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186)
아들아!
이제 우리들이 작별을 해야 할 것 같구나.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될지 모르지만 당분간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지난 시간 한국을 다녀갔을 때도 약 4개월 가까이 대화가 중단되었었는데 중국에서처럼 컴퓨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한국에는 없기 때문이었어.
지금 당장의 목표점은 너와 대화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라 생각해.
조만간 신께서는 나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오늘은 지난해 중국을 떠나올 때 겪어야만 했던 마지막 순간들을 즐겨보자꾸나.
내가 돌아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지금껏 나에게 높은 금액에 공장을 살 것을 종용하던 대대에서도 제 삼자를 시켜 가격흥정을 하자고 나섰고 촌장은 촌장대로 나에게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엄포를 놓기도 했어.
내가 제의하기를 지금껏 우리들이 미루어 놓은 공장 임대 금을 시설투자와 설비들을 건드리지 않고 돌아서는 조건으로 맞바꾸자고 했거든.
그랬더니 촌장은 시설과 설비는 물론 물품까지도 고스란히 남겨두고 떠나라고 하더구나.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촌장의 말에 황당하기까지 했지만 그도 그럴 수 있다 생각이 들기에 사정을 해야 했어.
일 년 반 동안 세를 주지 않았으니 당연히 공장세를 달라는 것이었고 설비와 시설은 내가 공장을 하기 위해 했던 만큼 별개라는 거였지.
솔직히 말해서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면 당연하게 밀린 공장세를 주어야 했고 설비와 시설은 고스란히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 맞아.
하지만 나로서도 그들에게 맞설만한 이유는 있었는데 앞서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도 밝혀진 사실로서 공장에 설비투자비가 47만 위안(약 6천만 원) 상당이 들어갔거든.
그러다보니 설비투자비를 받기위해 촌장과 법정투쟁을 벌려볼 생각도 해보았어.
나에게서 돈을 받아먹은 판사가 재판을 하게 되면 20만 위안은 받게 해주겠노라고 했으니 나로서는 한번쯤 시도해볼 문제이기도 했는데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가 않기에 포기를 하기로 작정을 했고 촌장에게 사정을 하게 된 거야.
재판을 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비용이 들어야 하는데 그러한 비용이 없기도 하거니와 있다고 하더라도 판사의 말만 믿고 재판을 하기에는 무모한 점이 너무나 많았어.
남의 나라에서 재판을 한다는 자체가 불이익을 감수하고 해야 하는 일인데다가 중국 정부의 정책상 외국기업의 설비투자에 대한 권리주장은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미리 알고 있기에 해봐야 승률이 없는 게임이었던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여기에서 더 이상의 문제를 만들고 싶지가 않았거든.
재판을 한다는 것은 동네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데 그들에게 좋지 않은 인연을 심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어.
뇌성마비 아이의 말처럼 전생에 내가 이곳에서 스님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동네 주민들이 알게 모르게 나와 다들 인연의 고리를 가지고 있을 터인데 이제 와서 또다시 좋지 않은 인연의 고리를 만들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고 얻을 것을 충분히 얻었다고 생각했기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던 거야.
그래서 설비는 물론 가재도구까지 고스란히 남겨두고 떠나리라 마음먹었지.
하지만 이러한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사저의 친척들이 그렇게는 안 된다며 벌떼처럼 달려들었던 거지.
누구는 세탁기를 점찍고 누구는 밥솥을 점찍었으며 누구는 선풍기, 등등 각가지의 물품을 자신들이 가지겠다고 주장하고 있었어.
어차피 우리로서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살집도 없는 상태에서 한국으로 되 가져가본들 무엇을 하겠으며 옮겨가는 비용만 하더라도 만만치 않은지라 이래저래 남겨두고 가야만 했으니 그들로서는 서로 자신들이 더 좋은 것을 가지려고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거든.
완전하게 빈털터리가 되어서 돌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그저 자신들이 손해를 보지 않을까 혹은 어떡하면 이익을 챙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이 가득하더구나.
지금까지도 그다지 좋게 여겨지지 않던 사저의 친척들이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더욱 심한 면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나보다도 사저가 너무나 곤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어.
