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243)
아들아!
오늘은 최근에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려고 해.
지난2012년의 크리스마스 행사를 기점으로 나에게 전화한통이 걸려왔는데 대구공사현장에서 면접을 보러오라는 거야.
3년 공사인데 보수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작업조건들도 마음에 들었기에 다음날로 면접을 보러갔지.
시작해놓은 포두부 사업이 벌이가 시원치 않았고 투자를 할 수 있는 여유 돈도 없었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 타진을 해본결과 남의 돈으로 사업을 한다는 것이 신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외부에서 투자를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나 혼자 힘으로 사업을 해야겠다 싶었어.
포두부 사업을 동생에게 맡겨놓고서 안정된 수입원을 찾기 위해 취직을 했던 거지.
사실 이러한 사업을 시작하게 된 배경도 남의 이야기조차 신의 메시지로 여기는 평상시 내수행관 탓이기도 한데 누군가 나에게 말을 하면 그이야기를 그저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쯤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내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감정의 코드를 건드릴 경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었어.
포두부 사업이 시작된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일 때문이었는데 숲 해설가의 길을 걸어가려 결심을 하고 교육을 받으려고 가는 아침 걸려온 전화 한통이 나로 하여금 인생행로를 바꿔놓은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채식사업에 대한 의미부여가 더 이상 내 발목을 잡지는 못한다고 여기고 있었고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센터전반적인 일들이 단체와는 완전히 결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기도 했어.
그랬기 때문에 산지기로서 인생을 살아가리라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육을 받기위해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아침 일찍 전화가 걸려왔고 잠시만 만나고 난후 결정을 하라는 거였어.
솔직히 내키지 않았지만 워낙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지라 그들을 만났고 결국 이일이 나를 사회에 좀 더 묶어두는 역할을 하게 된 거지.
좀 더 소상하게 말하자면 명상단체에 조금 더 머물게 만들었다고 봐야해.
내가 이분들의 말씀에 의미부여를 했던 이유가 호주이민이 무산된 탓도 있었는데 뭔가 한국에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아마도 내가 해야만 하는 어떤 일이 없다고 한다면 호주의 이민행이 성공하였겠지만 안 될 이유가 없는 이민이 좌절되고 한국으로 돌아온 데는 무엇인가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게다가 몇 번인가 같은 비전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몸을 빠져나가던 내 영혼이 세 번씩이나 발목이 잡혀 돌아오는 체험을 하였고 함께 지내던 사저의 행동까지도 이상하게 바뀌고 있었던 거야.
중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입버릇처럼 나오고 나에게 이별을 요구하는 발언을 수시로 하기 시작했던 거지.
중국으로 돌아가 일 년이 넘게 있다가 온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는데 내가 사저와의 이별을 결심했던 가장 확실한 지점이 바로 이때쯤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내가 사저와 또다시 함께 지내게 된 이유를 사저가 제공하였었는데 중국에서의 생활이 그다지 신통치 않았던지 또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거였어.
일 년이 넘게 중국에서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도 3달 이상을 떨어져 지냈던 것은 내가 받아들여주지 않아서였는데 어느 날인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 내 결심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지.
까닭 없이 눈물이 나더라는 사저의 말에 그저 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약해빠진 내 마음의 발로였고 값싼 동정심 때문이었는데 최근까지 인연의 끈을 놓지 않게 되었던 근본이유가 바로 심약한 내 마음 탓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하지만 동정심이 만들어놓은 동거는 그다지 완전할 수는 없었는데 외형적으로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생활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끝없는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야.
이것은 어디까지나 폭력적인 것은 아니었는데 연거푸 몇 번에 걸친 비전을 보게 된 거였지.
앞서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이었는데 같은 비전을 세 번이나 보게 되면서 한 가지 결심을 했는데 사저와 아름다운 이별을 하기로 한 거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때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받아들여지곤 하지만 실상은 각자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어.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저역시 중국에서 떠나오기 직전인 2007년 무렵 우리들이 이별하게 된다는 것을 비전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막상 현실 앞에 이별이 다가오자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다고 하였지.
지금은 상세하게 말하기가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사저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이미 헤어짐은 예고되고 있었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말 정도로만 여기다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모든 일들이 떠올랐던 거야.
이런저런 이유가 합쳐져 평화로운 가운데 서로의 길을 달리하는 이별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지만 그다지 기쁘지는 않더구나.
아니!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별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습니까?
가슴이 찢어질듯 아프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 이별이 아닌가요?
그러기에 사람들은 슬픈 이별 때문에 정신에 이상이 오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일만 일어난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 아니냐?
이별이라는 것이 슬픔을 동반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유일한 결말을 가지고 온다고 한다면 이세상은 온통 지옥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별이 기쁨이기도 하다는 겁니까?
당연히 그러하다.
그래서 너희는 아내가 죽고 나면 화장실에 들어가서 웃기도 하는 것이 아니냐?
남편이 죽고 나면 무덤에 앉아 부채질도 하는 것이고…….
그야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까?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너무 심하게 비약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니다.
