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2.
마가복음의 두 번째 마당입니다.
참 오랜 시간을 장고한 끝에 두 번째 마당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시작에 앞서 여러분께 고할 것은 나 홀로목사의 성경해석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으며 계속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하면 우리들이 늘 행복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을 기다리는 많은 분들에게는 실망스러운 말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진정 우리에게 중
요한 것은 성경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우리가 행복해져야합니
다.
신이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 하라는 성경말씀이 실현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진정 행
복하고 즐거워야한다 생각됩니다.
이런 이유로 행복하기위해서는 언제라도 우리의 목표가 달라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나 홀로목사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벌이가 필수요건입니다.
그런데 성경해석에만 몰두하거나 그것만이 목표가 될 것 같으면 삶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따릅니다.
이래서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 뜻대로 산다하기도 어려운 일이지
요.
그래서 때때로 목표점을 바꿀 수 있어야하며 심할 경우에는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겁
니다.
어떤 일이든 하지 못하게 될 경우 안달복달해야한다면 바람직하지 않으며 하나의 집착이라
할 것입니다.
이미 마태복음을 통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성령을 깨달을 수 있는가를 충분히 말해 놓은 만
큼 구태여 마가복음의 강해를 하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으며 여러분이 알던 모르던 성령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깨달아 알고 있는 경우 삶 자체가 영적이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주어진 오늘에 만족
하고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시간적으로 여유가 되고 마음이 보다 안정적일 때 성경연구에 몰입해야 하리라 생각되
기에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시작에 갈음하여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나 홀로목사가 몸담고 있는 공사가 완공되기 전까지
는 어떻게든 마가복음을 완성시키겠다는 것이 목표이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는 없
는 노릇이지요.
예를 들어 사고가 났다고 가정한다면 그때도 우리가 목표를 향해 갈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 만큼 걸어갈 것이며 변화가 온다면 언제든지 변화에 순응하겠
다는 것이 나 홀로목사 삶의 방침입니다.
살아도 죽어도 주님의 뜻이니 주님이 주시는 데로 받을 수밖에요.
주님이 내안에서 살아 숨 쉬고 여러분 안에도 살고 있으니 여러분과 내가 원하면 하나님이
기간 내에 완성하도록 허락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서두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이제 미뤄두었던 마가복음의 장을 열어보겠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막:14)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5)
이방의 땅 갈릴리에 오셨다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15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하니 그 당시가 하나님왕국이 왔다는 말일까요?
오늘날의 많은 목회자들이 이 말씀을 복음전할 때 많이 인용합니다.
현시대가 바로 하나님나라가 가까운 때이니 복음을 받아들여야한다 목청을 높입니다.
그러면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이시대의 멸망을 나타내고 있다 겁을 주지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길 때가 찼다 했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했으
니 예수님생존당시가 바로 그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이 내용은 14절과 연계해서 해석해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기를 시절인연이 도래해서 영생을 얻을 사람들은 회개하고 복
음을 믿으라하신 거지요.
각 개인의 때가 차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영혼은 알아들으라는 말이니 시대에 관계없이 인연
있는 이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해야 오늘날에도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할 수가 있습
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생존당시에 때가 찼으니 멸망했어야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은 회개(悔改))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회개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아는 분이 있습니까?
회개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것이지만 과연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
우치는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요.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여야만 진정으로 회개가 이루어지며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지라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나 홀로목사의 경우 이점을 인식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20년 이상 채식하며 명상수행을 해온지라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던
거지요.
이미 내면의 성령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인식이 더 이상 필요 없다 여겼기 때
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편을 보며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지요.
멜기세덱의 반차에 오른 다윗조차 자신이 벌레보다 못한 존재라고 고백하고 있었으며 신약
속의 바울역시 육신으로 완벽할 자가 아무도 없다 설했으니 나 역시 그런 범주를 벗어날 수
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내면의 성령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살아감으로 죄인이 아닐 수는 없으
며 더구나 깨달음을 얻어 만물동일체의 인식을 갖게 되면 타인의 잘못까지도 내 것이 아닐
수 없음으로 죄인 중에도 아주 큰 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가끔씩 죄라는 것은 인식하기 나름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큰일 날 소리입니
다.
죄의식을 가지지 않고 행하면 죄가 안 된다고 한다면 인과응보라는 말이 무색해지겠지만 절
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분들일수록 자신이 당하는 불이익은 참지 못하고 상대방을 응징합니다.
자신을 상대하는 상대방역시 자신과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을 모르기에 그토록 화를 내는 겁
니다.
