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42.
삼라만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나 홀로목사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이 말을 이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공유(共有)는 하지 못해도 공감(共感)하는 분들은 몇 분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을 오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신)을 믿거나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자부하는 분들일 겁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조차도 누군가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면 절대 믿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성경을 안다고 자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속에만 하
나님의 음성이 있다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씀조차 성직자들이나 목회자들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으므로 그들의 개인
인식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똑같은 성경을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누가 해석을 해주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겁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파가 생기는 이유가 바로 그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하여 기록하길 믿음이 중요하다했습니다.
나 홀로목사역시 이러한 점을 동일하게 말씀드리고 있으며 믿음이 없다면 이 세상 그 어떤
경전도 소용이 없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온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하겠습니다.
구약이던 신약이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줄 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나
며 그 말씀을 우리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겁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 된 이라 말했지만 믿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요나의 기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했지요.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고래뱃속에서 살아나는 것처럼 무덤에서 되살아나는
일을 보여주겠다고 했던 겁니다.
이미 밝혀놓았듯이 요나의 기적은 정말 고래뱃속에서 요나가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물질세
상을 죽음으로 보고 믿음의 길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을 부활로 본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 홀로목사는 그 당시에 일어났던 일의 전말(顚末)을 여러분께 보여주고자 하는 겁
니다.
물론 이 같은 나 홀로목사의 말을 여러분이 믿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나 홀로목
사역시 관객 없는 연극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여러분의 믿음에 달렸지요.
하나님을 여러분 안에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는 능력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고 천국과 지옥
조차 여러분의 선택에 달렸으며 나 홀로목사의 성경해석의 존폐여부조차 여러분 손에 달렸
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마27:45)
여기에 나오는 시간은 액면그대로의 시간으로 로마시간으로 정오부터 저녁6시까지를 말합
니다.
낮부터 하늘이 잔뜩 흐렸었다는 말이지요.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
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저녁 무렵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렀다했는데 이 내용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영역본을 보자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하겠지만 히브리어의 번역에 있어서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엘리는 나의 하나님을 뜻하며 라마는 높은 곳을 뜻합니다.
사박다니는 한단어가 아니라 사박과 다니의 합성어로서 사박은 “살피다, 보살피다, 주시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는 심판하다는 의미가 있지요.
이렇게 여러 단어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만들어집니다.
“높은 곳에서 심판하시는 나의 하나님! 나를 보살펴주소서!”
물론 이 같은 내용을 달리 해석할 수도 있을 겁니다.
모두가 비슷하겠지만 풍기는 뉘앙스는 차이가 있습니다.
영역본은 어디까지나 헬라어성경이나 히브리어성경을 토대로 옮겨 적었음이 분명한지라 문
제 삼을 것이 없을 테지만 마태오는 분명 어떤 의도(意圖)를 가지고 이 내용을 적었을 겁니
다.
그렇다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적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확실하게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앞서 우리들이 확인한 바대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염려하여
세 번씩이나 기도했는데 지금 이 순간역시 그런 기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자신이 살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한 것이지만 마태오는 기도내용이 예수
님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만들었지요.
아마도 성경에는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줄 내용이 있을 줄 믿
습니다.
성경 안에서 확인해볼까요?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마27:47)
이 내용을 해석하기 전에 여러분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분명히 46절에 히브리어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찾았는데 왜 47절에는 엘리야를 부른다고
기록했을까요?
이 내용을 볼 때 마태오는 뭔가를 말하고자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태오는 이 내용 속에 무슨 뜻을 담아 놓았을 런지요?
이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자면 엘리야가 나오는 구약의 열왕기를 속속들이 파헤쳐야하겠지만
시간관계상 불가능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열왕기를 통해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지금은 약식으로 간단하게 설
명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엘리야의 히브리어 뜻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입니다.
마태오가 47절에 엘리야를 부른다 한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이 엘리야를 선지자의
한사람으로만 여겼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지요.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 즉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죽음을 걱정하여 기도한내용을 보고 이스라엘사람들이 예수님을 평범
한 일반인으로 생각했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겁니다.
