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1.
반갑습니다.
나 홀로 목사의 성경연구시간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마가복음 강해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나 명상을 어떤 방법으로 하시는지요?
아마도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하겠지만 나 홀로목사는 기도와 명상은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신과 만나는 것을 진정한 명상이라 볼 때 눈을 감은 채 입으로 바라고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말하는 것도 명상이라 할 수 있지요.
물론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도 명상이라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일 역시 기도라 할 수 있으니 이 모두는 명상이라 해도 좋고 기도라 해도 무방하리라 여겨집니다.
또한 불가에서 말하는 좌선(坐禪)역시 명상의 일종이며 기도의 한 가지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 홀로목사는 늘 좌선을 즐겨하고 있는데 오늘은 좌선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합니다.
과거 불교공부에 심취(心醉)해 있을 때 육조 혜능께서 좌선에 대해 말씀하시길, 좌란 밖으로 혼란스러움을 잠재우고 앉는 것이 좌요 선이란 남의 잘못을 보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보는 것이라 했지요.
그래서 나 홀로목사는 늘 스스로의 잘못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남의 잘못을 볼 때마다 그것이 내 잘못이라 여겨지기에 따로 잘못된 일을 살펴볼 필요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여기에 대해 제대로 인식을 못하실 것 같으니 예를 한 가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요.
누군가 쓰레기를 집 앞에 투척했는데 최근에 구입한 오토바이가 음식물쓰레기를 뒤집어썼던 겁니다.
처음엔 화가 났지만 곧바로 나 자신의 잘못을 급하게 뉘우쳐야했습니다.
무언가 잘못한일이 있었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일 까지 떠올리면서 반성했고 나 자신도 모르게 잘못을 저지른데 대한 용서를 구해야만했습니다.
이른 새벽에 오토바이를 세차하면서 반성하고 또 반성했습니다.
누가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내 잘못이 씻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음식물쓰레기를 씻어냈으며 그날 종일토록 용서를 구했지요.
나 홀로목사가 평상시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눈에 비춰지는 남의 잘못들도 내안에 들어있음을 아는지라 이런 일이 생길 때면 늘 반성하고 뉘우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여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나 홀로목사는 이러한 일을 성경에 근거하여 아주 깊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성경에는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요.
그 내용처럼 나 홀로목사는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보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타인의 행위를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는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렇다할지라도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이러한 일은 불가피하기에 가끔씩 타인들의 행위를 비판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할 때 스스로의 잘못을 본다는 것을 인식하고 반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내 눈에 누군가의 잘못된 행위가 비춰진다는 것은 나 자신이 그 행위를 죄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反證)하는 것이기에 나 스스로를 용서 못하고 있다는 말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이해가 되셨나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분들이 몇 분 보이는군요.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하게되리라 말씀드리면서 좌선에 대한 이야기를 마쳐야겠습니다.
단시간에 이런 일을 완전히 소화시킬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이미 영생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는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인사말이 길었던 것 같으니 이제 이쯤에서 마가복음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막1:2)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막1:3)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1:4)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1:5)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막1:6)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막1:7)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1:8)
첫 장부터 아주 중요한 내용이 나오는군요.
그런데 우선적으로 문제점하나를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3절에 보면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라고 했는데 실은 말라기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이 어떤 것인지 말라기를 보고 넘어가야겠지요.
잠시 살펴보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3:1)
Behold, I will send my messenger, and he shall prepare the way before me: and the LORD, whom ye seek, shall suddenly come to his temple, even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 whom ye delight in: behold, he shall come, saith the LORD of hosts.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것이라(말3:2)
But who may abide the day of his coming? and who shall stand when he appeareth? for he is like a refiner's fire, and like fullers' soap:(KJB)
But who can endure the day of his coming? Who can stand when he appears? For he will be like a refiner's fire or a launderer's soap.(NIV)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말3:3)
And he shall sit as a refin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he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and purge them as gold and silver, that they may offer unto the LORD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말3:4)
Then shall the offering of Judah and Jerusalem be pleasant unto the LORD, as in the days of old, and as in former years.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말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And I will come near to you to judgment; and I will be a swift witness against the sorcerers, and against the adulterers, and against false swearers, and against those that oppress the hireling in his wages, the widow, and the fatherless, and that turn aside the stranger from his right, and fear not me, saith the LORD of hosts.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3:6)
For I am the LORD, I change not; therefore ye sons of Jacob are not consumed.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구약의 내용은 볼수록 기가 막힙니다.
