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상대성(相對性).
사랑이 상대성이라 말하면 이해를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변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것 같기는 하지만 뭔가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질 때 처음에는 보는 것으로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한눈에 끌려서 사랑을 시작하지요.
그런데 사귀다보면 실망하여 돌아서기도 하고 사랑에 빠져 결혼해서 살다가 이혼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내가 반응하는 것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랑이 주기만 하는 것이라 할 때 이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내가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랑을 않겠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만약 이것이 진리가 된다면 헤어질 사람은 어디에서 없고 만남자체도 없을지 모릅니다.
사랑의 정의를 만나기 시작하고부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사귀면서 사랑이 생성 된다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혼에 골인 하는 것이 사랑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이혼을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이럴 경우 이 사람은 사랑을 한 걸까요 아닐까요.
사랑의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첫눈에 반하는 것이 사랑이라 정의를 내린다면 중간에 헤어지게 되면 그 사랑은 거짓일까요 참일까요.
한번 사랑에 빠지면 영원해야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다 헤어진다 해서 그동안 사랑했던 것이 거짓인 것도 아닙니다.
그 순간만큼은 절실했고 진심어린 사랑을 했던 겁니다.
다만 사랑이 식어버린 것이고 사랑이 옮겨간 것에 불과합니다.
아마도 이런 내말에 동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만 생각을 달리해볼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많이 경험해본 사람이 있다 치고 처음경험해본 사람이 있다고 설정해 보자는 거지요.
유경험자의 노련함에 반한 초보사랑꾼은 진실한 사랑에 목말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도 사랑을 못해보았으니 당연히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은 주기만 하는 것이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는 숭고한 사랑을 꿈꾸었을 가능성이 있지요.
반면에 유경험자는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했으니 일반인들보다 더 많은 배려 심과 이해심을 갖추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다보니 초보사랑꾼은 반해서 사랑을 시작하게 될 겁니다.
이럴 경우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만약 초보사랑꾼이 유경험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이자체로 모순이 있습니다.
유경험자는 이미 초보자의 기준에 미달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주기만 하고 상대방의 행위에 관계없이 한결같아야 한다면 유경험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랑을 경험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을 중간에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초보자가 유경험자를 사랑했다는 것은 그만큼 경험자의 노련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의 중단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봐야 하는 겁니다.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뭔가를 알았기 때문에 노련함이 생긴 거지요.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일어났던 갈등과 번민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번뇌가 보리라했으니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많은 일을 겪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볼 때 유경험자는 사랑에 대한 환상이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몇 번이나 경험해본결과 사랑은 순간에 불과하며 옮겨가기도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겁니다.
만약 경험자가 이러한 사랑의 실패를 통해 자각의 순간을 맞이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면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까지 알게 됩니다.
옮겨가봐야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오고감을 순리에 맡기게 되지요.
반면에 초보자는 사랑은 주기만 해야 한다 여기다보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몇 번이나 경험해야 생길 일을 단번에 해낸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사랑을 에로스적인 사랑과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구분하지요.
육신의 사랑과 정신적 사랑을 이렇게 나누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둘이 아닙니다.
육과 영을 분리시키면 둘이지만 한 몸에서 합일이 된다면 하나나 다름없습니다.
이럴 경우 우리가 하는 사랑은 신의 사랑이 되며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씩은 상대를 향해 헌신적인 사랑을 하거나 죽음도 불사하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이런 일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누군가 한사람을 사랑해서 일방적으로 희생만 하는 것이 진실 된 사랑인지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지를 생각해봐야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엄마와 자식이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건지겠냐는 화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랑을 함에 있어서 일방적으로 주기만 할 경우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좋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만약 육적 사랑을 통해 영적 완성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한다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넘어지고 깨어지며 성장하는 것과 같이 번뇌와 갈등을 통해 영적각성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조차 이런 과정을 격어야 하는데 수행자가 사랑을 한다면 몇 배나 치열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번뇌는 보리이지요.
그래서 내 주변을 돌아보면 어디에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채식식당 안에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치의원에서나 공장에서도, 또한 공사현장에서도 끊임없이 사랑의 전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모두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인만큼 열심히 아파하고 전쟁해야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아프다면 일순간 놓아버리면 됩니다.
순간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가했던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바로 깨달을 겁니다.
이때부터가 진정한 사랑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4~7절)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이 추구해야할 목적지이며 신의 속성을 뜻하는 겁니다.
겉보기에는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래야한다 여길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하나의 권유의 말씀이지요.
참아야할 일이 생기거나 온유해야하며 투기해야할 일이 생겼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화를 낼 일이 생겨도 참거나 불의한일을 통해 이익을 얻지 말라는 말이며 진리를 따르라는 겁니다.
만약 사람이 하는 사랑이 완전하다면 이런 말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진아(영혼)를 깨달을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말이지요.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공히 경험하게 됩니다.
다만 상대방이 원할경우 언제든지 들 수도 내려놓을 수도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