그만큼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태오는 또 어떤 비유의 말로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는지 다시 성경에
집중해보겠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마27:48)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마27:49)
분명 포도주를 마시게 한사람은 예수님제자 중 한사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49절에서 말하는 이는 일반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지난시간에 보았듯이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 된 예수님을 비웃거나 조롱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내용 역시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적어도 엘리야가 와서 구해주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이 내용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오늘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모두가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육신이 구원받는다 생각한다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노라 말하기 어렵
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육신의 예수를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보
였다는 것을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이 깨달아야하지요.
육신은 겉옷과 같아서 죽음에 이르러서는 벗어야한다는 것을 알아야함에도 육신으로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마태오는 지적했던 겁니다.
그런 이유로 마태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기록해놓았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마27:50)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영혼이 떠난다고 해놓았는데 이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말입
니다.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다는 말은 육신과 영이 둘로 분리되는 것을 말하며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진다는 말은 육과 영이 분리되는 현상이 지축이 흔들리며 바위가
터지는 것 같다는 비유의 말입니다.
이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면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 죽을 때는 이런 현상
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조건을 만들어내지요.
이럴 경우 예수이래로 2천년동안 하나님과 하나 된 이가 단한사람도 없다는 결론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붙들고 있는 한 절대로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며 영생이란 꿈도 꿀 수 없
는 일이 되고 맙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마태오가 자신의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시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마27:52)
The tombs broke open and the bodies of many holy people who had died were
raised to life.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3)
They came out of the tombs, and after Jesus' resurrection they went into the holy
city and appeared to many people.
혹시 여러분들은 이 내용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시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꿈에서 깨셔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부활에 대해 말해놓은 것이며 영의 세계가 어떠하다는 것을 비유해놓았
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제대로 분석하려면 먼저 해석의 문제부터 짚고넘어가야합니다.
52절에 성도(聖徒)의 몸이 많이 일어난다는 말은 성스러운 사람(holy people)들이 부활하는
것으로 바꿔야 됩니다.
이렇게 바꾸고 나면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달라집니다.
“무덤들이 열리며 죽음가운데 있던 성인들이 부활하더라.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이제 우리들은 50절부터 53절까지의 내용을 연계(連繫)해서 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이 죽는 것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성스러운 이의 죽음임으로 성소(육신은 성전)
의 휘장이 둘로 갈라지는 것과 같다했지요.
깨달음을 얻은 이의 죽음은 물질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지진과 바위의 터짐
으로 표현했는데 만물동일체의 인식에 도달했음을 간접적으로 묘사한 겁니다.
예수님처럼 성령과 하나 된 이의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의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기위해 무덤들이 열리며 성인들이 부활 한다 말해놓았습니다.
참고삼아 한 가지 덧붙일 것은 53절에 부활로 쓰인 단어 resurrection는 원래대로 회복한
다는 의미이기도합니다.
원래 성경에 쓰인 부활은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대로의 영으로 회
복한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예수의 부활 후에 성인들이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the holy city)에 들어간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이의 죽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조금은 역설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지요.
이 내용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면 예수가 부활하지 않으면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되고 맙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구약의 많은 내용이 부정되어야하고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성경이 됩니다.
많은 성인들이 무덤에서 되살아난다는 말은 성인들이 무덤에서 잠자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
라 예수님의 영혼이 육신에 갇혀 있다가 영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제한된 물질세계를 벗어나 시공이 없는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지요.
여러분들도 여기에 대해 조금만 깊이 있게 생각해보면 금방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 기록되어있는 많은 선지자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갔다는 것은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
라면 인정할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성이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말한다는 것도 알겁니다.
모세를 비롯하여 여러 선지자들이 성전에 들어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쉽게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정말로 무덤에 성인들이 잠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깨닫지 못한 이들, 예수의 육적
인면만 보는 이들)의 인식 안에 갇혀있던 많은 성인들이 예수의 죽음을 맞이하여 영적인 부
활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 되지요.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더욱더 나 홀로목사의 말이 이해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함께 보시죠.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
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27:54)
When the centurion and those with him who were guarding Jesus saw the
earthquake and all that had happened, they were terrified, and exclaimed, "Surely
he was the Son of God!"
그런데 예문을 올리고 보니 한 가지 특이한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누구일는지요?
나 홀로목사 생각에 여기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마태복음 8장에 하인을 구하는 백부장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지키던 자들(who were guarding Jesus)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틀림없습니
다.
