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번드 2022. 7. 27.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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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한국에 돌아온 후 계절의 변화만큼이나 내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어.

호주에서 돌아와서 내가 처음 가게 된 곳이 여동생의 집이었는데 무려 두 달이 넘는 동안 함께 지내야만 했었고 그동안 교회를 수없이 다녀야만 했으며 급기야 침례 식까지 치러야 했던 거야.

직업도 아파트 계단 청소를 하는 일을 두어 달 하다가 최근까지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전기 잡부를 하고 이제 또다시 백화점 신축 공사에 투입이 되었으니 참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시간을 약간 더 과거로 돌리면 눈이 휘돌릴 정도로 정신없는 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중국에서 돌아온 뒤부터 주유소에서 주유원으로 일하다가 부산으로 내려가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목수 보조 일을 하기도 했으며 호주로 건너가서는 야간청소에다 농사일까지 했으니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인생행로를 걷고 있는 것 같아.

워낙 변화무쌍한 길을 걷다보니 살림살이도 늘고 줄고를 거듭하고 있는데 중국으로 들어갈 당시만 해도 보따리가 수십 개였다가 나올 때는 십여 개로 줄더니 호주로 들어갈 때는 대여섯 개였고 또다시 나올 때는 달랑 두 개였으니 짊어지고 가는 인생의 무게도 그만큼 줄어들었으리라 스스로 위안으로 삼곤 해.

하지만 내가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삶을 사는 것을 여동생은 무척이나 못마땅해 하는데 한마디로 줄을 잘못서서 그렇다고 말하거든.

종교를 잘못선택해서 내가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한다는 거지.

그럴 때면 나는 성경의 이런 말을 인용하곤 해.

 

별빛 주셔 감사하니 달빛주시고 달빛 주셔 감사하니 햇빛 주시더라!”

 

이렇게 말을 하면 동생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 말라면서 이렇게 말을 하지.

 

성경의 그 말씀은 그런 뜻이 아냐.

구원을 받고나서 할 수 있는 말을 오빠처럼 구원받지 않은 이들이 쓰는 말은 아닌 거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가 막힐 수밖에 없는데 도대체 그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기에 저희들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타인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가 싶거든.

그러나 나는 그들과의 논쟁을 길게 끌고 가지는 못하고 있어.

솔직히 내가 끝까지 반론을 펼치지 못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내주장이 강하게 되면 마찰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그들은 우리들의 영혼을 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그렇게밖에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내가 너희들은 아직 모른다고 말하게 되면 그들로서도 상당한 상처를 받아야 할일이 되거든.

그러하기에 가끔씩 내주장을 하다가도 언성이 높아진다 싶으면 그저 내가 지옥을 간다고 말해 버리곤 했어.

그들이 조목조목 들고 나오는 성경 해석을 보면 영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 훤히 보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설명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이 드는 일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을 해야 하는데 짧은 시간동안 설명하기도 힘들거니와 기껏 몇 시간을 설명을 해주어도 내가 귀신들린 사람취급을 받아야만해.

도무지 영에 대해서 경험한바가 없는 사람에게 영을 이해시키기란 그야말로 어려운 일 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을 해야 하는 거지.

하긴 이해도 되는 것이 영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관음법문 수행자들조차 자신의 영을 모르고 있는 이들이 태반이니 말해야무엇하겠어.

이러하기에 깨닫는다는 것은 수천 생을 반복해서 살아도 어렵다고 하는 것 같아.

우리들이 하나님께 헌신과 복종하며 온전히 삶을 맡길 때 이외에는 방법이 없으리라 여겨져.

그런 의미로 본다면 내동생의 신앙심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거야.

지금껏 내가 주장한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영혼의 대 자유를 얻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말 일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들은 아직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많이 남았기에 인과의 세상에 머물러야만 하거든.

앞선 시간에도 말했듯이 업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내말을 믿을 수도 없을뿐더러 이해할 수가 없을 거야.

그러하기에 그런 사람들은 좀 더 신을 향한 봉사와 헌신적인 일들이 필요해.

물론 그들이 영혼이란 업장에 벌벌 떠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를 원할 경우 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면 너와의 대화는 순전히 나와 너를 위해서이고 우리의 대화에 동참하는 사람들만을 위해서라고 보면 될 거야.

하지만 아들아!

지금 말하는 일들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절대 비난을 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해.

왜냐하면 그들 또한 이 세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분들이거든.