정말로 너희 인간들은 대부분 그러하며 신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다만 너희 스스로가 그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이며 극심한 슬픔에 빠진 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에이!
너무나 심하게 부정적이시군요.
아무리 신이시지만 너무하십니다.
인간들의 고귀함을 어떻게 보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너희를 고귀하게 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말하는 것이지 너희를 하찮게 여겨서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너희가 내말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너희는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며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키고 만다.
어째서 배우자의 죽음 앞에 슬퍼하는 것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고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지요?
그리고 왜 화장실에 들어앉아 웃는 것이 오히려 고귀함이 되는지요?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너희를 비참하게 만들거나 화장실에 앉아서 웃는 것이 고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 모두가 하나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며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일어나는 인간적인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현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요?
슬픔과 기쁨은 두 가지 상반된 개념이 아닙니까?
몰론 너희의 인식으로는 상반된 개념이 될 터이지만 슬픔이란 기쁨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나타나지 못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너희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슬픔이란 기쁨의 연장선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슬픔이 점점 옅어지면서 기쁨으로 바뀌어가는 감정의 연장선 말입니다.
그러한 표현은 슬픔과 기쁨이 하나로 연결된 원이라는 점을 설명하기위한 것이지만 지금의 내말은 어디까지나 상반된 개념이란 서로를 나타나게 만들어주는 밑바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음양의 이치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거군요.
바로 그러하다.
밝음이란 어둠과 동반할 때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며 어둠이란 밝음이 없다면 나타날 수 없는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점을 알 수가 없기에 어느 한쪽 면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지금은 대낮이며 어둠은 어디에도 없는데 도대체 어디에 어둠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냐.
너희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낮이란 태양이 너희 앞에 자리하고 있기에 보이는 현상일 뿐 지구 뒤편은 지금 어둠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밤낮을 바꾸어가며 연속되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세상의 모든 것들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 세상에 현현할 수가 있다.
따라서 지금의 네 질문은 시각이 어느 한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진 상태에서 나온 것이며 아주 좁은 식견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은 어디까지나 물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표현은 너희 인간들의 두뇌가 만들어낸 창조의 영역에서 구분지어지고 규정되어지는 상태에서의 비 물질이며 절대 계에 존재하는 나의 것은 아니다.
빛과 어둠은 상대 계에서만 존재하며 절대 계에서는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어둠이라 해도 맞으며 빛이라 해도 옳은 말이다.
어둠이라 하지만 빛을 포함하고 있음이요.
빛이라 하지만 어둠을 포함하고 있기에 그 둘은 영원 속에서 언제나 하나이다.
와우!
놀랍습니다.
인간적인 두뇌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긴 하지만 빛과 어둠이란 하나라는 정도로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다시 한 번 더 돌아가서 슬퍼하는 사람이 동시에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어떻게 해서 한가지로 표현될 수가 있을까요?
너는 지금 연극을 하고 있구나.
너 자신이 이러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있지 않느냐?
네 아내와 헤어짐을 앞두고 해방감에 기뻐했으면서 이러한 일을 내입을 통해 말하도록 하는 너의 저의는 무엇이냐?
그야 많은 이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쪽팔려서가 아닙니까?
당신이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당연시 여기겠지만 사람인 내가 말을 하면 비인간적인 처사에 모두들 경악을 할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지금의 네 말처럼 대다수의 인간들이 자신의 감정에 충실치 못하고 가식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며 인간적인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지.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극심한 슬픔에 빠져 세상을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도 합니다.
그러한 일은 왜 생기는 건지요.
그것이 바로 고정된 관념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사랑은 이러한 것이라는 고정된 상념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며 외적인 형상에 집착하여 생긴 외형적인 일로도 볼 수 있으며 이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세세생생 쌓아놓은 업력에 의한 것이라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무슨 대답이 그렇게 여러 가지입니까?
한가지로 답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어째서 너희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살지 않느냐?
어째서 너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의 결과를 만들어내며 여러 가지의 표현된 삶을 살아가느냐?
그렇다면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것도 선택이라는 말씀인가요?
당연히 그러하다.
하지만 누군가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할 경우 다른 쪽에서 헤어지기 싫어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희가 선택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이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냐?
너희 인간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각가지 형태의 이별의 모습들이 아름답지 못하게 비춰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유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이래서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그렇다면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는 겁니까?
아름다운 이별이란 이별조차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을 때이며 슬픔조차 기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때뿐이다.
음~
그래도 한 가지 의문점은 남는군요.
이별의 형태가 단순하게 다툼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가운데서도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어느 한쪽은 분명하게 이별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지만 어느 한쪽은 이별을 하기 싫어할 수도 있거든요.
이럴 경우 헤어짐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 같습니다.
잘못하면 상심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고요.
주변을 보면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을 숱하게 볼 수가 있거든요.
바로 이와 같은 경우가 깨닫지 못한 경우이며 윤회를 벗지 못한 인간들의 극단적인 선택인 것이다.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러한 선택을 할 수가 없으며 지옥을 벗어나지 못한 불쌍한 영혼의 힘겨운 몸짓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 헤어지기 싫다고 한다면 자살을 무기로 삼고 상대편을 옳아 맬 수도 있겠군요.
