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태복음8.

배가번드 2016. 3. 18.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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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는 나 홀로(Hholo) 목사입니다.

지난시간 높은 의식의 정점에서 예수님 말씀의 흔적을 보았는데 오늘도 산 정상에 올라가 말씀에 귀 기울여 보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룬다고 했으니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계명 중에 작은 것을 버리거나 그같이 가르치게 되면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 했으며 의롭기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정말 이러하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율법을 올곧게 지키기란 참으로 불가능할 터인데 어떻게 해야 우리들이 천국을 갈수가 있을는지요?

누군가 율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 지킬지 말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라고 말씀하시는군요.

그 말씀이 참으로 옳다고 여겨지는바 잠시 율법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율법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를 말하지만 예수생존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은 구약에서 말하는 613개항의 율법을 모두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강제적으로 하라고 하는 조목이 248개, 하지 말라고 하는 조목이 365개가 있는데 그 모든 율법들을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겁니다.

특히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자신 스스로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지킬 것을 강조했지요.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이미 구약에 나와 있는 율법을 지키면서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뭐 하러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강조하셨을까요?

아마도 여기에는 뭔가 특별한 뜻이 있을 것 같은데 성경에서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2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마5:23)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4)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5:25)

Agree with thine adversary quickly, whiles thou art in the way with him; lest at any time the adversary deliver thee to the judge, and the judge deliver thee to the officer, and thou be cast into prison.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6)

 

 

21절의 말씀은 출애굽기20장 13절에 “살인하지 말지니라”(Thou shalt not kill)를 인용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중에 한 구절을 예수님께서 인용한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는데 그때까지 구약의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살아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율법에 대한 의미와 육신의 한계를 말씀하신 겁니다.

어찌 보면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말씀은 이세상의 법칙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인과의 세계인 이 세상에서 하는 그 어떠한 일도 그냥 일어나는 법이 없으며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물질세계의 법칙은 우리나라 속담에도 나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

 

 

물질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한 치의 오차가 없이 인(因)과(果)가 분명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거지요.

그런데 예문으로 올린 22절 말씀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영어로 보면 위험에 처해진다고(be in danger of) 되어있는데 한국어 성경은 극단적인 표현으로 심판을 받게 되고 공회에 잡히며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했으니 잘못 번역한 것 같다는 거지요.

그리고 형제에게 이유 없이(without a cause) 화를 내면 심판을 받는다 했는데 불구하고 형제에게 노하는 자 마다라고 기록한 이유가 뭔지 정말 궁금합니다.

이와 같은 번역상의 오류가 예수님말씀의 진정한 의도를 흐려 놓는다는 것을 성경학자들은 알 수가 없었겠지만 이 또한 성경을 통해 진정한 진리의 길을 찾아내기 위한 시험의 일종이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극단적인 표현보다는 심판받는 위험에 처해진다거나 지옥불의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거기에 대한 해답이 25절에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을 보게 되면 25절이 24절과는 별개의 내용인 것 같지만 실상은 21절부터 24절까지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사람들의 인식세계를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영어로 된 성경은 각자가 해석해보기로 하고 나 홀로 목사는 전체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말씀의 요지는 모세가 1300년 전(기원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을 죽이면 심판을 받는다 말을 했지만 실질적인 하나님 법을 보자면 형제에게 욕만 해도 벌을 받을 수 있으며 그러한 일들이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원망 받을 일이 생각나면 사과를 한 후 제물을 드리라고 말을 했던 것이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가 있을 경우 함께 하는 동안 동의해주라고 했던 거지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대화를 하거나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아 다투거나 화를 낸 적이 없었습니까?

그럴 때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서 상대편을 향해 함부로 심판을 내린 적이 없는가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시는군요.

바로 이와 같은 일이 반대편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상대하는 상대방이 나를 향해 심판을 하고 그들의 인식 속에서 나를 이미 지옥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시라는 겁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생각하거나 말거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한다면 그분은 성령과 하나가 된 분이거나 성경을 모르는 분이 분명합니다.