하나님의 다 같은 자녀로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징검다리들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가끔 내가 너와의 대화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가 바로 이러한 마음이 들 때인데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기위해 선택한 삶의 길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잘 가고 있다는 것이 보일 때마다 내가 괜한 일을 하고 있구나 싶어지는 거야.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위안을 삼는 것은 나의 말이 진정 필요한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이라는 거지.

그리고 누군가는 내말이 필요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금 세상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발전을 해가고 있으며 영적인 일조차도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아.

모르긴 해도 너와의 대화도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 한 부분을 담당하지 않을까싶어.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과거와 현재의 성경이 어떠한 변천사를 겪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꾸나.

지나간 시간에도 몇 번에 걸쳐서 성경을 이야기 했듯이 초기 기독교가 발생될 때는 그야말로 순교자의 시대였는데 예수를 믿는 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헌신짝 버리듯이 했어.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이유가 육신보다는 영적인 삶을 더욱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해.

그러나 이러한 인식도 상당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는데 순교를 할 수 있는 만큼의 믿음을 갖추지 못했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인식까지도 강요받아야만 했어.

불과 수백 년 전만 하더라도 유럽사회에서는 종교재판이라는 것이 벌어지곤 했는데 심한 고문을 가한 후 자신이 이교도라는 자백을 하게 되면 가차 없이 벌을 받거나 처형을 당해야만 했던 거지.

그 당시 교황청에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문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성령이 준다는 건데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한다는 것은 마귀가 그 몸을 지배하기 때문이라는 거야.

이러한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말씀을 자신들의 인식만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어.

그 시대의 최고 권력자라 할 수 있는 교황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모든 법이 정해졌으니 교황의 영적 수준이 그러한 악법을 만들어 낸 거라 할 수 있지 않겠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신부님 하나가 분연히 털고 일어났는데 바로 종교개혁을 주창하였던 마틴 루터 신부님이었던 거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교황이 면죄부를 발매하자 젊은 신부였던 루터가 강하게 반발을 한 거지.

아마도 교황은 자신의 직위가 하나님이 허락하셨기에 된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어.

그러다보니 하나님이 자신에게 면죄부의 권한을 당연지사로 주실 것이라 믿었던 것인데 루터가 이러한 말도 되지 않는 행위에 제동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성경어디에도 그러한 말은 없었기 때문이야.

오랜 수도사 생활을 했던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부패한 가톨릭에 반기를 든 것이었지만 실상은 성경의 또 다른 해석 탓이었다고 생각해.

왜 그러냐하면 루터가 탈 가톨릭을 외친 후 만들어진 개혁교회 역시 수많은 종파가 생겨났기 때문이거든.

만약 단순하게 루터가 가톨릭에 반기를 들어서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정석을 주장했다고 한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교의 분파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겠어?

하지만 현실을 살펴보면 수없이 많은 종파가 생겨났고 오늘날까지도 만들어지고 있어.

그리고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제2의 개혁이 일어나야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일어나고 있기도 하고…….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까지도 성경에 대한 해석은 진화의 과정을 겪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 거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이 잘못되었고 개혁교회가 진화의 정점에 있다는 말은 아니니 괜한 오해는 말았으면 해.

부패한 과거의 가톨릭과는 별도로 그들 또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맥을 이어왔고 가톨릭을 통해서도 수없이 많은 성인들이 탄생하였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어.

오늘날 성령의 은혜가 가톨릭에서도 수없이 나타나는 만큼 절대 그들이 잘못되었고 개혁교회의 교리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리라 여겨져.

그런데 말이야.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은 그토록 심하게 그리스도 교인들을 탄압하던 로마가 결국 전체 예수교를 대표하는 메카가 되었다는 거지.

오늘날 바티칸이 이탈리아 로마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하지 않니?

이 같은 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과응보의 법칙이 확연하게 보이는데 과거 전생 가장 박해를 심하게 가하던 사람들이 오늘날 가장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일수 있음이 보여.

지금 길거리에서 목청껏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시는 분들이 전생에는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지 않겠냐는 거야.

물론 이 같은 내말은 전생을 인정하는 인식에 국한된 시각이긴 하지만 그들이 알건 모르건 이 같은 일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으리라 여겨져.

왜냐하면 성경에도 이러한 구절이 있거든.

 

심은 대로 거두리라

 

이렇게 놓고 본다면 누군가 어떠한 종교를 믿고 어떠한 단체에 속해져 믿음의 생활을 하던지 우리들은 심판의 저울대를 내려놓을 수가 있지 않겠어?

 

! 저들은 누군가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하는구나!”

 

어때?

