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태복음36.

배가번드 2019. 1. 30.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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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홀리(holy)하신 것 같이 여러분들 또한 홀로(holo)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시간에 오신여러분 환영합니다.

마지막 포스 팅을 한지가 꽤 오래 지난 것 같은데 그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동안 컴퓨터가 말썽을 부려서 작업을 못한데다가 겨우 작업을 완성해놓고서 삭제버튼을 잘못 누르는 바람에 보름가까이 작업한 한편의 내용이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 일이 휴가 바로전날 일어났는데 휴일 날 재작업을 할 것인가 약속한 누군가를 만나러갈 것 인가를 놓고 고민을 했었지요.

작업이 먼저인가 누군가와의 약속이 먼저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누군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야만했습니다.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께서 나 홀로목사를 간절하게 원하는지라 작업을 뒤로한 채 갔던 겁니다.

이러한 일은 어디까지나 나 홀로목사개인사이겠지만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의 인생길에서 마주하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선택의 순간들을 맞이하지요.

그럴 때면 항상 대두되는 것이 무엇이 더 중요한가입니다.

이래야만 된다는 일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우리가 정해놓은 목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목적에 가장 부합되는 일이 우선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가령 학생의 가장 큰 목적은 공부인지라 공부보다 우선할 것은 없으며 사업하는 사람의 목적은 사업이니 사업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는 법이지요.

마찬가지로 나 홀로목사의 지금 당면한 목적은 마태복음의 완독과 영생을 얻게 하는데 목적이 있으므로 성경해석이 우선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해석은 기한이 정해져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미 말해놓은 내용만 하더라도 영생을 몇 번은 얻고도 남을 수 있으므로 뒤로 미루기로 하고 약속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아직도 영생에 대해 확신을 못하고 있다면 거듭해서 말하는 것보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는 이미 영생을 얻었을 것이고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를 가볍게 여기거나 비난하는 이들은 더 이상 이곳을 서성이지 말라는 뜻에서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기도 했습니다.

또한 비록 성경해석이 늦어졌다하더라도 휴가 기간 동안 깊은 묵상 속에 잠겨있다 왔으니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성령이 충만해졌다 할 수 있지요.

23일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또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지금 천상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으며 나 홀로목사는 그 음률에 몸을 맡긴 체 성경 속으로 들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26:1)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26:2)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26:3)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26:4)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26:5)

여러분들은 이 내용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나 홀로목사 눈에는 이상한점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유월절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린다했는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명절에는 하지말자 했지요.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는 틀린 말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틀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성경을 들여다보면 여기에 대한이야기가 틀림없이 나올 것 같으니 성경에 집중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26:6)

Now when Jesus was in Bethany, in the house of Simon the leper,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26:7)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26:8)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26:9)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26:10)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26:11)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26:1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26:13)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베다니는 가난한자, 번민하는 자의 뜻이며 나병환자를 뜻하는“the leper”에는 소외당하고 배척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언제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약한 자의 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게 어떤 여인이 비싼 향유를 부었으니 제자들이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거지요.

평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점이 보입니다.

예수님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하니 어찌된 일일까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인이야말로 선지자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뭔가 담겨진 뜻이 있을 것 같군요.

그렇다면 다른 복음서에는 이 내용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12:1)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12:2)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12:3)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12:4)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12:5)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12:6)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12: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2:8)

요한복음과 비교 하고 보니 많은 차이점이 보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없던 나사로가 보이고 기름을 부은 것도 요한복음서에는 마리아라고 기록해놓았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으로 나왔는데 요한은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았다 했지요.

그리고 요한은 예수께서 여인에게 기름을 간직하라 일렀다고 했는데 마태오는 예수께서 돌아가실 것을 미리알고서 부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누구의 말이 진실일는지요.

아마도 성질 급한 누군가는 진실여부를 따져야한다 말하겠지만 나 홀로목사의 눈에는 두 가지 모두가 진실 되다 여깁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디까지나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길라잡이일 뿐 역사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들이 보셨다시피 구약의 내용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비유로 된 것이 무척 많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도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비유의 가르침을 말해놓았으므로 두가지모두가 같은 목적을 가진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우리들이 영상물을 보듯이 사실 있었던 일을 알고자한다면 마태오가 좀 더 사실과 가깝게 기록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도 마태복음과 동일한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어떤 가르침을 전하려 했을까요.

