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holo)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앞으로 홀로되실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메신저 나 홀로 목사입니다.
지금껏 많은 걸림돌을 넘어 여기까지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 홀로 목사가 처음 말씀드렸다시피 여러분들에게 전해주고자하는 소식은 예수를 숭배하는 자로서의 만족이 아니라 예수가 홀로(holo)된 것과 같이 여러분들도 홀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와 하나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숭배하는 자로서 살고자 한다면 구태여 이곳을 서성일 필요가 없지요.
세상에 흘러넘치는 것이 예수숭배자들이며 교회인데 어디든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잡으면 됩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길거리에서 사탕이나 화장지까지 나누어주면서 모시려고 하지요.
다들 특색 있게 성경의 말씀을 포장하며 자신들의 교리가 얼마나 진리의 말씀인가를 전해주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나 홀로 목사는 그들처럼 무언가를 주지도 않을뿐더러 지금껏 믿고 있던 것이 엉터리라는 말만 하며 마음속의 에고를 긁어놓습니다.
게다가 제발 이곳에 오지 말라는 말까지 하지요.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건너야할 험난한 시험이라 할 수 있는데 앞으로도 더욱더 심하고 독한 말들이 쏟아질지도 모르는 일이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시험이 함께 할 것입니다.
아픔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이 확인을 하는 셈인데 기존의 고정관념이 무너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통이 따라야합니다.
성경 안에도 이러한 나 홀로 목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기록되어있는바 모든 일들은 성경을 통해 확인하기로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보겠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
For with what judgment ye judge, ye shall be judged: and with what measure ye mete, it shall be measured to you again.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4)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5)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7:6)
Give not that which is holy unto the dogs, neither cast ye your pearls before swine, lest they trample them under their feet, and turn again and rend you.
지난시간 나 홀로 목사는 조금 심하게 기독교인들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는데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문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이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한글성경에는 비판이라고 했지만 영어로는 분명 심판이 맞으며 성경학자들이 일부러 비판이라는 말로 바꾸어놓았지요.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는지라 화살이 자신들에게 돌아올까 감히 심판이라는 말을 못하고 비판이라는 단어를 쓴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남을 심판하는 것으로 인해 자신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남을 향해 함부로 잣대질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 잣대질 당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직 스스로도 지옥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남을 향해 지옥을 가게 될 것이라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될는지 생각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말들을 하는 거지요.
몇 번에 걸쳐 나 홀로 목사가 기독교인들을 나무랐던 것은 그들을 욕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비판을 당할 때 기분이 어떤가를 경험시켜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솔직히 나 홀로 목사는 그 누구도 비판하고 싶지를 않으며 어떠한 이도 지옥을 간다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남들을 향해 지옥을 갈 거라는 말을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지옥이 함께하게 된다는 사실만을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아울러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말씀이라고 해서 액면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만약 액면그대로의 사실을 보게 되면 그 누구도 심판의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충분히 확인하였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눈을 빼라든가 팔을 자르라는 등의 말씀은 정말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의 근본원인을 제거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근본원인이란 무엇일까요?
많은 이들이 죄의 근본원인을 죄를 짓게 하는 이유가 되는 일들이라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죄라고 인식하는 마음이 문제인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이라는 극 대칭 속에 머물게 되는 이유가 바로 죄의식 때문인데 이 같은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타인들을 용서할 때라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신거지요.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자신들의 마음상태를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죄라고 인식하지 않으면 죄를 지어도 괜찮은가요?”
물론 괜찮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자신이 용서를 받으려면 타인들에게도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신은 그 어떠한 짓을 해도 무방하다면서 타인들의 행동에 제재를 가한다고 한다면 그 같은 일로인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신들은 사회생활을 하기위해 각종 하지 말아야할 짓들을 즐겨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잘못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죄를 짓는 것이라는 거지요.
언젠가 나 홀로 목사는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한분과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인 적이 있지요.