자신이 이미 영의 세계를 알고 예수님처럼 자신의 영혼이 어떠한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면 육신과는 별개의 세상을 산다 할 수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무관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육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면 인과의 고리가 형성이 되어서 누군가 그 사람에 대한 원망의 끈을 놓지 않게 된다면 계속해서 주고받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좀 더 분석해 보겠습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Agree with thine adversary quickly, whiles thou art in the way with him;

 

 

영어 성경과 한글 성경을 비교해보면 조금의 차이가 보이지 않습니까?

분명이 예수님은 나에게 반대하는 이(adversary)가 나와 함께 어떠한 일을 하는 동안 빨리 동의 해주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한글 성경처럼 재판과정에 있는 이와 화해를 하라는 말이라고 한다면 재판하는 동안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테지만 art in the way 라고 기록했다는 것은 뭔가의 행동을 하는 동안이라는 폭넓은 의미가 분명합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다음구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lest at any time the adversary deliver thee to the judge

 

 

대적하는 자가 언제든지 재판관에게 데려갈까 걱정된다는 말이지요.

만약 송사중인 사람이라고 했다면 재판관에게 데려갈까 염려할 까닭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놓고 보면 단어 adversary를 송사(訟事)라고 번역한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뒷부분에 재판관에게 끌고 가거나 감옥에 보낸다는 말 때문인 것 같은데 이러한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로서 의식상태의 심오한 진리를 말씀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재판관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식 안에서 심판을 내리는 것을 말하며 감옥이란 인식의 틀 안에 갇히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바로 상대방의 인식의 틀 안에서 내가 죄인이 된다는 것을 말해놓은 것이며 이럴 경우 그의 인식 속에 나의 인식 일부가 갇히는 것이 됩니다.

조금 어렵나요?

그렇다면 입장을 다시 한 번 바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그와 화해를 하지 못할 경우 그는 내 인식 속에서 늘 죄인으로 남게 됩니다.

그것처럼 상대방이 나에 대해 원망을 하거나 내 잘못을 인식하고 있을 경우 나는 상대방의 인식 안에서 죄인이 되고 있는 겁니다.

이제 이해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결말을 내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정말 우리들이 어떤 사건을 놓고 시비가 벌어질 때 무조건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그들의 말에 따라 주어야 할까요?

물론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말씀하셨지요.

형제와의 일을 비유로서 말씀하시길 이유 없이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화를 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누군가는 말할 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이들과 논쟁을 벌이며 소송까지도 불사하는데 이유 없이 화를 낼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그럴 경우 시비는 어떤 기준으로 가릴 것인가 하겠지요.

거기에 대한 말씀도 분명하게 비유로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마5:23)

 

 

예물을 제단에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말씀에 비추어본다는 의미로 자신의 양심에 비춘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렇게 보면 양심이란 하나님과 마찬가지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분들이 보이는데 다들 양심에 털이 난 사람도 많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양심에 털이난 사람들은 자신이 저질러놓은 일에 대한 반대상황을 반드시 경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때 가서야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알게 되며 올바른 양심이 생기게 될 겁니다.

지옥 같은 세상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지요.

아울러 이러한 일들은 불량품 양심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6)

 

 

과연 이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는지요?

누구라도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러한 규정에 합당할 수 있는 이들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자신의 영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며 육신이 자신이라는 인식하에서는 심판의 그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의가 더 낫지 않으면 천국을 갈 수 없다는 말은 육신으로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며 물질적인 의보다는 영적인 의가 훨씬 높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던 자들인데 그들보다도 더욱 강하게 율법을 강조하신 것은 육신의 한계를 알고 자신 안에 깊숙이 잠자고 있는 성령을 깨달아 알라는 말씀을 하신 거지요.