먼저 1절에서 유월절 엿새 전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말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을 예견하고 있으며 유월절(안식일)은 예수님이 영면(永眠)하는 날을 가리킵니다.

마리아가 기름을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았다는 말은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발을 닦아주는 것은 하인이 주인을 섬기는 행위이니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겼다는 말이며 머리는 인체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지라 그 머리털로 발을 닦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여겼다는 말이지요.

또한 이 내용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것을 나타내기도합니다.

마리아의 히브리어 뜻은 존귀한분, 가장 높으신 분, 권력 있는 귀부인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돈을 훔치기 위해 기름 팔 것을 말했다했는데 그 말은 정말 유다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판 유다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나를 강조하기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만약 요한의 말처럼 유다가 평소에도 돈을 훔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께서 모를 리가 없었겠지요.

따라서 요한복음은 비유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에서 여인이 기름을 부은 것은 예수님죽음을 미리 알고서 부었다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타낸다 할 수 있으며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오는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다는 것을 말하기위해 이러한 일을 말해 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어찌되었건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 공히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위해 노력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액면그대로만 봐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 번 더 깨닫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일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 했을까요?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되살아나는 것을 말해왔는데 왜 이런 일을 만들어야만 했겠냐는 겁니다.

아직은 모르겠으나 좀 더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더 마태복음으로 돌아가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26:14)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26:15)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26:16)

그런데 순서가 약간 이상한 것 같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고 나서 곧바로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예수님의 수많은 제자들 중에 최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열두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를 넘긴다는 것이 과연 믿을 수 있는 일인지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나 홀로목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으며 여기에는 뭔가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고 다시 성경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26:17)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26:18)

And he said, Go into the city to such a man, and say unto him, The Master saith, My time is at hand; I will keep the passover at thy house with my disciples.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26:19)

이 내용을 보니 언젠가 교회목사님께서 하신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 되신 분이기 때문에 성안에 들어가 아무나 붙잡고 말을 해도 그 사람이 유월절 음식을 준비해 주었다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태복음만 보아서는 실상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 다른 복음서에는 이일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12:13)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12:14)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12:15)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12:16)

마태복음과는 달리 좀 더 구체적으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이 있다고 말씀하신 걸로 봐서는 미리 누군가에게 장소를 부탁해놓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태복음에서 아무 에게라고 한 것은 아무개라고 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아무에 해당하는 단어 such 는 어떤 이라는 뜻과 이러이러한 이라는 뜻이 있으니 이름만 밝히지 않았을 뿐 특정한 누군가를 가리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누군가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추측(推測)해볼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은 일을 나 홀로목사가 언급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지요.

잘못되고 기복적인 신앙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절대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목사님말씀처럼 아무나 붙잡고 말을 해도 예수님 말씀을 들어주었다고 한다면 예수님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하지만 우리가 지금껏 보았듯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았습니다.

이미 몇 번에 걸쳐 이와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했으니 적어도 여기에 오시는 분들 중에는 더 이상 기복신앙에 빠진 분들이 없으리라 여기며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어떤 이들과 유월절만찬을 준비했을 런지요.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유월절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대해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알겠지만 유월절은 유대사람들의 최대명절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사람들을 보내주지 않으려는 애굽의 바로 왕을 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려준 10가지 재앙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재앙은 각 가정의 첫 태생(사람, 짐승)은 모두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피할 수 있게 해준데서 유월절이 유래되었습니다.

잠시 구약에 언급되어있는 유월절에 대해 보고난 후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12:2)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12:3)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12:4)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12:5)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12:6)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인방에 바르고(12:7)

첫째 달 그 달 열나흗날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12:18)

출애굽기를 보면 유월절은 114일이며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날인15일부터 21일까지7일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을 보게 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 합쳐져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아마도 모세시대부터 예수시대에 이르는 동안 유월절과 무교절은 구분 없이 합쳐진 듯합니다.