그분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위해 세상사람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 홀로 목사는 그렇지 않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예수처럼 성령으로 인해 태어나는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에서는 죄의식을 벗어날 수가 없겠지만 성령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에서는 죄라는 인식은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으로 예수와 같은 이가 바로 그러한 상태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높은 인식의 세계(높은 천국)에서 내려온 영혼이라는 말인데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은 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때때로 깨달은 스승들이 자신만이 유일하게 깨달았다 말을 하는데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를 이루게 되면 진정한 의미에서 신은 하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며 자신이 그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비록 육신은 나누어져 있다 해도 영적으로는 하나라는 말이며 위없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 천백억 화신 체를 나눈다는 의미가 바로 이러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마음먹기에 딸린 일이며 너와 내가 하나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면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같은 경지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그 방법을 말씀해 놓았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8)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마7:9)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7:10)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Therefore all things whatsoever ye would that men should do to you, do ye even so to them: for this is the law and the prophets.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을 듣고 많은 이들은 말할 겁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기도 속에서 간절히 바랐건만 단한가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주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말씀을 믿을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은 자신의 마음상태를 가만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자신의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가 보이게 될 겁니다.
진정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길을 찾고 문을 두드리는 노력을 기울여야함에도 저절로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바라기만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는 거지요.
또한 자신의 목적이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한쪽으로는 구도의 길을 걸어가면서 한쪽으로는 물질을 손에 움켜쥐고 절대로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지나 않았는지 살펴봐야합니다.
모든 판단기준을 물질적으로 하고 사람들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물질이 있고 없음이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은 아직 그가 영적인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최고의 명문대를 나온 사람은 사람을 볼 때 판단기준이 어떤 대학을 나왔는가를 보게 될 것이고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판단기준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일이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목적지에 따른 이러한 판단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합니다.
그 사람이 지금의 위치에 도달하게 될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할 판단기준이라는 것은 삶을 이끌어가는 방향타와 같은 것입니다.
온힘을 다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린 결과물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지요.
이러한 모든 것들이 목적을 영적인 곳에 두게 되면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이 같은 영적인 일들도 어떠한 것을 영적인 것이라 여기는가에 따라서는 판단의 기준점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찾게 되면 물질적인 성공까지 함께 오게 된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물질적으로 멸망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여기는 것처럼 각자 생각속의 영적인일들은 여러 갈래로 갈릴 거라는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의가 자신이 생각하는바가 유일하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결국 이렇게 놓고 보면 각자의 눈앞에 다가와 있는 현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인 동시에 내가 원하고 바라던 것들이 놓여 있다는 것이 됩니다.
지금 다가와 있는 현실을 내가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준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이러할 때 우리들은 영혼의 선택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영혼이 간절히 원했던 상황이 나에게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육신은 현실을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내 영혼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지라 하나님은 영혼이 원하는 것을 나에게 준 것이라는 거지요.
아마도 많은 분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겁니다.
자신의 영혼을 본 일도 없으며 영혼에 대한 이야기조차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대접받고자 하거든 남들에게 대접해 주라고 했던 겁니다.
영혼을 모르는 많은 이들에게 인과의 법칙(the law)을 말씀해 준거지요.
내가 원하는 것이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심어놓지 못했다는 말이며 진정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남에게 베풀어놓음으로서 심어놓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접하라는 말씀 끝에 율법과 선지자(the prophets)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대접하는 것이 바로 예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로서 내가 심어놓은 것이 미래에 돌아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도 적용시킬 수가 있는데 내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싶다면 남들에게 물질적으로 베풀라는 말도 되며 육신적인 편안함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남들에게도 편안함을 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각자가 자신이 누리고자 하는 것을 타인들에게 준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는 말인데 영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미래가 암담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만이 편안하고 풍족해지는 것을 원할 뿐 타인들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많은 이들은 말하길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이세상의 법칙이 필요하며 물질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남을 이용해야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참으로 지당하며 그들은 물질세상을 아주 잘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알아야할 일들이 있지요.
진정 남을 잘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모범이 되어야하며 남이 자신에게 뭔가를 해주기 이전에 자신이 남에게 뭔가를 해줄 생각부터 갖추어야합니다.
자신은 힘든 일이라고는 하지 않고 규칙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모든 규칙을 엄수하도록 말한다면 누가 들어도 웃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결과가 좋을 수가 없을 겁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므로 현명하게 살아가려면 남을 잘 이용해야하겠지만 나 홀로 목사에게 오는 이들에게는 그러한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분들만 이곳에 올 자격이 있다고 했으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길은 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서 하나님과의 하나 됨의 길이 어렵다는 것을 설명해 놓으셨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7:13)
Enter ye in at the strait gate: for wide [is] the gate, and broad [is] the way, that leadeth to destruction, and many there be which go in thereat: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4)
Because strait [is] the gate, and narrow [is] the way, which leadeth unto life, and few there be that find it.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궁핍하고 험난하고(the strait)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도 광대(wide,broad)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시류에 부합하여 살아가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겠다고 말할 수 있는지요?