왜 이렇게 말씀드리는가 하면 이들이 지진과 무덤이 열려 성인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했기 때문입니다.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영안이 트여 이런 일
들을 볼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달리 말하면 그때까지 알 수 없었던 영의 세계나 부활에 대한 의미를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러한 일들이 일반인들에게 일어났더라면 역사에 길이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에 이런 일은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일어났던 일이었지요.
그랬기 때문에 마태오는 다음구절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마
27:55)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
머니도 있더라(마27:56)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자신이 기록한 내용이 사실이라
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위해 실명을 거론하며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킨 거지요.
이렇게 해서 일단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 같은데 정말 돌아가신 걸까요?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마
27:57)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마27:58)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마27:59)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27:60)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27:61)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시체를 내어달라 말하자 빌라도가 쉽게 내어주었다 했습니다.
과연 사형시킨 시체를 아무런 제재조치(制裁措置)도 없이 내어주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이 숨겨져 있을듯합니다.
성경을 상세하게 들여다보면 여기에 대한 해답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집중해서 보겠습니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
되(마27:62)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
가 기억하노니(마27:63)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
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마27:64)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마27: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마27:66)
63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 말하길 예수가 사흘 후에 살아
나리라 한 것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만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말했었는데 어떻게 대제
사장이 이 사실을 알았을까요.
마태복음을 보면 12제자들에게만 특별하게 말해주었다는 것이 기록되어있는데 대제사장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대제사장과 예수님 제자들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있었던 것
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이 내용은 대제사장과 암약이 있었다는 것을 슬쩍 내비치고자한 것입니다.
사형당한 시체를 쉽게 내어주는 것도 납득가지 않는 일이지만 무덤을 지키는 일조차 대제사
장에게 맡긴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며 나 홀로목사의 말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돕
기 위해 모두가 협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로마 경비병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개인병사더러 지키라했다는 것은 부활에 대한 연극을 더
욱 쉽게 해주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나 홀로목사의 말이 믿기지 않는 분들을 위해 요한복음은 동일한 장면을 어떻게 묘
사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19:28)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
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요19:29)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
나가시니라(요19:30)
모두들 아시다시피 신포도주는 몰약이 섞인 것이지요.
몰약은 강한 진통효과와 더불어 방부제와 치료제로 쓰이는 약이며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명
약이었습니다.
강한 진통제의 효능 중에는 마취효과도 있으니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고통과 피로와 함
께 마취제의 영향으로 기절하신듯합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의 빗발치는 항의가 예상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지금 이 말이 이해가 갈 것입니다.
보시죠.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요19:31)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요19:32)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요19:33)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사람은 다리를 꺾었으나 예수님은 다리는 꺾는 대신 옆
구리를 찔렀다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 로마병사들을 매수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다리를 꺾는 이유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것을 확인하기위해서인데 예수님
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꺾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나왔다했는데 이는 창이 심장을 찌른 것이 아니라
위를 건드린 겁니다.
이 같은 일을 볼 때 예수님이 마신 신포도주는 몰약(강한 마취제)이 섞인 물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리게 되면 예수님이 계획한 부활에 대한 연극의 의미가 상실됨으로
요한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부하여 부활에 대한 믿음을 더하려합니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
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19:35)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
19:36)
요한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했는데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게 한 것은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라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을 봐야겠습니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출12:46)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민9:12)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34:20)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유월절의 규례를 말해놓은 것인데 이는 희생양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희생양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하고자 요한이 이 구
절을 인용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시편의 내용역시 의인의 뼈가 꺾이지 않는다했으니 예수님이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의인이란 성령을 깨달아 하나님과 하나 된 분을 가리킵니다.
희생양의 의미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요한복음을 통해 확실하게 알 수가 있지요.
성령을 깨달아 안다는 것은 희생양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여러분모두가 그
런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자신들이 없겠지만 반드시 그런 인식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려면 지금껏 가지고 있던 환상들이 깨어져야만 하고 그 환상 중에는 예수님의 부활도
포함이 됩니다.
환상을 깨기 위해 다시 한 번 더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19:37)
이 말씀은 스가랴서12장 10절의 내용입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
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
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10)
And I will pour upon the house of David, and upon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the
spirit of grace and of supplications: and they shall look upon me whom they have
pierced, and they shall mourn for him, as one mourneth for his only son, and shall
be in bitterness for him, as one that is in bitterness for his firstborn.
