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습관은 언제나 이성적 판단을 앞섭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을 할 때 대부분의 경우에는 습관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언행이 바른 사람들은 이 말에 수긍하기 어렵겠지만 주변 환경이 급박하게 돌아가면 어김없이 습관을 따르게 됩니다.
각자가 처해있는 환경이 같지가 않으므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매일같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콘센트를 덮어씌우기 위해 플레이트를 들고 들어갈 때 들어가는 입구에 하나를 두고 들어가면 손동작이 자유로워 일이 빨라지는데 두개를 들고 들어가 불필요한 동작을 하게 됩니다.
일이 그만큼 늦어진다는 말이지요.
매일같이 같은 일만 하면 모르겠지만 다양한 일을 하는지라 숙달되는 동안 헤매기 마련입니다.
과거에 운전할 때도 이런 경험을 했으며 생활 곳곳에서 이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말과 행동을 하고나면 좀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을 남길 때가 있다는 겁니다.
때로는 조금 심각한 상황을 마주할 때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내뱉은 한마디 말이나 행동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을 때는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일이 습관에 의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거지요.
이런 일은 누구나 겪는 일이며 어떤 인생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육신을 가진 이로서 100%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이런 일에 대해 지인으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었지요.
건달출신인 사람이 개과천선하여 장가를 가서 처갓집을 방문했는데 장모님께서 사위를 위해 맛있는 된장국을 끓여 들고 들어오다 넘어지는 바람에 사위허벅지에 쏟게 된 겁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쌍욕이 나왔고 그 말을 들은 장모님이 수십 년을 가슴아파했다고 합니다.
사위역시 장모님을 볼 때마다 죄송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같은 일은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었고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건달출신인 사위는 장가들기 전 많은 악행을 저질렀지요.
평생을 뉘우치며 살아도 모자랄 죄를 지었으니 그런 일을 통해 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물들어있는 언행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알고 보면 신의 축복인 셈입니다.
벌써 30년도 넘은 일이어서 이분의 현재 상황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자신에게도 이분 못지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상황과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어떤 인생도 이런 일은 피할 수 없으며 그 일이 가지는 교육적인 측면은 있기 마련이지요.
우리가 말과 행동을 할 때 일반인들은 현상적인 일만을 봅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들은 그 너머의 일을 보게 되며 신의 손길을 살피게 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람의 행사는 신이 주관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품성을 담지 않은 육신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사는 사람은 상대방과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요.
비록 상대방과 내가 언행을 통해 실수를 했다하더라도 거기에는 신의 손길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바보도 아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관계를 끊기 위해 작정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대방이 관계를 끊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으며 선택의 기회는 나에게 있는 겁니다.
내가 상대방과의 관계를 끊을 수도 있고 습관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또다시 줄 수도 있다는 거지요.
또한 여기에는 반대의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역으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 습관을 고치게 만들기 위한 신의 안배로 볼 수도 있습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고방식을 무디게 만들기 위한 신의 손길로 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어떤 현상에 대한 해석은 각자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선택의 권한역시 본인들에게 달렸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상대방의 언행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싶으면 헤어지면 되는 것이고 아직도 사랑의 마음이 남아있다면 또다시 기회를 갖게 될 겁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일방적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세상은 상대계이며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박수도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상대가 있기에 이런 연극무대가 펼쳐지는 거지요.
그래서 그 어떤 경우에도 일방적인 잘못도 일방적인 잘함도 없는 겁니다.
우리인생의 목표가 현상계를 넘어 형이상적인 세계인 절대 계에 있다 하더라도 어느 한쪽만이 옳을 수는 없습니다.
혼자 있더라도 내면적인 갈등이 있는 것은 우리 몸 자체가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며 상대방이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순간을 신이 우리에게 선택의 순간을 제공하는 것으로 봐야하는 겁니다.
완성의 순간을 향해 함께 나아갈 것이냐?
또 다른 경험을 할 것이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깨진바가지는 어디가도 물이 샌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에는 타인을 보기 전에 나 자신부터 봅니다.
그리고 나면 결론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