시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지금까지 보았듯이 예수님은 구약의 많은 율법들을 달리 해석함으로서 담겨진 뜻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었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유월절 만찬을 통해 유월절에 담긴 깊은 뜻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전해주고자 한 겁니다.

그렇다면 유월절에 담긴 뜻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생존당시까지 지켜지던 액면그대로의 일들입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재앙이 피해나가길 바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백성들은 그때까지 모세의 가르침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조상이 애굽에서 탈출해 나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사건은 믿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에 대한 일을 말해놓은 겁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이방의 마음, 즉 믿음이 없는 마음이자 영적이지 못하고 육적인 인식상태를 말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 땅을 나왔다는 말은 모세의 가르침에 따라 영적인 길로 돌아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일이 시작됨과 동시에 수없이 많은 장애(10가지 재앙)가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길로 들어서려하면 육적이고 물질적인 인식들이(바로 왕) 구도자의 앞길을 가로막는데 바로 그러한 일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말은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이며 성령과 하나 된 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린양중에서도 흠이 없고 수컷이라 말한 것은 첫 사람 아담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와와 나누어지기 전의 사람으로서 성령과 하나 된 이를 말합니다.

성별로 나누어지는 오늘날의 사람이 아니라 성징(性徵)을 상실한 상태, 즉 음양이 하나 된 상태이자 성령과 하나 된 완벽한 인간을 말하는 겁니다.

시간관계상 깊이 있게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아담의 아내로 묘사되는 하와의 히브리어 뜻은 생명, 여자, 등입니다.

아담의 히브리어 뜻은 사람인지라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숨결인 생명이 나누어진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모세가 어린양수컷을 고르라한 것은 깨달음을 얻어 성령과 하나 된 예수님 같은 영적스승을 말하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을 뜻하니 하나님의 숨결인 동시에 하나님의 본모습인 성령과 마찬가지이며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과 하나 된 이가 그 집을 지켜준다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예문으로 올린 출애굽기124절의 내용은 깨달음의 크기에 따라 더욱 많은 사람들을 영생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날 가톨릭교도들의 가정에서 맏자식을 신부님이 되게 바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무교병을 먹으라 했는데 무교병이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말합니다.

이 또한 순수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은 영적스승의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지나간 시간 마태복음을 통해 보았듯이 말씀의 떡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는 말과 상통하는 말입니다.

또한 이것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 죄 사함의 단편적인 일을 말해준 것이기도 합니다.

구약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예수시대의 많은 이들은 모세가르침의 속뜻을 헤아리기 보다는 액면그대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애꿎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거나 양에게 자신의 죄를 안수하여 죽이기도 했지요.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려고 노력했던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해주려 했을지 다시 한 번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26:20)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26:21)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26:22)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26:23)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6:24)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26:25)

Then Judas, which betrayed him, answered and said, Master, is it I? He said unto him, Thou hast said.

Then Judas, the one who would betray him, said, "Surely not I, Rabbi?" Jesus answered, "Yes, it is you."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지금 예문으로 올린 내용을 볼 때 유다가 예수님을 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를 수 있을까요?

25절을 보게 되면 그 당시 예수님제자들이 유다를 그 당장 요절을 내고도 남을 만큼 명확하게 지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역본 두 개를 올린이유는 두 가지를 비교해보라는 뜻에서 올렸는데 한글성경의 내용을 보게 되면 위쪽 KJV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아래쪽 NIV는 더욱 확실하게 유다를 지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지요.

이 정도 되면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사단이 나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 홀로목사는 예수님과 특정한 제자들 사이에 암약(暗約)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시간관계상 올리지는 않았지만 마가복음(1412~26)과 누가복음(22:7~23)에는 이 내용이 빠져있었고 요한복음은 이와 비슷하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보고난 후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13:21)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13:22)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13:23)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13:24)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13: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13:26)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13:27)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13:28)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13:29)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13:30)

이 내용 역시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보아도 유다가 예수님을 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 앞에서 떡 한 조각을 적셔주는 자가 그라고 말해놓고 그대로 행동했는데 이를 모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분명 여기에는 담겨진 뜻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23절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유다를 무척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이 같은 내용을 볼 때 유다에게 특별한 지시를 했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유다가 할 일을 알고서 모른척했다는 말인데 이럴 경우 예수님은 그야말로 잔인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악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데 그 일을 묵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 제자를 희생한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요한은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표현한 겁니다.

