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도 꿰어야 보배.
예전에 얼음만 먹고사는 스님으로부터 영안의 종류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미간사이에 있는 차크라를 천안(天眼), 이마 정중앙에 움푹 들어간 곳의 지혜안, 백회와 지혜안(智慧眼) 중간정도에 있는 법안(法眼), 그리고 백회를 불안(佛眼)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나로서는 생소한 일이라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때껏 영안과 육안으로만 알고 있던 눈의 종류가 다양함에 놀라웠지요.
사실 이것은 단계별로 분류를 해놓은 것일 뿐 이러한 일들을 모두알고 차례대로 열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몸을 차크라 별로 따져보면 수천 군데도 넘는다고 볼 수 있으며 한방에서 말하는 혈자리 모두가 차크라로 봐도 무방합니다.(차크라: 에너지중심)
한생에 모든 것을 알려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어떤 경우에는 그저 신기하다는 정도로 넘어갈 수밖에 없지요.
어떤 이들은 지적인 앎의 욕구에 사로잡혀 평생을 공부만하다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하나의 시험에 빠질 걸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스승이 되어 제자들에게 이런 일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식을 쌓겠다 마음먹으면 공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일을 모른다 해도 지혜안과 백회에 제대로 집중이 되면 한순간에 열리기도 합니다.
지혜안과 백회가 크로스 되는 지점을 자극하게 되면 빛을 본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육신이 정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방법을 시도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와 불교에서 가르치는 배불과 염불행위는 가장 쉽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이러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구원과 해탈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겁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미 명상법을 가르치는 법문에 입문을 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지혜안에 집중 하는 방법으로 수행을 했었지요.
그래서 그 당시 스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방법에 대해 연구해보았습니다.
집중을 한다는 것은 어느 한곳을 주시한다는 의미인데 왜 구태여 특정한 부위만을 자극해야하는가에 대해 생각을 하자 우리 몸 자체가 하나의 초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가 하나의 초점의 대상이고 신의 집중된 상태가 우리의 육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지요.
그러자 그때껏 지혜안에 집중하던 것이 머리전체로 옮겨갔고 눈앞에 별 하나가 떴습니다.
차크라의 범위가 머리전체가 되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24시간 사라지지 않는 빛을 얻은 셈입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런 일을 신기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체험보다는 자신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아무리 좋은 법문도 내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공부를 많이 하는 것보다 한 가지를 배우더라도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쓸모가 있는 겁니다.
그런 이유로 평범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분들이 대단하다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배운 바를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산더미 같은 가르침을 써먹지 못하면 쓰레기나 무엇이 다른가 싶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