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육신의 변명.

배가번드 2022. 7. 8.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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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무술교관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96년으로 기억되는데 그분으로부터 특별한 경험담을 들었지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 중에 하나가 공중제비를 돌 때 한손을 이상하게 짚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몇 번이나 확인을 한끝에 매번 이런 동작이 나오는 것이 전생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거지요.

그 사람이 팔을 다친 적도 없고 특별히 팔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전생의 기억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생에 팔이 잘린 채 살던 기억이 남아 이생에서도 이상한 동작이 나왔던 거라고 합니다.

그분의 말이 일리가 있다 싶었던 것은 아이를 키우면서 이런 일을 확인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려고 그림카드를 사왔는데 돌이 갓 지난 아이가 카드를 정확히 집어내는 바람에 놀라웠지요.

가르치기 전인데 어떻게 그림을 보고 맞출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전생을 말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우리가 이생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과연 전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궁금해집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전생을 살았던 기억의 단편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릇에 담긴 물이 그릇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죽음이란 그릇이 깨져 망각의 바다와 합쳐지는 것과 같은 거지요.

이렇게 되면 그릇에 담겼던 물은 바다와 하나가 되고 또다시 그릇에 담길 때면 다른 물과 섞인 체 새로운 그릇의 역할에 몰두하게 되는 겁니다.

이때는 이미 다른 물과 섞여 있으니 과거 전생과는 다른 물이 된 것이지만 전체 물과 하나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지난번의 기억이 많이 담겨있게 됩니다.

그래서 전생을 또렷이 기억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고 이런 이유로 불가에서는 전생3대가 이생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 전생3대라는 개념자체가 맞지 않는 논리입니다.

그릇이 깨지는 순간 전체와의 합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특별하게 전생이라 논할 것은 없지요.

다만 살아생전 득도를 한 인물일 경우 영체를 간직한 채 전체의 일부분이 되어있으므로 자신이 원한다면 또다시 그릇 속에 담기는 선택을 하는 것뿐입니다.

예수와 석가모니 같은 분이 이렇다고 할 수 있으며 지구촌을 다녀간 수많은 인물들이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끌어당김의 법칙에 의한 일일수도 있지요.

예를 들어 누군가 아이를 얻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을 경우 그들의 염원은 영적인 존재의 임하심을 유발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는 영적으로는 완전하지만 부모의 유전자 영향을 받아 육신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아이는 영적으로 완성된 자아를 찾고 드디어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객체화 되지 않은(득도하지 않은) 영혼은 전체와 하나 된 상태에서 부모의 영향을 받아 태어나게 되고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되겠지만 때로 좀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 그의 인생을 좌우지 하게 됩니다.

바다와 하나 된 물중에 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 물의 영향을 받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 또한 끌어당김의 법칙에 의하여 내가 더 많은 기억들을 불러들인다면 점점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나의 깨달음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노력에 달렸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누군가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나 석가모니 부처가 다했겠지요.

이런 까닭으로 깨달음을 증득(證得)이라고도 하고 드러남이라 해도 맞습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의해 내가 당기기도하고 내려오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과거 전생에 기인하여 너와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 말하는 것을 수용하게 되면 제한된 영혼이 되는 것이며 과거 전생에 대한 인식이 자유롭다면 그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또한 관념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한 하나의 고정된 관념에 불과하지요.

매일수도 있고 매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매여야 될 때 매이고 풀어져야할 때 풀어질 수 있을 때 자유롭다하는 겁니다.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지만 나는 잡으려하고 동시에 놓으려하며 매이고 싶어 하기도 하며 매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잡아주길 바라기에 잡으려 했고 놓이고 싶어 하기에 놓아주는 선택을 했으며 매고 싶어 하기에 매여 주는 척을 했고 매이고자하기에 매어주었던 것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이기에 이렇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껏 이렇게 살았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겁니다.

 

 

 

이것은 내육신의 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