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번드 2022. 8. 9.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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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요즘 성경말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루하지나 않은지 모르겠구나.

간혹 이러한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묻는 말이 있는데 뭣 하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이러한 일을 하는가 하거든.

그럴 때 마다 내면에서 메아리처럼 들리는 말이 있어.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있듯이 너 역시 삶의 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뿐이다.

네가 사는 동안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진솔하게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네가 살아가는 이유이며 신이 네게 준 사명이기도하다.

 

이러한 내면의 울림에 대해 지금과 같은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가 물어보지만 한결같은 대답이 돌아올 뿐이야.

 

물론 네가 거부를 하고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해본 삶은 더 이상 너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만약 네가 지나온 과거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더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러할 수 있겠지만 네가 가장 원하는 삶이란 지금 네 앞에 다가와 있는 현재의 삶이다.

 

늘 이러하기에 오늘도 특별히 나에게 다가온 시간의 여유를 성경말씀과 함께 하려고해.

요즘 이상하게도 특별휴가가 자주 주어지는데 아마도 신은 나에게 성경말씀을 상고하라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 같거든.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지나간 시간을 종합해서 살펴볼까해.

아무래도 신과의 대화도중 놓친 부분도 있는 것 같고 좀 더 성경을 심도 있게 파헤쳐 봄으로서 하나님께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 갈수도 있을 것 같아.

성경의 많은 구절들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현시대의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 같은 현상이 시대가 달라져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장막으로도 볼 수 있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기위해서 건너야만 하는 강과 같은 거지.

이것은 각자가 깨달음을 얻는 정도에 따라 열려지는 문과도 같은데 오늘도 하나의 문을 여는 심정으로 성경을 살펴보자꾸나.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 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는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라 오해를 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침에 놀라더라.(23:22~33)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 말씀해 놓은 것이거든.

예수님은 절대 육신의 부활을 말하지 않았음이 본문에 나와 있어.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영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분명해.

이것이 바로 영혼은 성별이 없다는 말이야.

그리고 아주 중요한 말이 나오는데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이거든.

죽었을 때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말인 거지.

이것이 바로 영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놓은 것이며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하는지에 대해 설명해 놓은 말이기도 해.

 

그러고 보니 언젠가 스승님께서 동성애자들이 등급이 높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아마도 스승님은 영의 세계는 성별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했는데 철없는 동수들이 마치 동성애를 하는 것이 등급을 높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아닌가라는 착각을 한 것이군요.

참으로 못 말리는 중생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해주지 않았느냐?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에게 맞는 법문이 있고 어른들에게는 어른들에게 맞는 법문이 있다고 말이다.

예문에서도 보았듯이 예수가 하나님을 산자들의 하나님이라 말해놓은 이유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이 되어야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혼은 온 곳으로 돌아가니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될 터이고 더 이상 윤회도 하지 않을 것이며 누군가를 섬기거나 숭배를 하는 행위가 필요 없을 것이 분명하지만 육신은 아직도 자신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래서 살아생전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이라 말을 했던 예수의 말은 사실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육신을 버리게 되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을 하였기에 자신이 하나님이라 말을 했던 것이지.

 

그러고 보면 아직도 윤회를 한다고 믿고 있으며 천국을 간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봐야겠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좀 더 여행을 지속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 또한 나쁜 것은 아니다.

사는 동안 너희가 얼마나 폭넓은 인식을 갖는가 하는 것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인식하고 있으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인가요?

 

그것은 나에게 묻기보다 너희자신에게 물어야한다.

문제는 내가 너희에게 그러한 것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얼마나 그 같은 사실에 근접한 인식을 갖추는가 하는 것이다.

너희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아직도 너희는 심판하는 하나님이 필요하며 사랑하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느냐?

아직도 너희는 선악을 구분 짓고 성별을 구분 짓고 있으며 죄와 벌을 나누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모든 이원성들을 하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한 치의 양보 없이 내 것만을 주장하고 있음조차 자각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너희가 하나님과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

 

과거에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누군가 높은 세계를 갔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어서 내려왔다고 했는데 바로 그 말씀인 것 같군요.

자신의 인식정도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높은 천국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었지요.

그러고 보면 높은 천국을 가는 것보다 자신에게 맞는 천국을 가야 할 것 같아요.

 

너희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자신이 사는 동안 받아들이고 행위를 하는 모든 것들이 앞날을 결정짓고 있으며 지옥과 천국의 향방을 선택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말씀하시길 우리는 연극을 하고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만 이곳에서 이러한 판단과 저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을 뿐 죽게 되면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셨고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같은 사실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평상시 너희들의 인식이 중요하다.

그러한 인식이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 학습에서 생기는 것인데 너희가 윤회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는 지금 내가 너를 통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수없이 반복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 너희가 이원성으로부터 탈피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아직도 너는 윤회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성경말씀이 단하나의 인식세계를 말씀하셨다는 것은 오해라고 봐야겠군요.