이 같은 말씀은 비단 일반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목회자들에게도 경종을 울렸지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영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Beware of false prophets, which come to you in sheep's clothing, but inwardly they are ravening wolves.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7:17)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8)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마7:19)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말씀을 올리고 보니 한 가지 일이 떠오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사람들이 죄인일수밖에 없는 이유를 확인시키는데 인용을 하시더군요.
사람들이 죄 나무이기 때문에 죄가 열린다는 말씀이었는데 이 말씀을 그런데다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됩니다.
여기 이 말씀은 오늘날의 목회자들을 향해 지엄하게 꾸짖는 말씀이며 자신들의 행위가 늑대와 같다는 것을 비추어 알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된 듯이 말을 하면서 하는 짓이라고는 교회 확장과 돈을 긁어모으는데 혈안이 되어있다고 한다면 그 나중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말씀해 준거지요.
어쩌면 예수님은 오늘날 기독교도들의 잘못을 그 옛날에 미리 말씀해 놓으셨을까요?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늘날의 기독교사회를 정확하게 말씀해놓으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2)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교회마다 예수찬양을 목청껏 불러대지만 모두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 갈 수 있다고 했으니 자신들이 천국을 갈 거라고 장담하는 분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누군가 하나님 말씀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성경을 알리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자신이 믿고 있는 성경에 대한 해석이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어서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게 내가 하고 있는 성경해석이 당신의 뜻입니다 하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아무도 손을 드는 이가 없나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손을 들었더라면 나 홀로 목사는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쉽고도 다행한일입니다.
손을 들려다 그만둔 분에게는 다행한 일이며 어려운 구절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놓쳐진 것이 아쉬운 일이지요.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아직도 성경에서 모르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면 자신이 유일한 진리를 발견했다 말하기 어려우며 하나님 뜻대로 산다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바로 성령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껏 보았듯이 예수님은 우리들의 내면에서 성령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으며 성령이 자신 안에서 드러나게 되었을 때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일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의 이름하에 선지자노릇을 하며 귀신을 쫒아내는 등의 권능을 행사해도 자신 안에서 성령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천국이란 영생을 말하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천국과는 다릅니다.
아마도 누군가는 어떻게 천국이 두 개 일수가 있는가 하겠지만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천국이 여러 개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그들의 주장대로 천국과 지옥, 두 개만 있을 경우 그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성경의 내용만으로도 자신들이 어디를 가야할지 확연히 드러나기 마련인데 자신들이 지금껏 내려온 성경에 관한 고정관념을 내려놓지 않게 되면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자신이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고 말입니다.
자신이 용서받고 천국을 가고 싶다고 한다면 타인들의 죄조차 용서하고 천국을 갈 수 있게 해주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을 가야한다고 성경어떤구절이 말하던가요?
예수님조차 자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러한 망발(妄發)을 서슴없이 말하며 자신들이 자신 있게 천국을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아마도 성경을 아는 분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내용을 들먹이겠지요.
나 홀로 목사가 감히 단언하건데 이 말씀은 그야말로 옳으신 말씀이며 예수는 진정 하나님과 하나 된 이가 맞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자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간다하지는 않았지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성령과 함께 하는 이가 바로 하나님과 하나 된 자이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반드시 성령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지금껏 보았듯이 성경은 자신 안에서 성령이신 하나님을 만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요(마7:25)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7:26)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7)
성령과 함께 하는 이(예수)의 말을 믿고 따른다면 그 어떠한 풍파가 몰아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성령과 함께하는 이를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쉽지가 않으며 성령이 완전히 드러난 깨달은 스승을 만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와 같은 이를 만나기가 어렵다보니 그저 목사님이 내리는 성경해석을 따라야하는데 목사님의 생각이 올바르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성경해석을 접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지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잘못된 성경해석이라기 보다 하나님과 하나 되기에는 부족한 성경해석이라 해야 맞습니다.
성경해석을 마음대로 하고 행동 또한 거기에 맞추어서 할 때 주어지는 결과만이 달라질 뿐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이처럼 많은 종파와 많은 교회가 생기게 되는 이유가 성경을 놓고 해석하는 것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인데 그들의 해석에 따른 행동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나 홀로 목사의 성경 해석도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라는 목표설정에 따른 것일 뿐 유일한 성경해석일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하나 되는 성경해석을 알아보는 방법은 있는데 성령에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하는 것과 모든 크리스천들을 하나로 묶고 나아가서는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가 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성경의 내용이 기독교인들을 비롯하여 크리스천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면만을 부각시켜 말한다면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고 볼 수는 없으며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기도 어려우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더더욱 볼 수 없는 일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해석을 해놓은지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에 오는 분들은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지요?