당연히 그러하겠지만 그럴 경우 서로가 행복을 기대할 수는 없으며 자신만이 지옥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까지 지옥 속에 머물게 하는 짓이다.
따라서 누군가 싫다는 상대를 사랑해서 붙들어놓겠다는 것은 함께 지옥 속에 머물자는 말과도 같다.
절대 계에 있는 나로서는 너희 인간세상이 경이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어떻게 너희들은 상대편에게 지옥을 선물하는 것을 즐겨할 수 있는지 그야말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 사실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도 한다.
하지만 당신이 이러한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너는 잘못알고 있다.
내가 너희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만들어가고 있으며 나는 너희의 그러한 모든 창조의 순간들을 지켜보고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잔인하게 즐기기도 하구요.
아니다.
너희가 즐기는 만큼 즐기고 너희가 괴로워하는 만큼 괴로워하며 너희가 이별조차 아름답게 여기기를 바라고 있다.
당신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인간들의 대다수는 슬픈 이별을 즐기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고통스러운 이별보다는 인내하고 사랑하는 선택을 하고자 하는 거지요.
그 말에는 나 역시 동감을 하고 찬성을 하는바 이지만 실상을 보자면 결국 너희의 인내심은 한계를 마주하게 되고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기고야만다.
너희가 함께 살아가는 동안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감싸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며 이 세상을 천국처럼 여길 수 있는 특권을 신이 너희에게 부여한 것이지만 조금 깊은 너희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지금의 생활에서 탈피를 하고자하는 영혼의 울림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의 상대에게서 만족을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완전을 향해 항해하려는 욕망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신으로의 회귀본능 때문인데 완전한 합일을 이루기전까지 이어져가야 하는 윤회의 쇠사슬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가 되면 끝이 날까요?
영적인 깨달음만이 너희를 완전케 할 것이며 음양의 완전한 조화가 이루어질 때만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부부생활을 통해서만이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너는 무엇인가 착각을 하는구나.
음양의 조화가 네 안에서 완전하게 하나가 될 때 완전한 깨달음이 오는 것이지 반드시 성별의 교합을 통해서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부의 성적인 교합이 깨달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하!
그래서 부부간의 비밀이 크다고 바울이 성경에 기록하였군요.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비밀을 말씀해 주실 수 없는지요?
말해줄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네가 알고자 노력하고 그 일에 대해 세상에 말할 준비가 될 때 말해주겠다.
지금 준비가 되었지 않습니까?
너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지금의 네 행위는 아직 시동조차 걸지 않은 차를 몰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어째서 당신은 자력으로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지 않고 꼭 나를 통해서 말씀을 하시는지요?
너는 아직도 신의 실체를 모르고 있구나.
신이라는 존재가 무소부재하고 편재한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이미 모든 것 자체이므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수조차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한 까닭에 네가 준비가 되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무엇인가를 너에게 말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돌아가서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는 한지요?
때로 깨달은 분들은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조절한다고도 하거든요.
다시 말해서 인연도 마음대로 정한다는 거지요.
하하하하.
웃기고 엎어졌구나.
너희가 만약 해야만 하는 일이 없다고 여기고 하고 싶은 것만을 할 수 있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세상은 그 즉시 무너지고 만다.
그 말을 하는 이가 정말 깨달았다고 한다면 이 같은 사실을 모를 수가 없을 것이고 만약 그가 그러한 말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인가요?
많은 이들이 하고 싶은 일만 선택해서 살지 않나요?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기도 하구요.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결국 이러한 점을 본다고 한다면 하고 싶지 않아도 불가피하게 해야만 하는 일은 분명히 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네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누군가가 가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너는 항상 가질 것이고 누군가는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이럴 경우 상대방은 삶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삶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누군가를 만나야만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것일 수가 있는 것이다.
왜 우리들은 원하지 않는 상대와 만나기도하고 원하지 않는 이별을 해야만 하는지요?
너희가 무엇인가를 심어놓았기 때문인데 그것을 인간세상에서는 인연이라고 한다.
만약 이러한 필연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요?
필연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으며 다만 형태를 달리해서 만날 수는 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요?
남녀의 만남이 반드시 부부간의 만남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다시 말해서 부부 연으로 만날 수도 있고 같은 부모아래의 남매로도 만날 수 있으며 스승과 제자로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형태의 만남 중에 가장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부부의 인연이다.
이러한 여러 형태의 만남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인연이겠지만 현재 다가오는 인연을 미리 알 수는 없는지요?
그 모든 것들이 너희 선택에 달렸으며 지금의 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종합해보면 어떠한 형태로 올 것인지를 알 수가 있으며 인연이 있고 없음도 알 수가 있다.
아들아!
정말 아쉽게도 정해진 시간이 되었구나.
오늘 너와의 대화는 최근에 일어난 대구에서의 일을 말하려 했는데 결국 남녀의 이별을 말하게 되었어.
그조차도 시간관계상 미처 마치지 못한 것 같은데 다음 시간에는 못 다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쉬어가도록 하자꾸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