아주 간단하게 심판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었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면 초기 기독교가 심하게 박해를 당하며 수많은 순교자들을 만들어 냄으로서 몰락을 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들어내게 되었으며 급기야 박해를 가하던 주체들까지도 크리스천으로 변해갔어.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확인되어 질 수 있는데 만 명이 넘는 순교자를 만들어낸 한반도 땅에 오늘날 교회를 알리는 십자가가 넘쳐나게 된 것이 바로 그러한 과거의 반영(反映)이 아니겠냐는 거야.

6.25가 일어난 1950년 전만 하더라도 평양이 서울보다 교회가 더 많았다고 하니 그야말로 한반도전체가 그리스도의 구원의피로서 도배가 되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번창 속에 인간들의 신을 향한 노력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각가지의 인식 속에서 다양한 삶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봉사만이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오로지 기도로서 하나님과 통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거든.

몰론 여기에서도 또다시 여러 갈래로 갈리는 봉사와 헌신의 자세와 기도의 종류들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순전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타인들을 위한 봉사와 헌신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해.

또 기도의 종류도 다양하게 인식되어지는데 입으로서 큰소리로 외치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하는 것, 또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기도로 생각하는 인식들도 있어.

이러한 모든 인식들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연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고 있으며 크게 나누어진 여러 갈래의 길속에서도 또다시 정도에 따라 신앙심이 달라지며 인식정도역시 달라지고 있는데 타인들을 향한 봉사의 경우에도 자신을 먼저 돌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조차 돌보지 않고 온몸을 다 바쳐 희생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물론 이 같은 일은 타종교라고 해서 별다르지 않아.

외형이 달라 보인다 하더라도 구조와 기능면에서는 동일 할 수밖에 없어.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든 일들 안에는 메커니즘의 작용방식이 담겨져 있는 거지.

어떠한 일도 이와 같은 방식을 벗어날 수는 없는데 신의식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까지도 이와 같은 범주 안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야.

이 같은 내말을 부정하기위해 온갖 종교적인 지식을 동원할 필요도 없어.

내말을 부정함으로서 그들이 살아가야하는 삶이 바로 이러한 내말을 증명하고 있거든.

성경말씀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만큼 인식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스스로가 살아왔던 삶의 배경 탓이겠지만 그러한 배경을 만든 것도 결국 자신일수밖에 없지 않겠어?

이러한 이유로 물리적인 힘이 가해져야 작동하는 기계와 같이 내가 어떠한 원인을 제공하였기에 지금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 할 수 있어.

내가 지금껏 남들을 심판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연유였는데 자신이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남들을 심판하지 말아야하기 때문이야.

이것을 깊이 있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가 있는데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은 심판을 하시는 분이라 규정을 지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도 심판을 받아야하지 않겠어?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거든.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모두 사해놓았다고 하며 이 같은 사실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

사람들이 이 같은 일을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을 가는 것이지 절대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옥 가기를 원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거야.

정말 이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우리들의 죄를 면해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인정을 한 후 죄를 짓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겠어?

바로 이러한 모순점을 극복하기위해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공의로운 하나님인거지.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지만 공의로운 하나님은 죄를 짓는 인간들을 위해 사랑의 매를 든다는 거야.

여기서도 한 가지 모순점이 보이는데 미래 죄까지도 사해놓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분명 목사님이셨거든.

그렇다면 구원을 받고난 우리들이 죄를 지을 경우 매를 든다는 것은 미래 죄를 모두 용서해 놓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거지.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들과 내가 성경을 달리보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 되는데 왜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성경의 하나님을 영으로서 인식하느냐 인격체로 인식하느냐의 차이 때문이야.

내가 그들이 자신들 안에 내재한 하나님, 즉 성령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단언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해.

물론 이것은 자신들이 성령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좀 더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하나님의 참된 모습은 아니라는 말도 되는 것이고…….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틀리다고 못하는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이 모든 죄를 사해놓았다는 말은 그야말로 사실일수가 있거든.

하나님은 분명 모든 죄를 사해놓았지만 죄를 짓거나 심판을 내리는 것은 바로 인간들의 몫인 거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죄에 대한 어떠한 판단기준을 갖지 않았다는 말도 되는 거야.

이와 같은 말이 성경에도 나오거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은 인간들의 판단과는 다르다고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목사님이 말씀해놓고 심판의 하나님을 만든 것도 바로 목사님 자신이라는 것을 기가 막히게도 목사님이 모르고 있더라는 거야.

우리들이 아무리 지혜롭게 판단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기준은 아니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우리들의 시각으로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 되며 죄의식이라는 것은 육신을 가진 우리들에게 적용될 말일뿐 영원의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것은 아니라는 말인 거지.