다들 공감하시는 것 같으니 다음구절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마7:28)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9)
For he taught them as [one] having authority, and not as the scribes.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말씀을 하셨기에 겸손을 가장한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달랐다는 거지요.
지금 나오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 당시 서기관 (scribes)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한 것 같은데 잠시 서기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원래 서기관이란 히브리어 소페르(sopher)에서 나온 말로서 필사자(筆寫者)를 말합니다.
구전되어 내려오는 율법이나 예언의 말을 기록으로 남기는 역할을 하던 이들을 말하는데 그들의 직업상 영적인 가르침을 접할 기회가 다분히 많았으며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해석까지 했으므로 오늘날의 학자나 교수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만드는데 있어서도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내용을 얼음 알같이 알고 있는지라 예수의 말에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던 것이며 그중에 몇몇은 예수를 믿는 이들까지 생겨났지요.
그들이 놀랐던 이유가 그때까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성경내용들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는데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시각이 아니고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함께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성령과 함께하여 하나님과 하나가된 예수를 성령이라고는 본 일도 없는 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임은 물론이지요.
성령이라고는 본 일도 없는 이들이 성령을 보았다는 이를 데려다가 정신이상자나 귀신들린 자 취급을 하고 자신들이 얼마나 성경에 해박한가를 자랑하며 자신들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옥 갈 것이라 협박을 하니 그들의 앞날이 어떠할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두에서도 밝혔다시피 나 홀로 목사가 의도적으로 비판을 했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일들을 아무런 죄의식도 가지지 않고 저지르고 있는 목회자들을 위해서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짓을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있기에 그들을 도우려는 의도였습니다.
나 홀로 목사가 비판을 할 때 자신들의 마음이 어떠하던가를 스스로 돌아보며 타인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기회를 가지라는 뜻이었지요.
이것은 또한 그들의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아주려는 동시에 그들의 잘못을 씻어주려는 의도이기도 합니다.
아직은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언젠가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사실 나 홀로 목사는 지난 십여 년의 세월동안 동생으로부터 구원에 관한 숱한 권유의 말을 들었습니다만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이유가 이미 성령이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물질세상과는 전혀 별개의 세상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요.
자신들이 곧 휴거를 당하게 된다는 말을 하며 숨겨둔 통장을 가져다가 마음껏 쓰라는 말까지 하는 통에 기겁을 했습니다.
그제야 이대로 두어서는 큰일이 나겠구나 싶었고 어떻게든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아주어야겠다 마음먹었던 겁니다.
알고 보니 동생이 다니는 교회가 오대양사건을 일으킨 교단에서 분리된 곳이었는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그때부터 성경을 틈틈이 보면서 도대체 왜 이아이가 그렇게 말도 되지 않는 짓을 할까 숙고해보았는데 결국 성경을 보는 시각이 달라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시각이 왜 생기게 되는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단번에 설득을 시킬 수도 없었고 그렇게 해서 될 문제도 아닌 것이 오라비라고 하는 자가 온 집안을 말아먹다시피 했다 여기는데다가 가정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말을 할 수도 없었던 겁니다.
그들의 시각이 물질적인데 초점이 맞춰진 상태인지라 외관만 중시 여길 뿐 내면의 변화를 알 수는 없었으며 그저 자신들이 받아들인 진리의 말씀만이 전부라 여기기에 나 홀로 목사는 지옥을 갈 불쌍한 영혼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 말을 해도 그들로서는 요지부동인 것이 나 홀로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잠시잠깐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는 겁니다.
결국 성경을 앞에 두고 조목조목 설명을 해주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을 하게 되었고 지금껏 본의 아니게 성경공부를 해야 했던 거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 홀로 목사는 이 모든 것이 귀찮아서 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시도했었습니다.
지들이 성경을 잘 안다고 큰소리리치면서 천국을 간다고 확신을 하는데 내가 나서서 괜한 말을 할 필요가 뭐있겠는가 싶었기에 어떠한 간섭도 하기 싫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민계획을 무산시켰으며 한국으로 돌아와 정확하게 그들의 옆자리에 앉아서 성경을 듣도록 만들었으며 중국에서 동생과 약속했던 일을 지키게 만들었지요.