아울러 또 한 가지 우리들이 생각해봐야할 일이 있습니다.

앞서 예문으로 올린 마태복음14~16절 내용을 보면 여인이 기름을 예수님머리에 붓고 난후 곧바로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흥정을 벌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그러한 내용은 없지요.

다만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11:47)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11:48)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11:49)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11:50)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11:51)

And this spake he not of himself: but being high priest that year, he prophesied that Jesus should die for that nation;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11:52)

And not for that nation only, but that also he should gather together in one the children of God that were scattered abroad.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11:53)

Then from that day forth they took counsel together for to put him to death.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태복음263~5절과 비슷한 내용이란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51절과 52절의 내용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기 때문이라 했는데 영역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가야바가 그해의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위하시고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으기 위해 죽게 될 것을 예언했다했지요.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대제사장정도가 되면 앞날을 예언할 수 있다는 말인데 과연 그러할까요?

만약 이럴 경우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많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이 과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생각을 했을 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다는 것은 이들과 예수님사이에 모종의 암약이 있었지 않겠냐하는 추리가 가능합니다.

특히 대제사장 가야바와 예수님은 뭔가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어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보면 마태복음261~5절까지의 내용이 왜 그렇게 기록되었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지요.

따라서 유월절에 팔릴 것이라 말한 예수님과 명절에는 하지말자한 대제사장말의 진실여부는 그들 사이에 모종의 흥정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 한다 할 수 있습니다.

나 홀로목사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엄격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날은 유월절, 114일 저녁이 되어야합니다.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말에 많은 분들이 불만이겠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자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생각을 해보시기바랍니다.

만약 요한의 말이 틀리다고 한다면 성경자체가 틀린 것이 될 것이고 성경이 옳다고 한다면 요한의 기록 또한 옳을 것이 아니겠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은 왜 제자들과 이러한 연극을 해야만 했을까요.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26:26)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26:27)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6:29)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26:30)

보시다시피 예수님은 자신이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양이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교병을 자신의 몸에 비유했고 포도주를 피(생명)에 비유했지요.

29절에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않는다한 것은 지금 당장은 포도주로 자신의 피를 대신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생명(성령, )을 나누어 마실 거라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니 자신이 죽게 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한 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찬미(讚美)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갔다는 말은 예수님을 성령(하나님)과 하나 된 분으로 여겼다는 말이며 그러한 믿음으로 인해 성전에 올라갈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신바대로 자신이 죽은 지 삼일 만에 되살아날 것을 실현하기위해 이러한 연극무대를 마련한 겁니다.

이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인데 오늘날 우리자신들의 믿음에 형태를 살펴보면 이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지만 우리들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밖에서 신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십자가상에 절을 하거나 마리아상에 기도하는 행위 모두가 자신 안에서 신성(빛이신 성령,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불교도들이 부처상에 절을 하는 행위들도 자신 안에서 불성(佛性)이신 무량광(無量光)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가르침의 속뜻이 뭐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점을 익히 알고 있던 예수께서는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려 했던 거지요.

요한복음이 예수님이 연극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으니 다시 한 번 더 읽어보라는 권유의 말을 남기고 오늘의 시간은 여기에서 마침표를 찍겠습니다.

   

선악의 경계를 넘지 못한 믿음 앞에는

언제나 두 가지의 길이 놓여있을지니

내가 선하면 상대방은 악할 것이요

   

상대가 선하면 내가 악할 것이니

투쟁과 논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얻지 못한 마음 또한 이와 같아서

내가 참되면 상대방은 거짓될 것이요

상대가 참되면 내가 거짓될 것이니

참과 거짓이 언제나 자리바꿈하며

서로 제가 옳다 하리라.

이 땅에 있는 천국은

저 위세상의 지옥이요.

저 아래세상의 천국은

이 땅일지니

천국과 지옥이 둘이 아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