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번드 2022. 6. 23.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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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내가 한국에 돌아가서 제일 처음 한일은 그동안 남에게 맡겨놓았던 차를 처분하는 일이었어.
차가 낡긴 했어도 몇백만원을 받을수 있을것이라 생각했고 북한과의 교역으로 생긴 빚을 갚기에는 충분할거라 생각했거든.
그러나 내 생각이 맞기는 했어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하더구나.
몇해 동안 내지 않고 쌓아 두었던 벌금이 차를 판 돈으로도 모자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거지.
차를 팔기는 235 만원에 팔았는데 벌금은 275 만원이었으니 40만원이 모자랐던거야.
결국 또 다시 네 고모네에게 신세아닌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중국산 차(茶)를 교회사람들에게 팔게 되었어.
물론 한국을 나오기전 차를 주문 받기는 했지만 주문량보다 더많은 분량을 교회분들에게 떠 맡기다시피 했으니 미안한 마음과 고마움을 금할길 없었는데 금전적인 어려움을 네 고모에게 몇번에 걸쳐 도움을 받았던터라 이번에도 어김없이 교회의 말씀을 경청해야만 했단다.
약 한달 가까이 네 고모집에 머물며 교회의 말씀도 듣고 명상센터를 오가는 이중생활을 해야만 했던거야.
이러한 생활을 하는 동안 네 할머니께서 호주로 가시게 되었는데 호주에서 살고있는 네 삼촌이 최근 호주정부로부터 시민증을 받은데다가 집을 샀거든.
축하도 할겸 네 삼촌네가 할머니를 워낙 보고싶다 성화를 하는지라 가시게 된거지.
우리들이 함께 살았던지가 벌써 10년이 지나고 있으니 그들에게 그러한 물질적 축복이 내릴만도 하다 생각이 들더구나.
내밑에서 워낙 고생이 심했던 네 삼촌인지라 늘 마음에 걸림돌이 되고 있었는데 이제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다 여기니 기쁘기도 했지만 영적으로 보자면 그다지 즐거운 일만은 아니어서 어떠한 평가도 하기가 쉽지가 않았어.
그저 과거 나와 함께 했던 시절 고생만 시켰기에 미안했었고 물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기에 늘 안타까웠었는데 이제라도 저희들이 노력하여 집을 장만하였다고 하니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 했었는데 네 숙모와 늘 다투며 살아가고 있다가에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던거지.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형태로 살아가고 있는데 물질적인데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영적인 면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거든.
수영장까지 딸린 집을 샀으니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 할만도 했는데 돈한푼 없이 들어간 호주에서 그러한 물질적 성공을 이루어내기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기에 다들 부러워하는 모양이었고 네 할머니도 그러한 점에서는 흐뭇하셨던가 보았어.
나 역시 그러한 네삼촌이 자랑스럽기는 했지만 내 삶과 바꾸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내 삶의 초점이 물질적인데 있지 않고 영적인데 맞춰져 있기 때문인가봐.
이같은 점을 동수들과의 대화에서도 명확하게 볼수 있었는데 수행을 하시는 분들조차 물질적인면을 무시하기가 쉽지가 않는것 같더구나.
네 할머니가 떠나신후 취직을 하기위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당장 머물곳이 없는 관계로 한동안 채식식당의 2층에 머물고 있던중 이상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어.
때 마침 식당에는 비구니 스님 한분이 머물고 계셨지.
96년 캄보디아 선행사 이후로 보이지 않던 스님인데 그동안 사찰에 머물고 계시다가 내면의 스승이 우리 단체로 이끌었기 때문에 오셨다고 했어.
어떤 동수분이 식당에서 설겆이 일이나 하시라고 모시고 온 모양으로 정신상태가 보통의 사람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그저 숙식제공만 받으며 지내고 계셨던거야.
어느날인가 동수들과 모여서 차를 마실때 일이 터지고 말았는데 평상시 에는 그저 혼자말로 중얼거리던 스님이 이날은 우리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와서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하지 않겠니.
내앞으로 정확하게 다가와서는 가지말라고 하소연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나중에는 아주 흐느껴 울기까지 하더니 급기야 무릎을 꿇으며 절까지 하는통에 기겁을 한 내가 스님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워야만 했던거지.
스승님의 말씀이라며 나에게 간곡하게 한국을 떠나지 말것을 권유했는데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고 있던 나이기에 놀라움은 말할수없이 컸었어.
비록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는 비구니스님의 말씀이긴 했지만 내 마음속의 결심을 정확히 집어냈기에 당황할수밖에 없었는데 주변의 동수들은 모두들 미친스님이라 흉들을 보고 있었어.
하지만 내 마음속을 그 스님이 정확하게 알고 있기에 나로서는 무시할수 없었고 한동안 고민을 할수밖에 없더구나.
어차피 중국에서의 인연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오면 뭔가를 하고 살아가야 할것인데 한국보다는 호주로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벌써부터 네삼촌이 들어올것을 말하고 있었기도 했고 늙으막에는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완전하게 한국을 떠나리라 마음먹었던거야.
투자자들로부터 더이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확답까지 받았기에 이제 마음의 짐도 벗었고 홀가분하게 떠날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기에 훌쩍 떠나려 했어.
그러던 중이어서 내 놀라움은 더욱 컷었고 스님의 말을 무조건 무시할수는 없었던거지.
그 스님은 자꾸만 내가 호주를 가게되면 실망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발 가지 말라고 애원을 하는통에 내결심이 흔들리고 있었고 정말 가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까지 일어나더구나.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이미 좋고 나쁜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무엇이 두려울손가?