나야 본 바대로 느낀 대로 마구잡이로 화를 내면 그뿐이었지만 중간에서 모든 것을 감수해야하는 사저는 그저 묵묵하게 그들의 한심한 작태를 보고만 있어야 했던 거야.
이 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의 다양한 의식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일반인들은 일반인들대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형태만큼이나 다양한 인식들을 보여주고 있었지.
그런 의미에서 사저야말로 진정 대단한 보살 심을 갖춘 수행자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수행자가 있다면 사저라 할 수 있어.
나와는 수행방식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그이야말로 대단한 수행자일수밖에 없었는데 뇌성마비 아이조차 사저에게만은 무척이나 존경심을 표하고 있거든.
아이가 하자는 대로 모두 해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둘만이 통하는 그 무엇이 있었는데 지난시간 말하려고 했던 에너지의 세계인거지.
육감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에너지의 세상을 두 사람은 공유를 하고 있었으며 그 같은 일은 수행자들 대부분이 꿈꾸는 세계라 할 수도 있거든.
우리 육신의 진동수를 바꾸어서 의식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육신을 가진 상태에서 주파수대를 달리한 영적인 세상을 경험하는 것을 말하는 거야.
아이의 말에 따르면 하루에 한 끼씩만 먹고 나머지는 빛을 먹는 식사법(천공)으로 이 같은 일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했는데 마치 지난시간 내가 말했던 사랑의 OPT관계자들이 주장하는바와 같은 거였어.
이 말을 듣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친 소리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이 같은 일은 분명 가능하며 사저의 경우 우리들이 볼 수 없는 여러 에너지의 세상을 볼 수가 있음을 알아.
앞선 시간에도 잠시의 언급이 있었듯이 시간대를 달리한 여러 가지의 세상을 경험하기도 하고 나무의 정령들이나 심지어 귀신들조차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우리들이 경전을 통해 보는 여러 세계들을 직접 경험하는 사람인거야.
이 두 사람이 죽이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두 사람의 체험이 동일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며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세상을 함께 공유하기 때문인 거지.
사실 이 같은 점도 경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겠지만 경험을 해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신기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저 주파수대를 달리한 또 다른 세상을 말하는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어.
그러나 누군가의 목표점이 이러한 세상에 맞춰져 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 될 터인데 많은 수행자들이 이러한 일을 경험하고자 수행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다지 무시할 일은 아닐 것 같아.
지금까지 내가 말한 일들도 어떤 면에서는 보편적이지 못한 일이며 하나의 의식의 세계일수도 있는데 이들이 보는 세계와는 또 다른 영역이라 할 수 있거든.
이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지금 세상을 어떠한 인식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일과도 연관이 되는데 수행을 많이 해서 육신의 진동수가 바뀌게 되면 자연스레 경험하는 일일수도 있는 거야.
아마도 지나간 시간의 어디에선가 이러한 일에 대한 일을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육신을 버리는 순간 누구나가 경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을 거라 여겨져.
기억나지?
물론 이 같은 일도 평소의 인식에 따라 경험하는 일이 달라질 터인데 이 같은 말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인식에서는 또 다른 경험이 주어질 것이며 그것이 수천 생을 윤회하는 경험을 동반한다 하더라도 자신 영혼의 선택에 의해 즐거운 여행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해.
이러한 내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들을 배웅하기 위해 멀리서 온 친척 한분은 자신이 우리들과 함께 지내본 결과 수행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우리들이 늘 물질적으로 힘들어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거든.
그가 이렇게 말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보이지 않고 확인 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그 어떠한 확신도 할 수 없기 때문으로 표면적인 일만 볼 수 있을 뿐 그 너머를 볼 수가 없기 때문 인거야.
아들아!
어쩌면 이 같은 일은 네가 나를 이해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으니만큼 약간의 설명을 곁들일까 해.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초점처럼 우리들 삶의 초점이 물질적이라 할지라도 내게는 얼마든지 여유로울 수가 있는데 비록 집이 없다하더라도 얼마든지 내가 갈 곳은 많이 있거든.
우선적으로 네 고모집도 있고 네 할머니 집도 있으며 그도 편치 않다 싶으면 숙식제공을 해주는 일자리를 구하면 되는 거야.
이래야만 한다는 고정관념만 버리면 온 세상이 내 집 아닌 곳이 없으며 내 쉴 곳이 아닌 곳이 없는 거지.