이러한 이유로 죄에 대한 심판도 인간들의 몫이며 결코 하나님의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되는데 이러한 내말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지옥을 말해놓았을까요 하고 물어올 것이 분명해.

앞서 몇 번이나 강조를 했듯이 지옥이란 진정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마음이 만드는 곳으로 지옥이 있다고 믿는 자들의 것이거든.

지옥이 없으면 안 된다고 굳세게 믿는 이들을 위해서 반드시 지옥은 존재를 해야만 하는데 그들이 지옥의 벽을 허물 때까지 지옥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물론 이와 같은 인식은 내 개인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인식하는바에 의하면 지옥과 천국은 물론 우리들안에 하나님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며 크게도 작게도 만드는 이는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거든.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연극무대에 우리들이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울고 웃고 떠들어대며 아우성을 치는 거지.

하나님에 대해 말하거나 성경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이들의 말을 진실 되다 믿는 것은 우리들이기에 진리는 우리들 안에서 살아 날수도 죽을 수도 있는 거야.

그런 의미로 보자면 목사님이야말로 어쩌면 이 시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을 때가 많아.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인데 그들로서는 영적인 해석보다는 보다 육신적인 해석이 필요하거든.

내가 성경을 해석하다가 중단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기도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처음 내가 성경을 들여다보게 된 이유가 인터넷 여행을 하다 마주친 교인들 때문이었어.

모두들 하나같이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며 다른 종교인들은 모두가 지옥을 가야한다 말하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거야.

그래서 그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꾸어주어야겠다 시작한 성경해석이었는데 열왕기에 접어들면서 포기를 해야 했어.

가장 큰 이유가 중국에서의 생활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성경의 말씀이 어떠한 시각으로 보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어.

처음 내가 성경을 보았을 때는 그저 글자그대로를 보았는데 집중을 하며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전체적인 성경의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점점 더 깊이 성경의 속 그림 속에 빨려들어 갔던 거야.

어느새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온 길들은 내인생길이 되어있었고 그 같은 일을 통해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진정한 목적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성경전체가 수행의 가르침을 담은 지침서라는 사실을 알았던 거지.

내가 그저 이렇게 말을 하니 실감이 나지 않지?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한 구절을 살펴볼까?

 

혹이 솔로몬 왕에게 고하되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곁에 있나이다. 솔로몬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며 가로되 너는 가서 저를 치라”(왕상2:29)

 

솔로몬은 평강또는 평화라는 말이고 요압은 혼란, 혼돈이라는 뜻이야.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이 구절은 우리들의 내면세계를 말하고 있다는 내말이 사실이 되는 거지.

그리스도 의식이 깨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에 평화를 가져와야하는데 혼란스러운 마음을 쳐부수어야 된다는 것이 아니겠어.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말이야.

성경도 참으로 가지가지라는 사실을 이번기회에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 했어.

내가 말한 이 구절이 개역한글에서 발췌한 구절인데 공동번역이나 개역개정판에는 달리 기록되어있거든.

그래서 영어로 된 성경을 보았더니 거기에도 기록된바가 달랐어.

NIV, KJV, NASV, 가 모두 달랐던 거야.

한토시도 고치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변형을 시키고 있다는 말인데 이렇게 놓고 본다면 과거 성경이 처음 만들어질 때도 얼마든지 사람들의 입김이 작용을 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니겠어?

이러하기에 성경번역은 히브리어로 봐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여기에도 문제점은 있었어.

왜냐하면 히브리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는 말로서 그들의 언어습관에 따르면 말하는 것과 기록하는 말이 다르기 때문이야.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된 것을 보고 있는 것이거든.

정말 제대로 된 원전은 아니라는 말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말도 되는 거지.

그들이 동족인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어.

물론 나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조차도 믿고 있지만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만큼은 지금의 기독교인들과는 천양지차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인거야.

눈귀가 밝은이들은 이미 너와의 대화에서 많은 것을 얻었겠지만 아직도 환상에 사로잡혀있고 싶은 영혼들은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해.

지금 한국의 어느 한곳에서는 히브리어로 된 성경말씀을 열심히 번역하고 있는데 조만간 세상에 나오게 될 거야.

내가 처음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들은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와는 다른 종파의 사람들이거든.

그중에서도 여자목사님 한분은 기도 중에 빛을 체험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이 빛이요 영이시라는 사실을 확인 하신분이야.

그분과 대화를 나누어보면 확실하게 우리들은 통하는 데가 있어.