 

진정 상처만 받고 돌아오게 된다는 그 스님의 말씀이 맞다고 하더라도 무서울것이 없었고 상처라는 것도 상처라는 생각을 하기에 상처가 되는 것이지 상처가 축복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무엇을 걱정할것인가 싶었던거야.
그래서 그 스님 말씀을 무시할수 있었고 그저 스님이 불쌍하다는 생각만 들었어.
그러면서 왜 이분이 이러한 상태에 처해지게 되었는지 분석해 보기로 했거든.
그랬더니 몇가지 우리들이 알아야할 사실을 발견할수 있었어.
이것은 비단 이 스님의 문제라기 보다 우리 동수들 전체적인 일인 동시에 수행을 해나가거나 믿음 생활을 하는 모두에게 적용될 말이기도 해.
우리 동수들은 흔히들 오불을 쉬지 않고 열심으로 해야하고 명상을 주야장창으로 해야한다 말하기 좋아 하거든.
모르긴 해도 네고모가 다니는 교회는 물론이고 타종교들도 그런줄 알아.
처음에는 그같은 일이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어느정도의 단계에서는 휴식이 필요한 법이거든.
마치 고무줄을 너무나 세게 당기면 끊어지는것과 같이 적당한 선에서 이완시킬 필요가 있다는거지.
이러한 점을 나는 몇번이나 경험한 적이 있는데 하루종일 명상을 하다보니 어느순간 뇌가 마비가 되는것을 느낀적이 있었어.
이렇게 해서 미치는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었는데 그때부터 다른일에 몰두하거나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등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던거야.
그러면서 조금씩 생활을 느슨하게 만들었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정상적으로 되는것 같더구나.
사실 너와의 대화도 너무나 몰두하다보면 머리가 뻣뻣해지면서 이상해 질때도 있는데 그럴때면 무조건 컴을 끄고 산책을 나가거나 외출을 하거든.
너와의 대화를 즐기면서도 그것이 중압감으로 작용하면 언제든지 내려놓아 버리는거지.
이것은 어쩌면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느낌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그 스님의 경우는 명상에 너무나 빠져든 나머지 그러한 상태가 된듯하였어.
이것은 결코 그 스님을 나쁘게 평가하는것이 아니라 내눈에 비춰진 그 스님의 행동에서 몇가지 발견한 일을 말하는거야.
우선 그 스님은 자신이 행동하기전에 반드시 내면에서 어떠한 메세지가 와야 움직이는데 식당에서 접시를 듣체 멍하니 서있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데 있었던거지.
한번은 이런일도 있었어.
식당 2층에 있는 직원들 숙소 목욕탕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스님때문에 사형한분이 애를 먹고 있기에 들어가보니 욕실앞에서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은체 혼자말을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내면의 스승과 대화를 하는거야.


