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사랑하라.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얻었다하면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모르는 것이 없다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드러나거나 불성이 드러났다는 말은 내면의 영혼(성령, 불성)이 깨어났다는 말이지 육신이 완전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그럴 것 같으면 예수와 석가모니부처는 지금까지 육신을 가진 채 살아있어야지요.
그러면 왜 성령이 드러난 이들이 육신적으로도 완전해질 수 없는 건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령이 드러난 이들이 육신적으로 완전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가지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육신이 아플 때 성령이 드러난 이가 스스로를 치료하게 되면 의사를 만날 수 없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영의 세계에 대해 모르는 의사는 성령과 연결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세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영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없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성령을 깨달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25:31)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25:35)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6)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25:37)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마25:38)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마25:39)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인자는 예수님처럼 성령이 드러난 사람이지요.
그가 곤경에 처해있을 때 그를 돕는 것이 하나님왕국에 오르는 방법임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의인들은 하나님과 하나 된 이들로서 그들이 살아생전 성령이 드러난 인자를 도왔기 때문에 하나님 오른편에 앉을 수 있었다는 점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40절을 보면 하나님(임금, 인자)이 말씀하시기를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일이 자신에게 한일과 같다고 합니다.
이 말인즉 영생을 향해 걸어가는 구도자를 돕는 일이 곧 하나님을 돕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지요.
바로 이런 까닭으로 성령이 드러난 사람(육신)이라 할지라도 완전하지 않는 겁니다.
육신으로 완전해지면 배고플 까닭도 없고 목마를 이유도 없으며 나그네 될 일도 없습니다.
헐벗거나 병들지도 않고 옥에 갇힐 일도 없으니 그를 도울 길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적인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이나 혹은 성령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왕국에 오를 수 없게 됨으로 완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이 드러난 사람인줄 알고 도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지요.
여기에 대한 해답도 성경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이래서 생겨난 겁니다.
온 인류를 사랑하기에는 모자람이 있겠지만 적어도 자신과 연관이 있고 바로 옆에 자리한 사람은 사랑할 수 있기에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특히 구도자를 돕는 것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하나님왕국에 오르는 길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드러난 사람이 완전하지 않아야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왕국에 아무나 오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드러난 사람에게는 성령의 불꽃을 나누어줄 권능이 주어져있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면 영생을 얻을 수 있지요.
그래서 그의 외형적인 모습은 도저히 그를 믿고 따를 수 없게 보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종이를 줍는 노인의 모습일수도 있고 가게에 동냥바가지를 들고 나타나는 거지일수도 있는 겁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내 눈에 보이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은 진정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게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베풀며 사는 것이 중요하며 늘 주장하듯이 이타행이야말로 가장 이기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의 경우에는 내가 알 수 없으나 내 눈에는 모두의 내면에 성령이 들어앉아 있으며 심지어 성령이 그들을 움직이고 있음이 보이고 있지요.
다만 그들 자신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