스스로가 생각할 때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고 올바른 것이라 할지라도 타인에게 피해가 돌아
간다면 분명히 죄이며 자신은 죄인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며 이런 후에 하나님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 자신의 죄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간단하지만 아주 심오한 내용이었는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막: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17)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막:18)
예수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를 향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제
자로 받아들여 영적스승이 되도록 해주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지금껏 하고 있던 생업을 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이니 그만큼 영적인일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거지요.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막:19)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20)
야고보와 요한역시 생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아버지를 배에 두었다는 말은 혈육
의 정보다 영적인 길이 우선시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세베대는 부자로서 예수님을 뒤에서 도운 조력자였지요.
그의 아내 살로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날까지 재산을 아끼지 않고 곁
에서 도운사실을 볼 때 남편인 세베대 역시 예수님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제자였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으며 그들이 물질적인 일보다 영적
인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알리기 위해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들과 같은 신심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우리가 과연 얼마나 영적인일을 중요하게 여
기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겨지며 또다시 성경에 집중해보겠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막:21)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
지 아니함일러라(막:22)
가버나움의 뜻은 “나훔의 마을”입니다.
나훔은 주전 7세기경에 활약하던 선지자로서 구약과 신약에는 없지만 이스라엘사람들이 보
는 히브리어성경에 나옵니다.
아마도 가버나움이라는 곳은 그 당시에 영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가진 고장이었던 것 같습니
다.
그런 곳에 가서 하나님 복음을 가르치셨는데 안식일의 규범을 깨트렸다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놀라워했으며 기존의 서기관들과는 차원이 다른 설교였으며 하나님의 권세
가 임한 것같이 여겼다는 겁니다.
놀라운 예수님의 행동은 이어지는 내용에도 담겨 있습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막:23)
And there was in their synagogue a man with an unclean spirit; and he cried out,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24)
Saying, Let us alone; what have we to do with thee, thou Jesus of Nazareth? art
thou come to destroy us? I know thee who thou art, the Holy one of God.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막:25)
And Jesus rebuked him, saying, Hold thy peace, and come out of him.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막:26)
The evil spirit shook the man violently and came out of him with a shriek.(NIV)
And when the unclean spirit had torn him, and cried with a loud voice, he came out
of him.(KJV)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27)
And they were all amazed, insomuch that they questioned among themselves,
saying, What thing is this? what new doctrine is this? for with authority
commandeth he even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do obey him.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막:28)
And immediately his fame spread abroad throughout all the region round about
Galilee.
많은 이들이 이 내용을 두고 예수님이 귀신들린 이를 쫒아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나 홀
로목사의 생각은 다릅니다.
정말 귀신이 들린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인식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기위해 회당이라는 장소를
말해놓은 것이며(23절)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각기 다른 품성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위해
24절과 같이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말은 성령과 무관한 인식을 나타내며 거룩한 자를 알아본다는 것은
성령이 그 사람 안에도 들어있음을 말해주는 거지요.
그때껏 잘못 각인되어있던 인식들이 하나의 체를 형성하여 그 사람 몸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을 예수님 가르침을 듣고 밖으로 빠져나오게 되었음을 설명해 놓은 겁니다.
예수님이 꾸짖었다는 말은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과 논쟁을 벌였다는 말입니
다.(25절)
사람들은 누구나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무너지게 되면 처음에는 격한 반응을 보
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NIV성경에서는 격렬함을 뜻하는 violently 라는 단어를 썼고 KJV에서는 찢다 파괴
하다는 뜻의 torn이라는 단어를 썼던 겁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밑천이 드러나는 것이지요.(26절)
논쟁을 벌려 예수님이 그들을 완전히 제압하였다는 말이며 그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
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알도록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성경을 공부하는 많은 분들이 나 홀로목사의 말에 수긍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함으로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눅4:35)
"Be quiet!" Jesus said sternly. "Come out of him!" Then the demon threw the man
down before them all and came out without injuring him. (NIV)
같은 내용인 누가복음 4장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글성경은 NIV를 번역한 것이 맞습니다.
아주 미화되게 표현되었지만 영어단어 threw는 팽개치다 내던져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혀 다치지 않았다했지요.
이는 분명 귀신이 정말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인식이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라는 것
을 말해주기위해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사실 이 내용을 지금까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를 지적하며 인식정도를 말하게 되었었지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살펴보니 마가도 누가도 모두 이 같은 점을 익히 알고 있었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비유해서 기록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우리들이 어리석은지 새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머리의 명석함만 믿고 자신이 아는 것만이 전부인양 까불어대는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
께서 얼마나 가소로울는지요.
반성하는 마음으로 다시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막1:29)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막1:30)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막1:31)
예수님께서 시몬(베드로)의 장모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병이 나았다하니 굉장한 기적을 행
사하신 것 같습니다만 마태복음을 보면 손을 만졌다고 했지요.
아마도 지압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나 홀로목사 마태복음 12편을 다시 한 번 더 읽어보시기 바라며 다
음구절을 보겠습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막1:32)
온 동네가 문앞에 모였더라(막1:33)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
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막1:34)
이 말씀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마태복음을 함께 봐야할 것 같습니다.