이 내용인즉슨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1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길 사자를 보낸다했는데 이는 분명 성령이 임하게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하지요.
너희의 구하는 주(the LORD, whom ye seek)는 하나님이며 그전(his temple)이란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자(messenger)의 몸(육신은 성전)을 말하니 성령(하나님)이 사자의 몸에 임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언약의 사자(he messenger of the covenant)란 말입니다.
2절을 보게 되면 나 홀로목사의 이 같은 말이 옳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만약 이 내용이 어느 특정한 인물이 나타날 것을 예언한 거라고 한다면 이 내용은 맞지 않는 겁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수없이 많은 청중들이 설교를 듣기도하고 만나 뵙기도 하였으며 함께 식사를 한사람들까지 있었지요.
그런데도 2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 내용이 예수님처럼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일반적인 육신으로서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묘사해 놓은 것이며 육신을 자신의 본모습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번역본 두 개를 동시에 올린 것은 좀 더 사실감 있게 이 같은 내용을 음미하라는 뜻이니 각자가 영역본을 해석해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절에는 번역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단어refiner 와 purify를 연단(鍊鍛)이라 했는데 이는 분명 번역상의 오류로서 정제(精製)나 제련(製鍊)으로 바꾸어야합니다.
연단이란 단련시켜 단단하게 만든다는 말인데 이렇게 되면 레위사람들을 가르쳐서 깨끗하게 만든다는 말이 되겠지요.
이럴 경우 상당히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자가 레위사람들만 깨끗하게 만든다는 말이 돼 버리는 겁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올바른 성경해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번역이 되려면 단어선택을 달리해야하며 레위사람들에 관한일도 해석을 달리해야 마땅합니다.
레위사람들이란 하나님만 섬기기로 선택된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것을 성경에 관해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아는 내용이지요.
이런 사실을 적용해서 새롭게 번역해보면 이렇게 바뀝니다.
그는 은을 제련하는 자와 같이 앉아서 레위사람들(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깨끗케 하되 금은같이 그들을 정제하리니 그들이 의로움 속에서(they may offer unto the LORD an offering in righteousness)내게 봉헌하리라.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정의로운 것이 된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나 홀로목사의 해석은 유일한 정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해석해야 제대로 된다는 것을 이어지는 4절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때란 성령이 임하게 될 때를 말하는 것이며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 때를 말한다 할 수 있지요.
성령이 함께해야 그 옛날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과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곧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 처해지는 상황에 대해 5절에 기록해놓았습니다.
각자의 잘못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내용이 있습니다.
한글 성경 내용을 두 개 올렸는데 앞에 것은 개역한글판이고 뒤에 것은 개정개역판입니다.
이렇게 올린 이유는 개정개역판의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기위해서인데 단어 the sorcerers에 대한 해석이 점치는 자라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법사를 뜻하는 단어가 왜 점치는 자가 되어야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쓰인 단어the sorcerers는 눈속임을 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일 뿐 점치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점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명백히 잘못된 해석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에 언급해 보았습니다.
어찌되었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주어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절의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지요.