물론 그분과의 대화에서도 차이점은 있지만 그래도 성경이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수행지침서 라고 하는 데는 인식을 같이해.

누구처럼 요한계시록이 세상의 멸망을 말해 놓은 거라 여기지는 않는다는 거지.

이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창세기 1장에 이미 모든 수행의 방법을 말해놓았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척 궁금하지?

그렇다면 약간만 맛보기로 말해볼까?

언젠가 내가 중국에서 쓴 시중에 밤하늘을 보니 라는 시가 있는데 바로 이러한 시처럼 해와 달과 별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깨달음을 얻도록 만들어 놓은 거라는 거야.

달과 해가 지구를 중심으로 서로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육적인면과 영적인면을 묘사해 놓은 거라는 거지.

해가 우리 내면의 하나님이면 달은 인간의 육신을 말하는 것인데 깨달음을 얻고 완성을 이룬 자들은 밤하늘에 별이 된다는 말이거든.

성경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우리들 마음의 혼란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며 수행의 여러 단계를 묘사해 놓은 거라 할 수 있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질 때마다 인식의 장이 열리어 가는데 육의 속성이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거야.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반복된 생을 살아가는 궁극적 목적이기도 한데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여행의 종착지가 아닐까해.

너와 나는 이미 내면의 신이 말해주었기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성경을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굉장히 놀라워하게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성경의 핵심이자 숨겨진 비밀이라 할 수 있거든.

앞서 내가 말해주었듯이 수행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은 진정 사실인데 정말 높은 법문은 너무나 간단한 거야.

그래서 성경의 어떠한 대목을 보아도 하나 같이 같은 법문으로 보이게 마련인거지.

그저 반복과 반복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러한 사실이 보일 때까지는 수없는 윤회의 과정을 겪어야해.

성경이 말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며 진정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든 목적이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어.

이 기회에 너에게 한마디 해줄 말이 있는데 말이야.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세상의 멸망이 곧바로 닥친다는 말은 그 사람들의 인식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말이거든.

성경이나 그밖에 많은 수행서 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인식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거지.

모든 수행서 에서 말하는 멸망이란 육이 무너짐을 말하는 것이고 부활이란 들어 올림을 뜻하는 휴거가 아니라 육의 속성이 온전히 죽음으로서 영이 드러남을 뜻하는 거야.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한사람의 수행자가 구도의 과정을 겪어나가는 동안 겪는 많은 일을 묘사해놓은 동시에 그 안에 최고의 상승법문을 심어놓았어.

사실 이것은 어느 경전 어떠한 수행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심지어 유행가 가사 속에도 엄청난 상승법문이 들어있거든.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네가 그러한 법문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게 되면 세상 어떠한 것, 어떠한 곳, 어떠한 때에도 그러한 상승법문이 보이게 되어 있어.

아들아!

나는 말이야.

이미 내재한 신을 보았고 수없이 많은 체험을 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상을 게을리 하지 않거든.

물론 명상의 방식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늘 신을 생각하며 신이라면 함직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려 노력을 해.

과거에는 모든 시간을 들여 명상을 했지만 이제는 모든 생각을 들여서 명상을 하고 있어.

내가 육적인면을 등한시하고 영적인 면에 몰입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영이 깨어났기 때문이라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렇지 않아.

앞에서도 몇 번에 걸쳐 말해주었듯이 내육신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없는 몸뚱이에 불과하거든.

세상의 누구보다도 가진 것이 없으며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

이런 내 육신은 누구보다도 더 나은 면이라고는 없지만 그 육신 안에 영을 머물게 하는 것은 영이 아니라 내육신이거든.

영이란 원래가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인 만큼 그 영을 내안에 머물게 하는 것은 바로 육신을 가진 우리들 자신들이라는 말이야.

자신을 구할 이는 자신밖에 없으며 내재한 하나님은 우리들 내면 안에서 숨 쉬고 있으며 그 신은 우리가 육적인 면을 걷어 내었을 때 빛으로서 나타날 것 이라는 거지.

끝으로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어.

누군가 육신을 개발하여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하며 좀 더 겸손해지길 바라.

무엇인가 물질적으로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이 그다지 반길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육신을 개발하는 일보다는 영을 개발시키는 쪽으로 나가는 것이 자신에게 많은 이익이 있을 거야.

두뇌개발을 해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더라도 육신을 가졌을 때뿐이라는 사실을 성경속의 솔로몬은 보여주거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자신에게 멸망의 시간이 닥치기 전까지 부디 시간낭비하지 말고 쉼 없는 정진을 하기바라며 여기에서 작별을 하자꾸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