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지도(中庸之道).
믿음의 길이 여러 가지라는 것은 종교가 말해줍니다.
세상에 널려있는 많은 종교는 교통수단과도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돕습니다.
그렇지만 항시 명심해야할 것은 자신의 목적지입니다.
서울을 간다고 마음먹었으면 어떤 경우에도 서울을 향해 가야만합니다.
중간에 내려서 딴 짓을 하거나 다른 쪽을 향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약간의 일탈은 있을 수 있지만 그 기간이 길어져 그곳에 머물게 되면 목적을 상실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안양에서 서울을 가다가 과천에 내려 그곳에 살게 되거나 대공원에 들렀다가 그곳에 오래 머물게 되면 목적지 서울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요1:2)
Arise, go to Nineveh, that great city, and cry against it; for their wickedness is come up before me.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요1:3)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요:15)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요2:1)
Then Jonah prayed unto the LORD his God out of the fish's belly,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요2:10)
And the LORD spake unto the fish, and it vomited out Jonah upon the dry land.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영생의 하늘로 인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영적스승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취해 삿된 길로 접어든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세상유희에 빠져 일정기간동안 헤매게 되지요.
그럼에도 영생이라는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고 기도를 한 끝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임무에 충실하게 된다는 것이 요나서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나서를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히브리어의 뜻이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먼저 요나의 뜻은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이며 니느웨의 뜻은 합의로서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구도자의 삿된 마음을 뜻합니다.
강직한 믿음으로 무장하고 영생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수행자가 현실과 타협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자격미달임으로 그러한 마음을 악으로 여기며 쳐부수라고 명한 겁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담긴 깊은 뜻은 중용지도(中庸之道)라고도 볼 수 있지요.
물질세상이 가지는 의미는 우리의 마음을 단련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용지도이지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영육이 하나 되는 도리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라는 임무를 회피하기 위해 다시스로 내려갔다고 했지만 이는 영생을 길에서 벗어나 일탈을 시도했음을 표현한 겁니다.
안양에서 서울로 가다가 대공원에 들러 구경삼매에 빠졌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욥바로 내려갔다 한 것인데 욥바의 뜻은 아름다움이라 세상유희에 빠진 것을 뜻하지요.
바다는 세상을 뜻하고 커다란 물고기는 바다의 제왕을 뜻하는 말로서 물질세상의 시스템을 가리킵니다.
물질세상의 법칙과 법도에 따라 통제되고 억압된 세상에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에 대한 목적의식을 버리지는 않았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그치지 않았으며 참회를 한 끝에 영적부활에 이르렀다는 것이 요나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요나처럼 목적지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급하게 가든 천천히 가든 서울을 향해 가려는 마음은 변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명심할 것은 교통수단을 선택하더라도 목적지를 향해 가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철을 이용할 경우 4호선이 맞는지 역방향은 아닌지 확인해야하며 버스를 탈 경우 노선을 확인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이런 점을 잊어버리지 말아야지요.
만약 걸어서 가는 사람이 경험도 없고 물어볼 용기도 없다면 언제 서울을 가게 될지 누구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수원에 내려 서울을 가려면 반드시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하는 겁니다.
적어도 인터넷검색을 하거나 안내책자를 통해서라도 서울교통편에 대한 사전지식을 얻어야하며 그래도 몇 번의 확인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헤매야할지 모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10:31)
(But many that are first shall be last; and the last first.)
우리의 목표가 서울시청이라 할 경우 제주도에 사는 사람이 시청에 도착하는 방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으며 서울 사는 사람도 방향을 잘못 잡으면 늦게 도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서울에서 운전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길 한번만 잘못선택하면 몇 시간을 돌아다녀야하는지 모릅니다.
잘 안다 하더라도 어떨 때는 헤매는 게 사람의 인생길이지요.
이래서 경험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곳에 가던지 길을 묻는 사람에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여유자적하게 양재 천을 걷다가도 누군가 길을 물으면 그 자리에서 길을 제시해줄 수 있는 겁니다.
다만 길을 묻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으며 어떤 경로를 원하는지 물어본 후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 분명합니다.
과천에서 길을 물었던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면 자전거로 가는 방법을 말해줄 것이고 걸어가는 길을 물으면 산책길로 갈 것을 권할 것이며 빠른 길을 원한다면 산책길을 벗어나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방법을 말해 줄 거라는 말입니다.
본인역시 산책을 하다가 지겨우면 올라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즐기기도 하겠지요.
자유자재(自由自在)란 이런 거라 생각하는데 여러분의 자유로움은 어떤 건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