잠시 보고난 후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마8:14)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마8:15)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
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마8:16)
마태와 마가복음 두 가지를 비교해보면 뭔가 다른 점이 보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귀신을 내어쫒으셨다 했지만 마태복음에는 말씀으로 귀신을 쫒아냈다 했습
니다.
이는 분명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설교를 통해 고치셨다는 말입니다.
앞서 마가복음 24절에서 보았듯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들을 고쳐주었기에 귀신이 그
리스도를 알아보았다고 말해놓은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할 점은 귀신이 어떤 존재일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귀신을 그저 막연하게 사람의 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주 복잡합니다.
시간관계상 속 깊게는 말씀 드릴 수 없지만 간단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우리 몸은 간단하게 영과 육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만 영육 외에도 인식 체들이 있지요.
옛 조상들이 사람이 죽으면 영은 온 곳으로 돌아가고 혼백은 흩어지며 육신은 땅으로 돌아
간다 했는데 혼백에 해당하는 것이 인식 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는 동안 나라고 생각하는 나를 말하는 것이며 살아있는 동안의 기억
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가운데 자신의 진정한 영혼인 성령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 살았던 기억속의 나라고
생각하는 나를 놓지 못하고 높은 영의 세계(하나님의 왕국)를 갈수 없어 이 세상을 떠돌게
되는 것이 귀신입니다.
사는 동안 착하게 살고 좋은 일을 많이 했을 경우에는 그나마 낮은 천국을 가겠지만 저만
위할 줄 알고 타인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해본 적이 없다면 어디를 가야할지를 몰라 헤매게
되는데 그 같은 상태의 인식 체를 귀신이라 부르는 겁니다.
당연히 나쁜 짓을 많이 했다면 지옥을 면치 못할 것이며 하나님왕국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
니다.
이 같은 일을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이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 같은 분이 나타나서 하나님왕국을 말씀해 주시는 것인데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살아나오는 동안 쌓아놓은 업장과 잘못된 인식이 그들로 하여금 복음말씀을 받아들이지 못
하게 막는 거지요.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들이 알게 되었듯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미망의 세계를 떠돌 수밖
에 없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 같은 분을 모조건 따라가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지옥이라도 면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었는데 불구하고 귀신이 들렸던 것 같이 성경에 대해
잘못알거나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귀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이미 몇 번에 걸쳐 여기에 대한 말씀을 드렸던 만큼 귀신에 대해서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
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막1:36)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막1:37)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1:38)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막1:39)
35절을 살펴보니 예수님께서는 새벽 일찍 혼자 기도하는 특별한 방법을 행하고 계신 것 같
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다락방 같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라 말씀하신 것을 볼 때 뭔가 기도방법이
일반인들과 다른 것 같습니다.
36절에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 뒤를 따랐다는 것은 특별한 제자들만이 예수님
과 함께 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령을 완전히 깨달은 분이며 그리스도라는 것을 37절에 밝혀놓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찾는다는 것은 모든 이들 안에 성령이 들어있다는 말인 동시에 사람의 살아가
는 최종목적이 무엇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영생에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이 구절이야말로 아주 심오한
내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해도 만족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자신 안에 성령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
다.
완전체였던 우리가 육신을 입고 미완성된 존재로 살아가는지라 만족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생은 자신내면에 존재하는 성령을 깨닫고자하는 욕구가 잠재해있지요.
자신이 인식을 하든 못하던 관계없이 이 같은 일이 일어남으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성령
이 완전히 드러난)을 찾는다고 말한 겁니다.
38절과 39절을 보면 이와 같은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모든 이들이 성령을 찾고자하는 갈망이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러 오셨다는 말이며
이방인(갈릴리)들에게 전도하러 다니시면서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영적인식들을 고치셨다
는 말입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던 가르침을 하루아침에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이 그리 간
단치가 않습니다.
보통의 믿음으로는 이 같은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완전히 기적과 같은 일이지요.
그러기에 다음구절을 기록해놓았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막1:40)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
라 하신대(막1:41)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막1:42)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이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40절)
거기에 맞춰 예수님역시 하나님처럼 말씀하셨지요.(41절)
그래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겁니다.
믿음이 없었더라면 일어날 수 없었으며 믿음의 크기가 큰 만큼 기적도 크게다가옵니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또다시 이어질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더 성경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
겠습니다.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막1:43)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막1:44)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이르기를 절대 말하지 말고 오로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 했
는데 여기에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 같습니다.