나사형도 왔지 않느냐 나가자!
여기가 조용해서 명상하러 들어왔는데 왜들 난리인지 모르겠네.
화장실이 급하면 아래층에서 볼일을 보면 될것을......


아마도 육신과 내면이 대화를 하는 모양으로 한동안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자신의 몸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어.
그러자 스님을 목욕탕에서 나오도록 애를 쓰던 사형이 한마디 하더구나.


스님!
스님이 욕실에서 명상을 하시면 식당에서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내면의 스승이 시킨다 하더라도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느낀다면 자제를 하셔야지요.
그리고 말이 나온김에 덧붙이자면 내면의 스승이 시키는대로 행동하시는 스님때문에 손님들이 스님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셔야 할것 아닙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불편하게 여기는지 아시라는 말이예요.


이러한 사형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 어쩔줄 몰라하던 스님이 겨우 욕실에서 나왔을때는 이미 대여섯명의 사형사저들이 진을 뺀 후였기에 소문은 센터 전체로 퍼져나갔고 그 다음날 스님문제가 단체명상후 문제시 되고 있었어.
결국 스님문제로 경찰이 와야만 했었는데 경찰도 어쩔수없는 일이어서 스님의 처리문제는 한동안 센터전체 동수들의 골머리를 썩게 만들게 된거지.
아들아!
이 스님은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것을 보여주고 있었어.
명상을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저 지경이 되었을까 하는 마음이 불현듯 생겨났는데 내면의 스승을 발견하고픈 마음에 잠시도 쉬지 않고 정진한 결과 오늘과 같은 결과를 맞이한것 같아.
누군가는 우리들이 그 스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일뿐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전혀 틀리지 않는다 말하기도 하고 빙의가 되었다 말하기도 했지만 내눈에는 그분의 상태가 짐작이 가고 있었던거야.
평상시 자신의 수행관에 따라 자신만의 내면 스승을 만들어 낸것인데 아주 복잡 다양한 의식체를 몸에 담고 있었던거지.


그렇다면 그분은 빙의 된것이 아닌가요?
한마디로 귀신이 들린것이 아닌가 말이예요.


글쎄?
네가 그렇다고 여기면 그렇긴 하겠지만 귀신도 부처라는 개념에서는 그를 부처라고 봐야 하지 않겠어?
얼마만큼의 폭넓은 시각을 가질려고 하는가에 따라 그는 부처도 귀신도 될수 있는데 과연 너는 그를 어떠한 시각으로 볼려고 하지?


그야 부처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했으니 부처라고 말해야 내가 부처가 되는지라 부처라고 말하고는 싶지만 하는 짓이 영 아니거든요.
아무리 봐도 빙의된것 같은데 빙의 되었다고 하면 내 수준역시 그러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라 무척 조심이 됩니다.