이 내용역시 유월절의 어린양을 가리키며 예수님이 희생양이 되었음을 나타내고자 요한이
인용했습니다.
사실 스가랴서의 내용은 이스라엘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내용으로 이방인들에 대
한 경고이기도합니다.
시간관계상 12장 전체를 살펴볼 수는 없지만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예루살렘을 치는 이방
인들에게는 애통해 할일이 생긴다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은 알려진 바대로 성지인데 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게 되면 예수님과 같이 성령을
깨달은 분을 가리키지요.
한글성경을 보면 이 내용을 제대로 인식하기 힘들지만 영역본을 보면 어떤 뜻인지 확연히
드러납니다.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주민이란 하나님을 완전히 믿는(완전하게 깨달은 자) 이들을 가리
키는지라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준다 했으며 그런 사람(예수님)을 찌르는 이는 그에
게서 하나님을 본다했습니다.(they shall look upon me whom they have pierced)
바꾸어 말하자면 그를 찌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찌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 이유로 애통해 할일이 일어난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도 모르게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를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스가랴서를 완전히 이해했으니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
를 가져가니라(요19:38)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
라(요19:39)
He was accompanied by Nicodemus, the man who earlier had visited Jesus at night.
Nicodemus brought a mixture of myrrh and aloes, about seventy-five pounds.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간 것은 마태복음과 동일한데 39절에 가서는 약간 달라집니다.
마태복음은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쌌다고만(마27:59) 했는데 요한복음에는 몰약
(myrrh)과 침향(aloes)섞은 것을 백 리트라 쯤 가지고 왔다했습니다.
영역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백 리트라는 75파운드 정도 되는 양입니다.
1파운드가 0.43키로 이니 30키로 그램이 넘는 약을 가져갔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침향은 알로에를 말하는데 이약은 방부제가 아니라 치료제입니다.
알로에의 치료범위는 광범위해서 암을 치료할 정도로 약효가 뛰어난데 그중에서도 외상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 원폭피해자들이 외상을 치료하는데 알로에를 쓴 것으로 알려
져 있는데 치료효과가 탁월했지요.
한글성경에 침향이라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시체를 싸는데 상처치료제인 알로에를 썼을까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는듯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말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줄 대목이 연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함께 보실까요?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40)
Taking Jesus' body, the two of them wrapped it, with the spices, in strips of linen.
This was in accordance with Jewish burial customs.(NIV)
Then took they the body of Jesus, and wound it in linen clothes with the spices, as
the manner of the Jews is to bury.(KJV)
혹시 잘못 보았나 싶어서 영역본 두 가지 모두를 보았는데 나 홀로목사가 본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한글 성경은 세마포로 예수의 시체를 쌌다했지만 영역본은 약간 다릅니다.
먼저 (NIV)를 보면 세마포를 벗긴 안에 향품을 넣고 쌌다했습니다.(wrapped it, with the
spices, in strips of linen)
그리고 (KJV)는 세마포 옷 안에 부상당한 데를 향품을 넣고 쌌다했지요.(wound it in linen
clothes with the spices)
이제는 나 홀로목사의 말이 믿어지는지요?
아마도 어떤 분들은 유대인의 장례법이 그러하다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들은 지금당장 이곳을 벗어나야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곳을 얼쩡거려서는 안 되지요.
요한은 눈 밝은 이가 보라는 뜻에서 이러한 사실을 심어놓았고 그 숨겨진 내용을 나 홀로목
사가 파헤쳐주는데도 불구하고 미망의 세계에 계속해서 머물고자 한다면 말릴 재간이 없습
니다.
영생을 얻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자신의 업장으로 인해 의심하는 마음이 계
속 드는지라 그런 사람을 어찌할 도리가 없지요.
분명 그런 사람은 이어지는 구절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41절에서 아직 사람을 장사지낸 일이 없는 무덤이라 말한 것은 예수님이 죽지 않았음을 나
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말을 믿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디 믿지 않는 분들은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로부터 멀리 떨어지라 권하며 오늘의 시간은
요한복음 19장의 마지막부분을 보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요19:41)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요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