목사의 교리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과의 연결고리가(제자가 됨) 형성된다는 것은 성령의 연결로 이어지기 때문에 영생과 심판(지옥)의 부활로 나온다는 것이 나 홀로목사의 교리이고 일반적인 교리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이분법적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교리가 달라지는 거지요.

성령은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옛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역시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과거의 예수님이지만 2천 년 전 예수님 몸 안에 거하고 있던 성령과 지금 우리 안에 내재한 성령은 하나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믿음의 길로 들어서면 성령과 교통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과 연결고리가 형성된다고 해서 곧바로 영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동안 씻김의 과정이 필요함으로 사는 동안 많은 고통과 괴로운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지옥으로 묘사되는 것으로서 자신의 업장을 씻어내는 과정입니다.

성령과 연결이 되는 순간부터 사람에 따라 사는 동안 지옥과 같은 경험을 할 수도 있고 평탄한 삶을 살다가 영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지루하고 길수도 있기에 영생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중간에서 포기하는 사람이 생기며 믿음의 길에서 내려서기도하는 겁니다.

그만큼 영생을 향한 여정은 멀고도 험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사후의 지옥은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당연히 지옥은 존재합니다.

살아생전 영의 세계를 모르거나 인연이 없다면 영혼자체가 소멸되는지라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됨으로 이곳을 영원한 지옥으로 묘사할 수가 있지요.

그렇지만 이런 사람과는 별도로 영의 세계와 인연은 있으나 믿지 않고 육신의 욕구에 맞춰 세상을 살았던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따른 벌을 받게 되는데 그러한 곳이 지옥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규정짓는 선과악의 판단기준에 따른 심판이 주어지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가 있을 수 있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내가 악하다고 정해놓은 악에 대한 규정의 범위에 나또한 포함된다는 것이 다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정확히 말하자면 심판하지 말라 이지요.

심판의 하늘에 오르지 않으려면 타인을 함부로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동안 성령과 인연을 맺지 못한다면 죽어서 심판의 하늘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가 예수=천국=영생이라는 등식을 가진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다고 해서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는 거지요.

믿음의 길에서 내려서지 않고 성령이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걷다보면 종내에는 성령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러한 믿음아래 걷는 사람에게는 죄에 따른 결과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연결이 되면 인과응보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면 그 즉시 벌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 죄를 짓기도 전에 내면에서 말리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되살아났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지었는데도 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미처 벌 받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하며 성령이 가려지거나 잠들어버린 겁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죄를 지었는데도 벌이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줄 알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 홀로목사가 사사로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역시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지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다된 것 같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좀 더 상세하게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고 오늘강해를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