그래!
이제 너는 50점 짜리 수행자는 될것 같구나.
그렇게 남을 향한 평가가 조심스러워야 이제부터 수행자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었다 할수 있는거지.
아들아!
이분의 일을 통해 우리들이 알아야 할것은 이분의 내면 스승이 진짜 부처냐 아니냐 하는것이 아니야.
이미 내가 말을 했듯이 이 세상에 부처 아닌것이 없고 신 아닌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이의 내면의 스승 역시 신이고 부처가 맞겠지만 다만 한가지 우리들이 알아야 할것은 도대체 어떠한 신이고 부처이고 싶은가 하는 것이 아니겠어?
앞에서도 보았듯이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경찰이 와야 할 지경을 만들어 내는 신이고 부처이고 싶은가 아니면 모든 이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는 부처고 신이고 싶은가 하는것이 문제이지 않겠냐는거야.
누군들 찬사를 받고 싶지 원망이나 원성을 사고 싶겠어요? 내면에서 시키니까 할수 없는거지요? 하는 말은 핑계거리거든.
앞서 내가 말을 했듯이 콩심은데 콩이 나고 팥심은데 팥이 나듯이 평상시 수행개념이 어떠했는가 하는것은 결과가 말해 주는것이 아니겠어?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니며 늘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이러한 결과를 낳기에 그 이유가 있어.
왜 육신의 스승이 봉사와 헌신을 말하며 하심(下心)을 하라 말씀하셨겠냐 말이야.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주의적인 생활방식과 에고의 산을 드높이게 되면 이러한 결과가 오기에 하신 말씀인거지.
이러하기에 우리들은 이타행을 해야 하는 것이고 이기적인 발상은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는거란다.
주변환경이나 타인들의 불편함은 무시한체 자신의 수행만을 위한 생각에 몰두하게 된다면 어떠한 부처가 된다는것을 그 스님은 우리들에게 아주 잘보여주고 있는거야.


당신말씀이 지당한것 같긴 하지만 그분의 상태를 보자면 너무나 불쌍합니다.
우리들이 수행자라고 한다면 그를 불쌍하게 여겨서 보살펴 주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더군다나 입문을 해서 수행하던 동료수행자인데 다시금 받아들여서 함께 명상을 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런지요?


네말도 일리는 있어.
나 역시 그러한 네 말처럼 사람들에게 말을 했고 언성을 높인적이 있었는데 진정으로 이분이 불쌍하다면 누가 나서서 책임을 져라고 하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더구나.
누군가 이분이 불쌍해서 데려온 사람은 자신이 그 사람을 책임을 지던가 아니면 사회의 법대로 처리를 해야 마땅한 일이었어.
처음 나는 그분을 중국의 우리공장으로 데려올 생각까지도 했는데 우리 공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상태만 아니라면 내가 모시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쉽게도 우리 공장은 이제 완전히 분해되고 있는 중이라 그럴수가 없었지.
그리고 한가지 덧붙일것은 입문만 했다고 해서 동수라고 할수는 없는 노릇인것이 인연의 끈만 메달아 놓고서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가 10년이 지난 지금 저러한 상태로 나타난 사람을 어떻게 할것인가 말이야.
그동안 어디서 어떠한 수행을 하면서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10년 전에 입문을 한 사실이 있으니 책임지라는 식으로 단체에 넘겨준 그 스님의 동료들이야말로 기가막히도록 이기주의적인 수행자들이라 생각이 들어.
이러하기에 우리들은 올바른 수행개념이 필요한것이 아니겠어?
진정 우리들이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 봉사와 헌신적인 형태의 삶을 산다고 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신의 보호와 가피가 함께 하며 그 스님과 같은 지경에 달하지는 않을것이 분명해.
이래서 우리들이 지금 생에서 남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하는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길이라는 말이며 당장은 손해보는듯한 모든 일들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이익되게 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는거야.
아들아!
우리들의 평상시 신구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지?
지난번 내가 뇌성마비 아이를 통해 나타나신 부처님들이 말씀을 그다지 경청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그들은 한결같이 사람들이 편하고 행복하게 사는것을 위한다 말하고 있었는데 나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생각하거든.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힘든 부분을 어루만져 주는 그 아이의 내면부처들은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그들에게 물질적인 부나 육체적인 안위를 바라고 싶지가 않아.
나 자신의 부귀영화나 육체적인 만족보다 이타행이야말로 수행의 요체라 여기기에 그러한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거지.
그렇다고 오는 복을 마다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애착스럽게 구하지 않는다는거야.
말을 하다보니 이것은 수행자 삶에서 아주 중요할수 있는것 같으니 오늘은 쉬었다가 다음에 이점을 집중적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꾸나.
너와의 대화는 항상 아쉬움을 남기고 있는데 보다 나은 우리들의 대화를 위한 충전의 시간이라 여기며 오늘은 여기에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