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보면 깊은 사고(思考)의 바다에서 신의식과 만나게 됩니다.
뭔가의 주제를 놓고 골몰(汨沒)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신의식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런 일이 일어나지만 어떤 이는 모르고 지나가고 나 같은 사람은 이 같은 현상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지요.
오랜 기간 동안 아들과의 대화 형식으로 글을 쓰면서 이와 같은 경험을 수없이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을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썼는데 어느 순간 아들의 입장에 내가 서게 되고 말하는 이가 신이 되어있었던 겁니다.
글을 다 쓰고 난후 내가 읽어보고 내가 놀랄 정도로 평소의 내생각과는 다른 문장들을 확인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육신과는 별개의 영혼이 우리 몸 안에 있음을 확인했으며 그 영혼이 성령과 하나라는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성령이 담겨있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말은 내가 사사로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하나님의 생명에 숨결이(the breath of life) 성령이고 사람의 몸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며 사람자체가 살아있는 영혼이라는(a living soul) 뜻입니다.
그러면 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걸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여기에 대해 정확하게 답하려면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답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인생길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에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인식이 같지 않은 까닭에 각자의 인생여정에 맞는 답이 필요함으로 일일이 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다만 성령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이들에게는 말해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말을 믿는 사람에게만 말해줄 수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해주신 말씀이라 말해 주어도 믿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 주변을 보면 알게 됨으로 모든 것은 믿음에 달린 문제입니다.
똑같은 피조물이지만 종교를 달리하면 진리가 달라진다는 것은 믿음이 모든 것을 좌우지 한다는 점을 알게 합니다.
불교신자에게 성경을 디밀어 봐야 소용이 없으며 기독교신자 앞에서 염불과 목탁을 두들겨봐야 소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사람의 가죽을 덮어썼지만 언행이 짐승에 가까운 이들이 많으며 짐승 중에도 사람만큼이나 영특한 개체(個體)들이 있음을 볼 때 인식의 수준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의 수준이 짐승에 가까운 사람도 있고 사람의 영혼이 담긴 짐승이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인생을 새삼 돌이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과연 우리가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할까를 생각하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신과의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만의 특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이 내게 일어났던 것은 내 인생의 목적지가 신과의 합일에 있었고 그러한 일을 상세하게 기록한 성경을 믿었기 때문이지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깊은 신의식속에서 내재한 신을 만났고 그 일에 대한 과정과 결말을 성경을 통해 확인한 겁니다.
아마도 내말을 듣는 이들 가운데는 자신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싶다는 이들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본인들의 목적의식을 바꿔야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눈은 하늘을 보고 있으면서 몸을 땅에다 붙이고 손발모두가 땅의 것들을 붙들고 있는데 영혼이 높은 의식세계로 올라갈 수가 없는 거지요.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마음가짐과 어떤 상태로 살아가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짐승과 같이 살아가는 자들도 있으며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넘어 신의식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지금 현재, 내 삶의 형태는 내영혼의 미래상까지 결정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일을 성경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4:1)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마4:5)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마4:8)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솔직히 말해서 이 내용을 악마 아니면 천사, 지옥 아니면 천당, 식으로 양분화 하여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렇게 극단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물질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모든 행위가 악한 것이 되고 마귀의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이 기록된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세상의 덧없을 알게 하기 위함이며 성령이 물질세상과 무관한 존재라는 점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지요.
물질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사람마다 맡은바 직분이 있으며 그 역할에 충실은 하되 인생의 궁극적 목적지가 따로 있음을 알라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3:20)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3:22)
Wherefore I perceive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than that a man should rejoice in his own works; for that is his portion: for who shall bring him to see what shall be after him?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맡은바 책무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어떤 것이든 그것은 하늘이 주신임무이자 맡은바 역할이라는 뜻입니다.(for that is his portion)
하다못해 거지도 역할이며 마왕도 역할이며 사람도 짐승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면 역할이라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맡은바 역할에 즐거워할 수 있느냐 이며(a man should rejoice in his own works) 죽음이후를 볼 수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to see what shall be after him?)
자신의 영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냐 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며 이런 영혼을 근원의 하늘로 데려올 자가 누구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who shall bring him)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왕도라는 것은 없지만 자신의 양심에 걸림이 있다면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양심은 자신 안에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이라 할 수 있지만 가끔씩 양심에 털이 나거나 변질된 사람도 있으니 이 모두는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깨끗한 이들만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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