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요한복음20.

배가번드 2022. 5. 10.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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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아직도 나 홀로목사와 함께하시는 여러분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검색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렇듯 참석하신 여러분은 그야말로 믿음이 대단하신 것이며 영생의 하늘을 보장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조금 특별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아마도 여기까지 함께 하신 여러분은 나 홀로목사가 누군가를 태우고 절벽 길을 걸었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마가복음8장)

비전에서 보았던 여성분은 사실 상징적인 인물로서 나 홀로목사가 태우고 가야할 불특정다수를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일은 영적인 해석을 해야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람 역시 자신이라 믿는다면 당연히 거기에 따른 일이 생기겠지만 믿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최근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 홀로목사와 친하게 지내는 분이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동생에게는 백만 원을 주고 자신에게는 120만원을 주었다고 했지요.

이 꿈에 대한 해석을 물어왔기에 동생이 수행인이 아닌지라 백만 원은 물질을 뜻한다 할 것이고 형은 수행을 하는 분이니 120에서 12를 떼어서 생각해야한다 말씀드렸습니다.

삼위일체(3)하나님과 인간(4)이 연합하였다(3×4=12) 했으니 깨달음을 얻는 꿈이라 했지요.

또한 0은 완전의 숫자이니 이 또한 깨달음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백에다가 20을 더했으니 물질보다 더한 것을 얻는다는 뜻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만약 두 분 다 일반인이라면 형이 동생보다 재산을 더 많이 상속받는 것으로 해석이 되겠지만 형이 영생을 목표로 하는 수행자인지라 이런 해석이 옳은 거지요.

이렇게나 저렇게나 결국에는 영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 맞습니다.

여러분 역시 나 홀로목사와 비슷한 해석을 했을 겁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성경말씀을 공부하는데 있어서도 어떤 해석을 해야 할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셨겠지요.

부디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들이 이점을 깨달아 영생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기를 바라며 요한복음 12장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요12:1)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요12:2)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3)

 

 

유월절 엿새 전(6은 부활의 숫자)이라는 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며 번민에 빠진(베다니) 나사로를 영적으로 되살렸다는 뜻입니다.(1절)

그런데 2절과 3절을 가만히 보니 뭔가 심오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를 위해 만찬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신 예수님(성령)을 위해 봉사와 헌신을 한다는 뜻이지요.

마르다가 일을 본다는 것은 봉사를 나타내며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는 나사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할 수 있으며 마리아는 예수님(성령)을 드높이는(찬양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영접하는 여러 유형을 말해놓은 것으로 봉사와 기도, 찬양(찬미) 중 어떠한 것이든 성령을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특히 마리아의 경우 비싼 향유로 발을 씻을 정도로 예수님(성령)을 귀하게 여겼지요.

또한 자신을 지극히 낮춰 예수님의 발을 가장 소중한(머리털)것으로 닦아드렸습니다.

겸손과 찬미와 헌신을 아끼지 않았기에 존귀에 처해진 겁니다.(마리아의 뜻: 가장 높으신 분, 존귀한분)

그러나 이런 제자들과는 별도의 인물도 있었지요.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요12:4)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요12:5)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This he said, not that he cared for the poor; but because he was a thief, and had the bag, and bare what was put therein.

 

 

4절에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을 자라 했으니 이 내용이 그 당시에 쓰인 것이 아니라 훗날 써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을 액면대로 읽을 것이 아니라 담겨진 뜻을 봐야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유다는 물질적 인식의 범주아래 놓인 사람임을 알 수 있지요.

예수님(성령)께 헌신하는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더욱 값지다고 말하고 있으니 영혼보다는 물질을 더욱 값어치 있게 여기고 있는 겁니다.

이렇기 때문에 유다가 진정으로 가난한 이를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안에 도둑놈심보를(he was a thief, and had the bag) 드러내놓았다고 기록했습니다.(bare what was put therein)

그 당시에 예수님이 교회를 설립하지도 않았고 돈을 받았다는 기록조차 없으므로 유다가 돈궤를 맡았다고 해석한 것은 옳다고 볼 수 없으며 오늘날 크리스천들의 시각으로 본거라 할 수 있지요.