이것이 마음의 평화를 얻은 자의 행복이 아니겠어?
물론 너는 나의 이 같은 말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실상을 바라보면 얼마든지 내말이 맞는다고 할 수 있는 거야.
물질적 한계성에 갇혀진 인식하에서는 내말이 전혀 감동적이지 못하겠지만 인식의 한계성을 극복한 가치관에서는 어마어마한 물질적 가치를 발휘하는 거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해석보다는 상대 비교심리적인 물질적인데 초점이 맞추어진 삶을 사는지라 결코 내말에 동조를 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비난의 화살을 퍼붓기 일쑤이거든.
한마디로 마음에 욕심을 버리지 못한 탓으로 자신들의 기대치에 내가 미흡했기 때문인데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할 수 있어.
내가 만약 그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지속적으로 해주었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좋아라하며 우리들이 하는 수행법을 서로들 하려고 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탓에 그들은 우리들의 명상법을 좋아할 수가 없었으며 비난까지 했던 거야.
이것이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이며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말씀을 실천하는 삶의 형태가 아닐까 해.
아들아!
이렇게 내가 말을 한 다해서 내가 다른 이들과는 별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말았으면 해.
솔직히 나는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욕망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물질적인 가치관에 얽매여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할 수 있어.
지금까지 네가 보아서 알겠지만 나와 상대한 모든 이들이 내가 가진 물질적인 가치관에 따른 인식 때문에 쫓겨 가거나 혼이 나야 했거든.
내가 만약 물질적인데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누구도 판단 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고 좋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해.
이 같은 이유로 나는 가끔씩 사저와 말다툼을 벌이곤 하는데 그이는 자꾸만 영적인 해석을 하는지라 나와 마찰을 일으키곤 하는 거지.
맞아요.
지금껏 당신과의 대화에서 줄곤 내 머리를 어지럽힌 점이 그러한 점이었어요.
당신은 항상 영적인 삶을 고집하며 주장해 왔는데 늘 타인들과의 교류에서는 그렇지 못한 모습들을 보여주었거든요.
진정 당신이 영적인 삶을 영유해 나간다고 한다면 당신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는 것은 물론이며 그들을 비난하거나 심판하는 듯 말을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한 점에 대한 당신의 분명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이번의 경우에도 나는 사저와 뇌성마비 아이를 상대로 나의 물질적 가치관에 따른 감정의 표현들을 유감없이 발휘를 했고 그들에게 철퇴를 사정없이 휘둘렀어.
저희들이 빌려간 돈은 주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빌려 쓴 돈만 받으려하는 행위가 괘씸하기 그지없었기에 돼지 같은 인간들이 제 욕심들만 챙긴다고 욕을 했으며 그들을 변호하는 사저를 향해서도 거침없는 칼날을 휘둘렀던 거지.
결국 사저는 눈물까지 흘려야했고 나는 뇌성마비아이에게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고 돌아서버리고 말았던 거야.
이 같은 점이 너에게는 아주 모순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아무리 되돌려 생각해 보아도 전혀 이상스럽다거나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
물론 나 역시 이 같은 내 행동이 자비와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싶어 명상을 통해 해답을 구하였는데 아주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어.
사저는 사저대로 명상을 통해 나의 자비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행위에 대한 대답을 구하였는데 참으로 우리들은 전혀 다른 대답을 같은 문제에서 얻고 있었던 거야.
먼저 나는 명상을 통해서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말씀이 떠오르더구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 같은 말은 듣는 이에 따라서 이상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 같은 말에 대한 해석을 그들의 행위에 대한 보복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어.
그저 그들의 물질적 행위에 따른 연극무대에 물질적 반응을 보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거지.
다시 말해서 그들의 수준에 맞춰서 연극을 해준 것뿐이다 이 말이거든.
만약 그들이 영적으로 행동을 할 수 있었더라면 나 역시 그들의 행위에 따른 반응을 영적으로 했을 테지만 보다 물질적인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라 그러한 인식정도에 초점이 맞춰진 반응을 보였던 것에 불과했으며 그러한 내행위에 대한 죄책감은 전혀 들지 않았던 거야.