야곱의 자손들을 축복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 짓기 위해 말해놓은 것인데 야곱의 형인 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받은 자, 즉 믿지 않는 이들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으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변치 않는 사랑을 받는다는 말이니 곧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대해 약간만 조예(造詣)가 있어도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사실을 아실 겁니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인데 이는 정말 하나님과 싸웠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내면에서 성령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가복음1장2절에 기록된 말라기의 내용이 어떤 뜻이란 걸 알았으니 이제 3절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서(40:3)에 기록된 내용인데 잠시 보고 다시 돌아오지요.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40:1)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사40:2)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사40:3)
The voice of him that crieth in the wilderness, 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KJB)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in the wilderness a highway for our God.(NIV)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사40:4)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40:5)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사40:6)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사40:8)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40:9)
O Zion, that bringest good tidings, get thee up into the high mountain; O Jerusalem, that bringest good tidings, lift up thy voice with strength; lift it up, be not afraid; say unto the cities of Judah, Behold your God!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사40:10)
Behold, the Lord GOD will come with strong hand, and his arm shall rule for him: behold, his reward is with him, and his work before him.(KJV)
See, the Sovereign LORD comes with power, and his arm rules for him. See, his reward is with him, and his recompense accompanies him.(NIV)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11)
He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with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KJV)
He tends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gathers the lambs in his arms and carries them close to his heart; he gently leads those that have young.(NIV)
이미 마태복음 4편에서 언급이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또 다른 해석을 하기위해 관련 구절 외에 몇 구절 더 인용해보았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말하는 형태를 취해놓았는데 여기서 너희에 해당하는 이는 성령이 임하는, 영적스승들을 통칭하는 겁니다.
2절의 예루살렘은 구도자나 수행자들의 몸과 마음을 가리키며 성령이 임하는 순간 그들의 영적전쟁은 끝이 나고 (her warfare is accomplished) 모든 죄악은 용서받게 된다는 것을 말하라는 거지요.
그리고 3절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한 것은 외치는 사람에게 지시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위해 말해놓은 것으로서 외치는 사람은 성령이 임하는 사람이지만 말하는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절에서 모든 산들과 구릉들이 높낮이 없이 평탄해진다고 했는데 이는 분별심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 즉 만물동일체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는 순간 일어나는 일이기에 5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들이 보게 된다고 했으며 이모든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거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임한 사람(깨달음을 얻은 사람,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진배없다는 말이지요.
이제 6절을 보면 나 홀로목사가 말해온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한사람의 육신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듣는 이는 말하는 이, 즉 성령이 임한 영적스승이니 이렇게 문답식의 대화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서 자문자답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지 모르는지라 하나님께 무엇이라 말하면 사람이 자신을 믿게 될까하고 묻는 거지요.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꽃에 비유하여 말해주라 했습니다.
사람의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하나님의 숨결이 작용하기에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물질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성령,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을 설하라는 말입니다.
세월이 가고 육신은 늙어 스러지더라도 또다시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은 육신을 바꿔서 이어지며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을 말해주라는 거지요.
이렇게 말해주어도 믿지 않는 이들이 있는지라 9절과 같이 말해놓았습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복음을 전해주는데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크게 목소리를 높여 외치라했습니다.
여기서 높은 산에 오르라는 말은 자신이 서있는 위치를 높은 곳에 두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 지위가 높음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더욱 큰소리로 유다 성읍들에 이르기를 하나님을 보라했으니(say unto the cities of Judah, Behold your God)자신이 하나님이라 말하라는 겁니다.
시온, 예루살렘, 유다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즉 각자의 방법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가끔 사이비교주들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바로 이러한 구절 때문이지요.
그들이 이러한 내용을 알고서 말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자신이 하나님이라 말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 홀로목사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경지에 올랐다면 거기에 합당한 무엇인가가 주어질 것인데 괜히 관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같은 점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겠지만 이 같은 일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함께하는 이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10절의 내용을 보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이 주권자(the Sovereign LORD comes with power)가되며 하나님이 그의 행동을 좌우지 (his arm rules for him)한다했지요.
내용을 보건데 분명(NIV)를 번역한 것 같은데 (KJV)를 보면 아주 기가 막힌 내용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상이 그에게 주어지며(his reward is with him) 하나님의 일이 그 앞에 놓인다(his work before him)했지요.