만약 한글성경처럼 해석되어야한다면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두게 하라(요12:7)

Then said Jesus, Let her alone: against the day of my burying hath she kept this.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12:8)

 

 

7절에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 발을 닦는 것은 성령을 위해서니까 내버려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죽는 날을 위해(against the day of my burying) 마리아의 이런 행동을 유지하게 해주라고(hath she kept this) 한 것은 육신에 담겨있는 성령을 더욱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높이 샀던 겁니다.

그래서 8절에 가난한 자(육신을 가진 자)들은 항상 함께 있지만 예수님(성령)은 항상 있지 않다했습니다.

그만큼 마리아가 성령을 귀하게 여겼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성령이 드러나신 예수님의 다음 행적을 보겠습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요12:9)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요12:10)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2:11)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러오는 길에 부활한 나사로도 보려했다고 합니다.(9절)

나사로가 영적으로 부활했다는 소식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일 것을 상담했지요.(10.11절)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일일뿐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사이에는 밀약이 있었을 걸로 생각됩니다.

지난시간 약간의 단서를 발견했으니 잠시 묻어두고 다음내용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요12:12)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12:13)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요12:14)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12:15)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것은 성령이 성전에 임하신다는 뜻이지요.

즉 예수는 육신(성전)안에 성령이 드러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12절)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나가 호산나를 외치며 찬송했던 겁니다.

종려나무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유일하게 가지고 나온 식물로서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호산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더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 왕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14.15절에 어린나귀를 타셨다는 말은 스가랴서 9장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인지라 가던 길을 멈추고 구약을 보고난 후 돌아오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시온(요새)과 예루살렘 모두 성전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딸은 구도자입니다.

구도자에게 왕이 임했다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한다는 뜻이며 나귀 중에도 작은 나귀를 탄다는 것은 겸손하게 헌신하는 수행자를 뜻합니다.

바로 이러한 구약의 말씀대로 예수께서 임하셨다는 것을 요한이 기록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 제자들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요12:16)

 

 

처음에는 제자들도 구약에 담긴 뜻을 헤아리지 못했으나 예수께서 성령이 드러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난후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등장에 그렇게나 환호성을 높였을까요.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요12:17)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요12:18)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요12:19)

So the Pharisees said to one another, "See, this is getting us nowhere. Look how the whole world has gone after him!"(NIV)

The Pharisees therefore said among themselves, Perceive ye how ye prevail nothing? behold, the world is gone after him.(KJV)

 

 

나사로가 부활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올렸다고 합니다.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앞서 마리아와 함께 갔던 유대인들의 말을 들었다는 거지요.(17.18절)

17.18절 내용을 볼 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나사로의 영적부활을 육신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일이 그 당시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자신들이 하는 일이 쓸데없다하고 온 세상이 예수를 따른다 한 겁니다.

그런데 19절을(NIV) 가만히 보면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어디에서도 얻지 못한다 했지요.(this is getting us nowhere)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이자 구약을 철저히 믿는 사람들로서 성경에 근거한 계율을 철저히 지키며 하나님말씀을 따르는 이들이었는데도 부활을 시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 내용을 보건데 영적부활은 성령이 드러난 인자의 고유권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드러난 예수님의 다음 행적이 궁금해집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요12:20)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요12:21)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요12: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

 

 

축제에 참석한 헬라인 몇이 빌립과 안드레에게 예수님 뵙기를 청하였는데 예수께서는 갑자기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했습니다.(20~23절)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인즉 잠시 접어두고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5)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갑자기 예수께서 한 알의 밀에 비유하여 자신이 죽음에 이를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24절)

그리고 육적인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한다 했으며(25절) 예수(성령)를 섬기는 자(믿고 따르는)는 예수의 가는 곳에 함께 갈 것이고 하나님아버지가 귀하게 여기신다했지요.(26절)

이 말씀을 보건데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12:27)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12:28)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요1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요12:30)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12:31)

 

 

27절은 죽음을 앞둔 예수의 마음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육신(마음)과는 달리 성령은 자신이 죽음의 때를 선택하였음을 알고 있지요.(27절)

이 내용이야말로 정말 중요합니다.