참으로 변명을 아주 그럴듯하게 하시는군요.
만약 당신 말 대로라고 한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와 사랑은 무엇이지요?
분명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들에게 칠십 번씩 일곱 번 잘못한 일도 용서하라”
이것은 분명 당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성경말씀에 나오는 말인 만큼 변명의 여지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부디 여기에 대한 당신의 성의 있는 대답을 바래요.
글쎄!
과연 네 말대로 내가 내 행위에 대한 변명으로 그러한 대답을 떠올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이 말만은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내가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다고 해서 그들을 진정 미워하거나 그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심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라는 거야.
앞서 말한 대로 영적인 해석을 하게 되면 본시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근거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거든.
물질적인데 초점이 맞춰지기에 무엇이 가치가 있고 없음을 말할 수가 있으며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데 물질적이지 않게 된다면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이며 무엇을 옳다 그르다 할 수 있겠니?
다시 말해서 그들의 수준대로 놀아준 것에 불과한 것일 뿐 내가 그들을 심판하거나 단죄를 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야.
이것을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저의 내면대답을 들어봐야겠구나.
사저는 나에게 심하게 욕을 얻어먹고 명상을 통해 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얻었는데 다음과 같았어.
“장미를 사랑하려거든 가시조차 사랑하라”
상대방을 좋아하려면 좋은 점뿐만이 아니라 나쁜 점도 사랑하라는 말이었는데 그녀다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분명 사저는 나를 심판내리고 있었고 내 행위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짓고 있었던 거지.
하지만 나는 사저의 행위를 잘못된 것이라 생각지는 않아.
사저로서는 자신의 식구들이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편을 들고 싶었을 테고 당연히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내행동을 좋지 않게 생각했으리라 여겨지거든.
그러하기에 나는 언제나 사저의 행동을 옳게 여기고 있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우리들이 알아야할 사실이 있어.
그가 옳다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질적인 판단이 잣대가 되어야 하는 거야.
이러하기에 나 역시 그들과 시시비비를 따지게 되고 나는 결코 그들의 행위가 잘한 짓이라고 볼 수가 없는 거지.
그러나 이러한 점조차도 영적인 해석을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아.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은 물질적인 세상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영적인 세상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는데 무슨 잘잘못이 있을 것이며 용서할 근거가 있겠냐는 거야.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이지 못한 제자들을 영적이 되라는 물질적인 가르침 일뿐 영적이지는 않다는 말이거든.
다시 말해서 영적인 일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를 알도록 하기위해 말씀하신 것이며 영적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을 위한 말을 아니라는 말이지.
물론 이것은 또한 하나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한데 사저와 같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비와 용서로서 껴안는 선택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 뇌성마비아이나 사저가 자신들의 가족들을 위해 적극적인 변호의 자세를 취했기에 그기에 따른 반작용을 내가 보였던 거야.
이것이 사실일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는 사저가 제공하고 있는데 지금껏 사저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아낌없는 용서와 이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거든.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용서와 이해의 저편에는 그로인해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나또한 상대편의 입장에서 변호를 해야 하지 않겠어?
이러하기에 우리들은 매순간에 초점이 맞추어진 삶속에서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순간이 요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존재들인 거야.
이 같은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랑과 자비는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
솔직히 나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그 어떠한 심판조차 내리지도 않거니와 나에게는 그럴 자격조차 주어져 있지 않아.
그저 그들의 인식에 따라 그들의 심판에 따라 그들이 받아야 할 것들을 그들이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을 뿐인 거야.
아들아!
지금껏 너와의 대화에서 주장했듯이 우리 인간들은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심판자의 위치에 올라있지 않아.
내가 때때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성토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순간에 초점이 맞추어진 우리들의 육적인 면일 뿐 영적인 점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어.
다시 말해서 나는 너와의 대화에서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으며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모든 인간적인 감정적인 일들이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기도 해.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어느 곳에 초점이 맞춰지느냐에 따른 나의 대답이 될 것인데 이 같은 점을 말하기에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은 것 같구나.
다음 시간을 기약하며 오늘은 여기에서 작별을 고해야 할 것 같아.
먼 여행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이시간이 참으로 아쉽기는 하지만 신은 조만간 우리들의 대화를 허락하시리라 생각해.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며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