그 사람의 행동에 따라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놓았는데 이는 분명 인과응보를 말해놓은 겁니다.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는 일이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면 그 일에 따른 무엇인가가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성령이 드러난 사람은 사람(구도자, 수행자)들을 어린양을 보살피듯 하며(He tends his flock like a shepherd) 그들을 하나님(성령)께로 인도(carries them close to his heart)한다했고 그들을 활기차게 만들어준다(he gently leads those that have young)했습니다.
한글성경에서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한다는 말은 양대 영역본 어디에도 없으며 잘못된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진아(眞我)인 영혼, 즉 성령이 머무는 곳은 심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장을 뜻하는 영어단어 HEART를 사랑을 표현할 때 쓰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자체임으로 성령이 심장에 머문다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심장으로 인도한다고 기록해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가가 인용한 이사야서를 대충 정리해보았는데 이모든 일들을 정리해보면 마가는 예수님을 드높이기기 위해 이 내용들을 인용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러한 내용들도 알고 보면 초보자들을 위해 아주 필요한일들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우리역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마가복음4절을 보면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했는데 이는 분명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사람이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던 거지요.(5절)
그리고 그가 에세네파였다는 것을 밝혀놓고 있습니다.(6절)
이어지는 7절과 8절은 예수님을 더 높이기 위해 세례자요한의 입을 통해 이 같은 말이 나왔음을 기록해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문으로 올린 마가복음 8절까지의 내용을 모두 살펴보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막1:9)
And it came to pass in those days, that Jesus came from Nazareth of Galilee, and was baptized of John in Jordan.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막1:10)
And straightway coming up out of the water, he saw the heavens opened, and the Spirit like a dove descending upon him: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1:11)
And there came a voice from heaven, saying, Thou art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갈릴리란 이방의 고장이니 예수님께서 그곳으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기록함으로 해서 이방인들조차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암시해놓았으며 예수님역시 일반인들과 다름없이 하나님의 법도를 따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9절)
또한 갈릴리의 뜻은 순환, 원, 지역 등이 있으며 나사렛의 뜻은 전파자이니 예수님께서 돌아온 전파자라는 뜻도 되지요.
이어지는 10절과 11절을 보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분명 예수님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으로서 타인들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만약 타인들이 이 같은 사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은 누구도 없었겠지만 아쉽게도 어느 누구도 이러한 현상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사실을 볼 때 믿음이란 무섭고도 경이로운 것입니다.
각 개인에게 있어 믿음이 없다면 성경의 내용은 무가치해지며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도 존재가치를 상실하며 이 세상을 비롯하여 온 우주조차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이 같은 말이 더욱 실감날 겁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12)
And immediately the spirit driveth him into the wilderness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13)
And he was there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tempted of Satan; and was with the wild beasts; and the angels ministered unto him.
믿음이 없다면 이 같은 말은 눈과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뿐더러 이치에도 합당하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기 무섭게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냈다는 것을 액면그대로 해석해서는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논리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마땅할까요?
나 홀로목사가 유추(類推)해 보건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난후 사막에서 40일 동안 묵상에 잠겨있으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부정성과 사투를 벌렸다고 생각됩니다.
이미 나 홀로목사가 여기에 대한 해석을 마태복음5편에 충분히 해놓았으니 참고하시고 여기에서는 또 다른 시각으로 보겠습니다.
광야(the wilderness)란 믿지 않는 마음이자 거친 세상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으며 들짐승이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믿음이 결여된 이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지요.
비록 예수님과 같이 성령이 드러난 이들이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고 있지만 일반인들과는 달리 천사들의 보호(the angels ministered unto him)를 받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성령과 함께하는 예수님과 같은 분들의 행동은 어떤 경우에도 성령의 이끌림으로 행해진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가복음 13절까지의 내용을 모두 살펴보았는데 첫 시간이라 진도보다는 내용에 충실하려 노력했습니다.
베드로의 제자로 알려진 마가의 눈에 비춰진 예수님의행적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무척 크다고 할 수 있으므로 앞으로의 시간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해보며 오늘의 시간을 여기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