성령이 드러나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지만 육적인 감정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과 똑같이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에는 영적인 선택을 한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영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영광에 영광을 더한다는 응답을 받은 겁니다.(28절)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늘로부터 천둥소리를 들었다고 했고 어떤 이는 천사가 말한 것으로 들었다 했는데 이는 천둥소리를 천사의 말로 들을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29절)

믿음을 가진 이들의 귀에는 천둥소리조차 하나님이나 천사들의 음성으로 들린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30절에서 자신과는 무관한일이고 믿는 이들에게 달린 문제라 했던 겁니다.

믿음에 따라 소리가 다르게 들린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제 곧 있을 자신의 죽음을 심판의 날이라 했으며 임금이 쫓겨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31절)

하지만 자신의 죽음이 결코 일반인들과 같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밝혔지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12:32)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12:33)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요12:34)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요12:36)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요12:37)

 

 

32절에 땅에서 들린다는 말은 예수께서 죽음에 이른다는 말이지요.

육신이 죽고 성령으로 되살아나기에 모든 사람을 이끌겠다고 한 겁니다.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과 하나 되었으니 만물 안에 깃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33절에서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암시했다 한 거지요.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영원의 세계에 있다 율법은 기록하고 있는데 어째서 예수님이 인자가 들린다고 하느냐 묻습니다.(34절)

이 말인즉 그리스도(성령)가 영생의 하늘에서 영원히 머물고 있는데 당신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영혼의 세계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며 육신이 성전이고 성전 안에 하나님이신 성령이 머물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러다보니 예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고 자신을 빛으로 비유하고 있지요.

자신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따르지 않으면 어둠에 붙잡힌다고 합니다.

빛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은 성령(진아, 진정한 영혼)을 모른다는 말이며 곧 어둠의 세력에 속해있으니 자신의 가는 바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35절)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령은 곧 빛이고 자신이 빛과 같은 성령이 드러난 인자이니 믿고 따르면 빛의 아들(제자)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령(그리스도)의 뜻을 말해주어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오해를 하는지라 몸을 숨겼던 거지요.(36.37절)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믿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요12:38)

 

 

38절 내용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내용이니 잠시 구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53:1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절)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절)

 

 

원래 1절만 인용한 것이지만 전체 내용을 보지 않고서는 해석이 되지 않는지라 부득이하게 5절까지 인용했습니다.

나 홀로목사와 함께 여기까지 오신 분들은 위 내용을 보는 즉시 성령을 깨달은 이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외형적인 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성령이 드러난 사람은 물질세상의 기준과는 동떨어진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집중해볼 것은 성령이 드러난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 어째서 일반인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이 내용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성령의 특성을 알아야합니다.

성령은 영체로서 자체만으로는 이 세상에 머물 수 없습니다.

반드시 육신 안에 담겨야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육신 안에 담겨있던 성령이 드러나게 되면 더 이상 육신은 육신이라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했지요.

빛을 가리기위해서는 뭔가 세상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이는 세상의 죄(업장)를 짊어진다는 표현을 하는 겁니다.

모세나 예수 같은 분들은 성령이 드러났기 때문에 세상에 머물기 위해서는 제자들(세상)의 죄를 짊어져야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경우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말을 하지요.

부처의 속가제자 중에 유마거사가 있었는데 그가 감기몸살로 앓아누웠을 때 석가모니가 제자를 시켜 병문안을 하라 시켰고 그때 당시 유마거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며 이 말을 들은 석가모니는 유마거사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일을 기록해놓은 것이며 성령을 깨닫는 의미는 세상의 업장을 짊어진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을 다른 각도로 보게 되면 성령이 드러나지 않는 이들은 자신이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지만 성령을 깨달은이의 제자가 됨으로 인해 일시에 죄가 소멸되는 겁니다.(육과영이 분리됨)

세세생생 쌓아놓은 죄(세상을 사는 동안 지은 죄)를 모두 갚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모르는 일이겠으나 성령이 드러난 이로부터 성령의 불씨를 나누어받음으로 인해 일시에 죄업이 녹아내리는 거지요.