44절의 내용은 레위기 14장 2절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잠시 구약을 본 후 돌아오겠습니다.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 갈 것이요
(레14:2)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레14:3)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레14:4)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레14:5)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
은 새 피를 찍어(레14:6)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레
14:7)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
니 그 후에 진에 들어올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 일을 거할 것이요(레14:8)
칠 일 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
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레14:9)
제 팔 일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수양 둘과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또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삼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레14:10)
정결케 하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와 그 물건들을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레14:11)
어린 수양 하나를 취하여 기름 한 록과 아울러 속건제로 드리되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레14:12)
그 어린 수양은 거룩한 장소 곧 속죄제와 번제 희생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속건 제물은
속죄 제물과 일례로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이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레14:13)
제사장은 그 속건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
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에 바를 것이요(레14:14)
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하여 자기 좌편 손바닥에 따르고(레14:15)
우편 손가락으로 좌편 손의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레14:16)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는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 곧 속건제 희생의 피 위에 바를 것이며(레14:17)
오히려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르고 여호와 앞에서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하고(레14:18)
또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함을 인하여 정결함을 받으려는 자를 위하여 속죄하고
그 후에 번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레14:19)
제사장은 그 번제와 소제를 단에 드려 그를 위하여 속죄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정결하리
라(레14:20)
그가 가난하여 이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그는 흔들어 자기를 속할 속건제를 위하여 어린 수
양하나와 소제를 위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에 기름 섞은 것과 기름 한 록을 취하고
(레14:21)
2절만 올리려다가 좀 더 길게 올렸습니다.
간단하게 올려서는 전체적인 의미를 알 수 없는지라 지루할 수 있는 내용을 올리게 되었습
니다.
이외에도 32절까지 있지만 설명하기에는 이정도면 충분한지라 21절에서 중단시켰지요.
시간이 나시는 분은 개인적으로 읽어보시길 바라며 이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적으로 살펴볼 내용은3절인데 모세가 정해놓은 규례는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은 것을 확인하고 난후에 재발하거나 병을 타인들에게 옮기지 않게 하는 의식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제사 드리는 절차나 제물을 보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기위해 마련된 것이란 걸 알 수
있으며 죄 사함 받기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희생시켜야한다는 것이 보입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여기에는 상당한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질그릇이란 사람의 몸을 나타내는 것이며 새를 흐르는 물에서 잡는 행위는 순결한 피를 의
미합니다.
다시 말해 질그릇은 환자의 몸이며 흐르는 물에서 피가 깨끗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환자의 좋지 않은(병든 피)피는 다른 새가 가지고 날아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양을 잡는 행위는 말 그대로 희생양을 나타내는 것이며 기름을 바르는 행
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기름부음 받은 자를 말한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 같은 행위는 아주 깊은 의미
가 담긴 거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이야기할 때 유월절에 관한 이야기를 무척 많이 했으므로 더 길게 얘기하진 않
겠지만 제사의 근본취지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에 있는 것이지 정말 양을 잡아
피를 바르거나 기름을 붓는다고 해서 죄 사함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 옛날 모세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위해 여러 가지 복잡한 제사행위를 만들었다는 사실
을 예수님이 알고 있었으므로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인정받으라 하신
겁니다.
모세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지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믿음은 기적도 일으킨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어야합니다.
타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합당하고 제대로 된 가르
침을 전할 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며 믿음이 생기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기적은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하나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이며 기적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
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안에 공히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절대로 밖에 나가 말하지 말라 했던 겁니다.
이래서 안 되는 명백한 이유가 있지만 일반인들은 이 같은 이치를 모름으로 문제를 일으키
곤 합니다.
다음구절에 여기에 대한 이유가 나옵니다.
보시죠.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 오더라(막1:45)
보시다시피 나병환자가 이야기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예수님께서 피해 다니셔야했
습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의아해할지 모르겠지만 나 홀로목사는 여기에 대해 궁금했던 적이 있습
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치유의 능력이 있다면 왜 불쌍한 사람들을 낫게 해주지 않으실까 했던 거
지요.
이 같은 생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대해 몰랐을 때 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몰랐으니 당연히 성경을 몰랐었고 성경을 몰랐으니 성령이신 하나님을 알 까
닭이 없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온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버리면 될 것을 왜 지옥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이 그곳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들까를 생각했더랬지요.
하지만 성경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연구해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인간들이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고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
니다.
우리자신을 지옥에도 천국에도 가도록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자신이지요.
앞에서도 보았듯이 예수님께서 만약 사람들의 믿음과 관계없이 낫게 해줄 수 있다고 한다면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계없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린다면 온 세상을 천
국으로 만들어버렸겠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예수님도 하나님도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 개인각자의 몫입니다.
아직은 여러분에게 이 같은 개념이 확실하게 와 닿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좀 더 성경
속으로 깊이 들어가다 보면 가슴으로 느껴질 거라 생각합니다.
하루빨리 이 같은 인식이 우리들에게 다가오게 되길 하나님께 기도하며 오늘의 시간을 마치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