 

그 또한 너희자신에게 달린 일이다.

각자가 성경을 이렇다고 여기게 되면 그에게는 성경이 단하나의 인식세계를 그려 놓은 책이 될 것이고 예수처럼 높은 인식을 갖춘 존재에게는 단하나의 인식세계가 수천가지 세계와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맞아요.

제가 처음 성경을 접했을 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이 무척 달라진 것 같아요.

인식이 많이 달라진 거지요.

사는 동안 성경이 말도 되지 않다 여기며 심하게 부정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야말로 대단한 진리의 말씀을 기록해놓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것이 바로 이세상이 존재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네가 지금과 같은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누군가 멸망을 해버려야 마땅하다는 세상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인데 지옥과 같은 세상이 필요한 것은 천국을 가기위한 사람들에게는 필수조건임을 알아야 멸망을 바라는 어리 섞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천국이 아직 저 하늘에 있으며 이세상이 아직 지옥같이 여겨진다면 아직은 완전치 않은 상태라는 말이며 좀 더 인식을 넓힐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 스스로 인식하고 니고데모의 겸손을 본받아야한다.

너희는 아직도 성경에 숨겨진 진실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진리를 만들어 가지도 못하고 있다.

 

그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어리 섞은 저희들로서는 뭔가 본보기가 필요하거든요.

 

너는 지금 말을 잘못하고 있다.

내가 말을 하기 위해서는 너희가 본보기를 제시해야한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삶들이 본보기인데 누구의 삶인들 본보기가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다시 말씀드리지요.

성경에 보면 많은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 인물들은 모두가 이름을 가지고 있고요.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며 원래 아브람이었는데 뜻은 아버지는 높임을 받는다.” 이지요.

이삭의 뜻은 웃음이며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인데 훗날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시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말이더군요.

그리고 노아의 뜻은 휴식이라는 말이었는데 여기에는 분명히 뭔가의 비밀이 담겨져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너는 무엇인가를 발견하였겠구나.

 

그렇긴 하지만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두렵거든요.

 

너는 아직도 내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세상의 모든 일들에는 숨겨진 진실이라는 것이 있고 그 숨겨진 진실이라는 것은 네가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 성경해석이 진실일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너는 지금껏 무엇을 배웠느냐?

네 주변을 둘러보아라.

자신들 고유의 성경해석을 저마다 진리라고 열심히 소리 높여 외치고 있지 않느냐?

그들로부터 네가 배우기도 하고 네가 하는 성경해석을 누군가 배우기도하면서 성장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세상이며 이러한 방식이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인데 그것이 너희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기도하다.

하나님이 너희를 만들었고 너희 안에서 살고 있으며 너희가 하나님을 살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결코 둘이 아니며 나누어질 수도 분리될 수도 없지만 그 같은 일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조차 너희에게 달렸다.

어떠한 두려움도 가질 필요 없이 네가 느끼는 대로 말하라.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된 것은 오늘날의 국제정세를 보면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아요.

이슬람국가들이나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들의 공통조상이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이삭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뜻이 웃음이라는 사실이 아주 재미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주 깊은 뜻이 담겨져 있더라고요.

웃음이란 자신이 기쁘거나 행복할 때 나오는 것인데 아비인 아브라함이 자신을 묶어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도 복종했던 이삭은 그야말로 하나님께 완전한 복종을 했던 것이었지요.

이것을 그냥 글자대로 해석을 하게 되면 아브라함은 비정한 아비가 되고 말지만 거기에 담겨진 뜻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 것이었어요.

달리표현하면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웃음이 나오게 된다는 말이 되기도 하구요.

 

그 외에는 무엇이 있더냐?

 

또 하나는 야곱의 이름에 있는데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는 자였거든요.

쌍둥이 형인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 했는데 훗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바꾸어주셨지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보살핀다는 말과도 상통하는 말이기도 했어요.

스스로 하나님의 지배를 원한다는 것은 온전하게 맡긴다는 말과 마찬가지로서 상대방에게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기도 하거든요.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바로 이래서 생긴 것이고요.

처음에는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한 사실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생각되었고 나중에는 성경의 하나님이 외계의 존재라는 생각에 이르더군요.

그러나 최근에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는데 상당히 좋은 비유를 하셨어요.

하나님과 겨루어서 반드시 축복을 받아내고야 말았던 야곱을 신앙심이 대단한 사람으로 말씀하셨던 거지요.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야곱이 에서와 벌린 장자 권리 쟁탈전은 그야말로 야비한 짓이었거든요.

자신의 외삼촌에게 받을 것을 돌려받기 위해 지혜를 발휘한 것은 이해를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친형인 에서에게서 장자의 권리를 뺏은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어요.