좀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진아(眞我)가 깨어나게 되면 육과 영이 분리가 된 존재로 한 몸에 거하게 되는지라 육신을 버리는 날 영이 홀연히 떠납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이 드러난 이와 스승제자의 인연을 맺어 믿음으로 묶여진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만큼 성령이 드러난 이를 믿는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외형적인 모습에 집중을 해서는 믿기 어렵다는 뜻에서 이사야가 이렇게 기록해놓은 거지요.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았습니다.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요12:39)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요12:40)

 

 

이 내용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내용인지라 반드시 보고 넘어가야합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사6:9)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10)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 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되며(사6:11)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6:12)

 

 

위 내용은 선지자 이사야가 성전에 올라 여호와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난 후의 일을 기록한 겁니다.

8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해 주기위해 누군가를 파견하려 했었고 이에 이사야가 자신이 가겠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절과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더러 사람들이 헷갈리게 만들어서 구원을 받지 못하게 만들어라 명하고 있지요.

정말 이상합니다.

하나님이라면 당연히 누구나가 구원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인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이 11,12절에 나옵니다.

사람들을 언제까지 구원받지 못하게 만들어야하는가라는 이사야의 물음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읍들이 황폐하여 사람이 없고 토지가 전폐하게 되어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땅이 폐한 곳이 많아졌을 때까지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육적이고 물질적인 일들로부터 멀어져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를 가리킵니다.

성읍들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것들이 무너짐을 가리키며 가옥들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인연이 다한 것을 뜻하고 토지가 전폐한다는 것은 삶의 터전(기반)이 없어진다는(무너짐) 뜻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겨진다는 것은 육적인면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뜻이며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아진다는 것은 고정관념이 무너짐을 뜻하지요.

기존의 것들이 무너져야 새 하늘 새 땅을 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생이 그렇게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위에 내용에서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에게 영생의 영광을 전해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요한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겁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12:41)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요12:42)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12:43)

For they loved the praise of men more than the praise of God.

 

 

앞서 이사야서의 내용이 예수님을 가리킨 거라고 합니다.(41절)

그렇기 때문에 많은 관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지요.

그렇지만 바리새인들로 인해 출교조치 당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자백하지 못했던 겁니다.(42절)

그래서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다 기록했습니다.(43절)

분명히 예수님이 영생을 줄 수 있는 분이라는 느낌이 있지만 당장 현실에서의 이해타산을 따져보고 세상 것을 선택했다는 거지요.

그만큼 믿음이 약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요12:44)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5)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12:46)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육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예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거라고 합니다.(44절)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성령을 믿는 거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예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 겁니다.(45절)

또한 예수께서 성령으로 이 세상에 온 것은 빛이 내려온 것과 마찬가지이며 자신을 믿는 이들로 하여금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46절)

물질세상을 어둠으로 표현했으며 영생의 세계를 빛으로 묘사한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12:48)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12:49)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12:50)

 

 

47절에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지키지 않더라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구원하기 위해서일뿐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마지막 날에 심판할 이가 따로 있다고 하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를 심판할거라 했습니다.(48절)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앞서 본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는 어둠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믿지 않는 자는 빛의 세계인 영생을 얻지 못하고 어둠에 머문다는 뜻이 됩니다.

심판하지 않는다 하셨지만 결국에는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지요.

다만 예수님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심판을 받게 한다는 겁니다.

성령이 드러난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빛을 거부하는 것과 같으니 당연히 심판받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49절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사로이 하신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신 거라 했지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입장에서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육신이 아니라 성령이 예수님 육신을 통해 말씀하신 거지요.

이 말씀을 우리가 올곧게 들으려면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 들을 때를 연상하면 됩니다.

평상시는 그저 목사님이지만 강단에 서서 성경말씀을 가르칠 때는 성령이 역사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겁니다.

누구라도 진리를 말할 때는 눈빛이 달라지며 말에 힘이 넘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주 정상인 것이며 성령은 이렇게 세상에 역사합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믿음의 크기와 사람 됨됨이에 따라 거짓선지자들도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처럼 성령이 드러나신 분은 세상살이도 반듯하기 마련입니다.

사람 눈을 속이는 짓 따위는 않는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자신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을 믿는다면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명령은 사람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라는 것이라 했으며 자신의 말씀은 하나님의 목적과 완전히 부합한다고 했지요.(50절)

그런데 어찌 함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된 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우리들 안에도 성령이 담겨있다는 점도 알았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것도 알겁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이신 성령을 몸에 담고 있음을 믿는다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달라질 거라는 점을 말씀드리며 오늘의 시간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