사실 3년 가까이 밀착방어(?)를 당하며 매주 교회를 열심히 다닌 것은 동생의 권유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성령의 힘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가끔씩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말을 하는 통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도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성령의 힘 때문 이었는데 나 홀로 목사에게 끝없는 인내를 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조차 사랑으로 감싸 안았는데 그까짓 자존심 구겨지는 말 정도야 못 참아 내겠는가라는 말씀이 내면에서 울려 퍼졌지요.
철없는 동생이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목사님과의 대면을 몇 번이고 주선을 했는데 그때마다 인내하라는 내면의 울림 탓에 변변하게 대응도 하지 않고 눌러 참아야만 했습니다.
참 인내하기 어려운 세월이었는데 벌써 3년이 다되어갑니다.
그동안 명상을 하는 친구들로부터도 공격 아닌 공격도 숱하게 받았으며 누군가는 간절히 부탁까지도 하였지요.
교회를 안가면 안 되는가 라는 말을 하는가하면 수준도 안 되는 이가 교회 사람들을 가르치려든다는 말까지 들어야했습니다.
어쩌다 한번은 동생에게 교회 다니는 것이 무의미하며 더 이상 다니기 싫다는 말도 한 적이 있었는데 기가 막힌 말을 들었지요.
아직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혼이 덜나서 그런 말을 한다며 좀 더 두들겨 맞아야한다는 말도 했지요.
얼마나 화가 났던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는데 집에 돌아와서는 한참을 고민해야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배웠기에 저런 말을 그리도 쉽게 할 수가 있는가 싶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형제들을 향해 욕을 해서도 안 되며 타인들을 용서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함부로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갈 거라는 악담을 할 수가 있으며 자신들의 가족을 대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시각을 갖게 되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아직 성경을 모두 보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장담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나 홀로 목사의 수준으로는 결코 그러한 구절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 홀로 목사는 성경을 모두 읽어서 기억을 하고 있지 않으며 여러분과 한 구절씩 진도를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수박겉핥기식으로는 본적이 있습니다만 세밀하게 보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영어로 된 성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내용들이 숱하게 많았지요.
이러한 내용들은 나 홀로 목사도 몰랐던 것들이며 여러분과 함께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나 홀로 목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은 나 홀로 목사를 이 세상 사람들 중에 가장 못난 사람 앞에서도 내세울 것이 없게 만들고 있으며 가장 잘난 사람들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도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나 홀로 목사가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절대 자랑삼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과 함께 한다고 해서 여기오시는 분들은 물론이며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낫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며 타인들을 향해 심판의 칼날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 세상 기준으로보자면 참으로 형편없는 삶을 살아가는 나 홀로 목사는 집도 없고 학벌도 없으며 변변한 직업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일용직과 다름없는 일을 하고 있으며 그 직업조차도 동생네의 도움으로 얻었지요.
약 서너 달 앞으로 다가와 있는 공사기간이 끝나고 나면 어떠한 일이 나 홀로 목사의 앞에 놓일지 모르겠지만 그저 모든 순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며 지낼 따름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 홀로 목사의 삶의 현주소인데 물질적 시각으로 보자면 비참할 수도 있는 삶이 빛을 발할 때는 오로지 영적인 시각을 가질 때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과 함께 한다고 해서 물질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특권을 누린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영적인 시각을 갖게 되면 무한한 성령의 축복이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분명 나 홀로 목사보다 못하지 않은 만큼 초점만 바꾼다면 나 홀로 목사보다 더욱 많은 성령의 축복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오늘의 시간은 여기에서 마칠까합니다.
홀로 거룩하신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을 믿는 많은 이들에게
그들의 마음속에 심겨져있는
선악과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선도 악도 당신이 심어놓았으며
선을 위해 악을 행하는 것도 당신이며
악한 일에 대항하여 선하여 지고자 하는 것도
당신으로 인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시고
당신이 선한 쪽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악한 쪽에도 서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람들은 말하길 자신의 행위만이 선하며
자신을 상대하는 타인들은 악하다 하지만
상대방 또한 자신은 선하며 이쪽을 악하다 하지요.
선도 악도 인간들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할 뿐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음을 우리들은
아직도 알지 못하나이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우리가 알 때
선악과는 영생과로 바뀐다는 진리를
모든 이가 알도록 당신께서 허락하소서.
육신으로 하지 못할 일을 당신은 하시나니
그들의 눈을 온전히 하나로 만들 때
성령의 빛이 온몸을 비추게 된다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알게 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