또한 이 말씀은 아직 자신 안에 내재한 성령을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주는 하나의 율법이라 할 수 있으며 율법이 이미 생활화 되어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강한 율법을 주고자 말씀하신 거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이 많은 것 같으니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들을 타본 적이 있을 겁니다.

다들 무서워하면서도 스릴을 맛보기위해 타는데 자꾸 반복해서 타다보면 시들해져서 점점 더 강도가 높은 것들을 타게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이 남들이 지키기 어려워하는 율법을 지키다보면 율법의 강도가 더욱 높아지는 것을 원하게 되며 남들이 지키기 어려운 것을 해낸다는 희열을 느끼는 거지요.

어떻게 아느냐고요?

나 홀로 목사가 오랜 시간 이러한 생활을 해보았기 때문에 잘 압니다.

계율을 목숨처럼 여기는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으며 멸치도 먹지 않는 식사를 지금까지도 하고 있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유제품도 먹지 않는 채식으로 식단을 업그레이드 시켰는데 과거와 비교해보면 더욱 어려워졌다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의 나 홀로 목사는 과거에 비해서 상당히 유동적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고기를 먹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물론 식당조차 가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심지어 술좌석에 동참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한계점을 깨닫고 난후에 온 자각이지요.

그렇다면 왜 아직도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요?

과거에는 계율로 인해 고기를 먹지 않았지만 이제는 동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구태여 생명을 파괴하지 않고도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채식을 고집하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채식과 환경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명상단체에 속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말이 주제와는 약간 벗어나는 것 같은데 어찌되었건 육신의 한계점을 깨닫게 된 것은 사실이며 이 같은 일이 성경에도 나와 있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직접 영을 깨달아야한다 말씀하시지 않고 비유로서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자신들이 직접 경험을 해보고 아는 것과 말만 듣고서 아는 것의 차이점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자신의 영을 깨닫기 위해서는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완전하게 알아야 하는데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해볼 만큼 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이 있었듯이 자신이 의롭다는 행위를 해봄으로서 의로움의 끝이 없음을 알게 되며 결국 그러한 깨달음은 육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성령에 완전히 맡기는 삶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여러분은 얼마나 의로울 수 있습니까?

나 홀로 목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육신으로는 의로울 수 없음을 깨달았으며 내의로움은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대적이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총을 들고 나라를 위해 의롭게 일어섰는데 알고 보니 상대편 국가에서는 내가 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와 같은 일이 종교를 비롯하여 세상 어떠한 일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이러한 일들은 피할 수가 없으며 육신을 벗어나서 영일 때라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영이라고 해서 다 같은 영은 아니며 높낮이 없는 영이 될 때라야 영원한 생명이신 성령이 함께 한다 할 것입니다.

아마도 몇몇 분은 지난시간 나 홀로 목사가 의로움을 말할 때 오늘과 다른 해석을 한 것을 두고 문제를 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알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육신으로 의롭다고 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은 자신이 성령을 완전히 깨달았을 때 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타인들을 향한 심판의 잣대를 완전히 내려놓은 상태에서 말을 하는 거지요.

그러나 지난시간 말했던 성경 공부하는 분은 입만 열면 타종교를 비판하고 남을 향해 지옥을 간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육신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는 말을 함부로 남용한다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까요?

오늘 우리들이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형제를 향해 라가라 하는 자도 지옥 불에 떨어질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형제가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담의 자손이 아니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 사람이 단한사람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성경은 거짓말을 기록한 책이 되고 하나님만이 창조주라는 말도 거짓말이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누구라도 자신 안에서 성령을 발견하게 되면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한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사람들을 가르칠 때 타종교나 종파를 공격하지 않고 하나님이신 성령을 깨달아야한다 말을 하며 사랑을 설한다면 나 홀로 목사는 그분을 주저 없이 따를 것이며 적극적으로 도울 것입니다.

말이 길어졌나요?

