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길은 탁월한 선택.
좋은 말을 하던 나쁜 말을 하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합니다.
비록자신이 행하지는 않았다 해도 자신이 판단하고 심판내린 일을 말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어떤 경험을 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과 생각은 고정되어 있지도 않으며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저기에서는 저런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일도 절대적인 일은 없습니다.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는 거지요.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면 곧바로 반발하며 말하기를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악하지 선한 것이냐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런 이들을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자신의 나라를 위해 총을 들고 상대방을 죽이게 됩니다.
그럴 때 군인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선할까요? 악할까요?
어느 쪽 국가에서 보느냐에 따라 선과 악의 기준은 달라질 겁니다.
이런 일을 선악을 구분 짓는데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흔히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선한행동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거지에게 동냥을 했는데 거지가 그 돈으로 칼을 사서 살인강도를 저질렀다고 합시다.
그러면 자비를 베푼 사람의 행위는 어떨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경우 자비 행을 실천한 사람은 선하게 행동했고 그 돈으로 살인강도를 저지른 거지의 행위는 악하다 말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한 가지의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불살생을 말하며 채식을 권할 때 육식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간접살생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자비의 행위가 절대적인 선이라고 한다면 간접살생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선을 베풀었던 것처럼 그저 음식으로서 짐승의 사체를 먹는 것인데 간접살생이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악하다고 말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거지요.
따라서 생명존중의 마음으로 행하는 채식주의가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살인이라는 행위가 일어나는 과정이 인과의 법칙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라는 윤회사상을 대비해보면 비록 악한 살인행위라 할지라도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생에서는 내가 저 사람을 죽였지만 전생에서는 저 사람이 나를 죽였다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생에서 일어나는 살인행위에 대한 판단도 선악을 구분 짓기 어려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살인행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발생되었는가에 따라서 세상 법조차 선악을 고정적으로 적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의 경우 법에서는 죄를 묻지 않고 있으며 이럴 경우 악하다는 심판을 내리지는 않게 됩니다.
게다가 때에 따라서는 명백한 악의에 의한 살인행위인데도 불구하고 실력 좋은 변호사를 내세워 무죄를 받아내는 경우까지 있고 보면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러므로 세상 법을 통해 선악을 심판 내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하늘의 심판만이 선악을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는 동안 지은 죄는 죽어야만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지만 해답은 그렇지 않다 입니다.
양심은 내안에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이라 할 수 있으며 양심의 판단에 따라 살면 됩니다.
물론 개중에는 양심이 불량한 사람도 있고 양심이라는 물건이 없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 사람은 어차피 갈 곳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을 일러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라 말하고 있으며 영벌에 처해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죽어있거나 잠들어있는 양심을 살리는 일이며 불량한 양심을 우량하게 바꾸는 작업인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길을 선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으며 최고의 이익을 남기는 장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종교관은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