 

그것은 절대 그렇게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같은 일이 일어난 데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먼저 야곱의 엄마인 리브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가 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5:22~23)

 

게다가 에서는 자신의 장자 권을 야곱에게 팔았지 않느냐?

스스로 장자의 권한을 포기했음을 알아야한다.

 

그러하다면 성경은 미래상을 정해 놓고 그려가고 있다는 말이 사실이 되지 않습니까?

불변의 진리를 말해놓았지 않는가 하는 말이지요.

 

그 또한 그렇게만 여겨서는 곤란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한데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요즘 과학은 태중에 쌍둥이가 만들어질 때 세상을 먼저 나오는 이보다 나중에 나오는 이가 먼저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느냐?

은밀히 따지면 동생이 형이 된다는 말인데 이러한 경우라면 성경에 기록된 말은 거짓이 되고 만다.

 

그런 것 같아요.

목사님은 이 구절을 보면서 현재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국들의 전쟁을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사실을 보자면 그 또한 맞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들은 전쟁을 멈추고 있지 않으며 절대 섬기지 않고 있으니 옳은 비유는 아닌 것 같아요.

따라서 그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하나님이 정해주신 장자 권을 판일) 우상숭배를 경계하는 말씀(이방인과 결혼을 한일)을 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참으로 좋은 해석이다.

그러기에 너희는 성경을 상고할 필요가 있으며 좀 더 좋은 해석을 하라는 거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노아의 방주가 생각이 났습니다.

노아라는 이름이 휴식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었는데 노아의 방주는 우리삶속의 피난처를 말한 것으로 깨달음을 상징하는 피안이라 해석이 되었어요.

성경을 통해 구원을 얻고 깨달음을 얻게 되면 세상이 멸망을 해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도 되고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멸망을 말해놓았다는 것은 우리 육신이 죽게 되는 것을 말해놓은 것으로도 볼 수 있고 전쟁과 같은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하게 되면 안전하다는 말을 비유해 놓은 것으로도 해석이 되었던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한 가지는 노아의 족보상 문제였어요.

창세기 5장을 보게 되면 노아가 태어날 때까지의 순서가 나열되고 있는데 그것을 보면 노아의 방주사건이 실제로 있었다기보다 비유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고요.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969세에 죽었으며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고 777세에 죽었지요.

그러니까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을 당시 187세에다 라멕이 노아를 낳은 182년을 더하면 369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이러한 숫자를 므두셀라가 죽었던 969에다 빼보면 600이라는 숫자가 나오지요.

그러니까 노아가 600살이 될 때까지 므두셀라가 살아있었다는 말이 되고요.

창세기 7장에 보면 날짜까지 말하면서 방주사건이 사실이었음을 묘사하고 있는데 노아의 나이가 그때에 6백 살이었음도 밝히고 있거든요.

하지만 성경어디에도 므두셀라가 살아있었다는 말은 없었고 단지 노아의 세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만 있었으니 내말은 분명히 사실일겁니다.

아니면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성경을 만들 때 오류가 있었을 수도 있고요.

 

네가 성경을 하나의 수행서 라고 말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이냐?

 

그 이유 또한 창세기 6장에 나옵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6:1~4)

 

이 말씀은 노아의 방주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인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길 인간들의 수명이 백이십년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하지만 노아는 950까지 살았으니 홍수가 일어나고도 350년간이나 더 살았던 셈이지요.

홍수전에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던 물 층이 자외선을 막아주어서 온실효과 때문에 수명이 길었다 하더라도 홍수이후에는 물 층이 사라졌으니 수명이 줄어들어야 마땅하거든요.

이래서 노아의 방주사건은 실재한다 해도 부분적인 일이고 비유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거지요.

 

우선 당장 너에게 말해줄 것은 성경의 일들이 일어났던 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네가 성경을 볼 때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본다면 너는 얼마든지 부정적이고 비사실적이며 비현실적인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네가 따르는 스승에게도 적용이 될 말로서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게 되면 내일이라도 당장 단체를 벗어나야겠지만 그 모든 것으로부터 얻어야할 것은 긍정적인 면들이며 너의 영적인 성장이고 경험 치라 할 수 있다.

 

참으로 그러한 것 같습니다.

부디 오늘 제가 한 성경의 해석이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이용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비록 그들이 부정적인 목적으로 네 글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긍정을 창출해 내기 마련이다.

모든 생명들에게는 영을 사모하는 마음이 심어져 있기에 결국에는 한곳으로 귀결이 될 것이다.

이미 우리들 대화에 참여한다는 자체만으로 그들은 이 같은 말을 받아들일 만큼의 성숙한 영혼들이라 할 수 있다.

 

아쉽지만 오늘도 약속된 시간이 다되었군요.

다음시간에 또 다른 주제로 만나길 기대하면서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