이러한 일들은 성경을 보다보면 자주 확인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바 예수님의 다음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27)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27절의 말씀 역시 출애굽기 20장 14절의 말씀인데 이모두가 육신의 한계점을 말씀하신 거라 봐야합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러한 정도의 청정함을 실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모두가 앞서 보았듯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을 조롱하는 말들이며 제자들에게도 육신의 한계점을 알게 하려는 가르침이었지요.

하지만 여러분 모두는 알아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같은 말씀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자신이 성령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면 끊임없이 뉘우치고 의로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거지요.

모르긴 해도 몇몇 사람들은 육신의 한계점을 깨닫고 성령의 내재함을 안다고 하면 이 같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문에서도 보았듯이 육신으로 지은 죄는 육신이 받게 되어있으며 물질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영적으로 돌아오게 되어있다고 했으니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을 완전하게 깨달은 사람들은 율법과는 무관하다 할 수 있겠으나 사는 동안은 육신으로 똑같은 상황을 겪게 됩니다.

단지 받아들이는 인식이 다를 뿐이며 외형적으로는 마찬가지의 적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아야할 것은 성령이 함께 하는 이들은 타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려고 노력을 할뿐 함부로 행동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세상에는 많은 목회자들이 있으며 그들 모두가 성경을 공부합니다.

그들이 성경말씀을 통해 육신의 한계점을 알고 자신 안에 내재한 성령을 깨달았다고 했을 때 과연 어떠한 행동들을 할까요?

남의 여자를 취하고자 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려는 마음을 먹을 수 있겠냐는 겁니다.

이것은 나 홀로 목사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살아생전 벌을 받거나 지옥 같은 경험을 할 것이 분명하며 살아서 어떠한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죽어서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물을 보게 되겠지요.

하지만 정말 성령이 함께 해서 걱정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그 어떠한 행동도 상관이 없을 것이고 죽어서도 걱정이 없는지라 나 홀로 목사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큰 빛을 보았는지 어떤지는 자신이 잘 알 것이며 성령이 함께 하고 못하고도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비추어볼 때 육신을 자신으로 아는 이상은 지옥의 형벌을 못 면한다는 겁니다.

또한 이 말씀은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가르쳐야하는 제자들의 행동을 단속하는 의미에서 하신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대변해서 복음을 전파할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경외심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사람들로부터 금품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육신적인 욕구를 해소하려 든다면 어떠한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지금 현시대에도 이와 같은 일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불과 얼마 전까지 기독교도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던 목회자 몇 분이 물질적인 일로인해 검찰에 고발을 당하거나 목사직에서 쫓겨나는 일이 일어났지요.

그나마 이분들은 사는 동안 이러한 과보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일어나지 않은 분들이야말로 크나큰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을 믿는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하는 부분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절대 지옥은 가지 않으며 천국에 가서 받는 상이 다르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말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와 같이 기록해놓은 구절들도 있지요.

하지만 그러한 말들은 자신 안에서 성령을 완전히 드러낸 분들이 써놓은 말들입니다.

그분들이 성경에 기록해 놓은 말들은 그 시대에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위해 했던 말이며 성령을 완전히 드러낸 살아있는 스승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 주는 축복의 말씀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은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없으며 다수의 성직자들의 설교에 의지를 하는데 그런 분들이 성령과 함께 하지 못할 경우 성경말씀처럼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를 져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아직 자신의 영을 제대로 본적도 없는 이들이 함부로 인용할 말이 아니라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심하게 율법을 강조한 까닭이 바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 걱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완전히 이해가 되었지요?

예수님의 말씀에는 물질적인 면과 영적인면이 동시에 담겨있음을 지금까지 확인을 했으니 다음에는 또 어떠한 말씀을 하셨는지 볼까요?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절은 신명기에서 인용한 내용인데 아마도 모세가 말한 것과는 뭔가 달라졌기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 것 같으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신24:1)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신24:2)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신24:3)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신24:4)

 

 

예문을 올리고 보니 참으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분들이 보면 성경을 믿고 싶지 않는 내용들 일색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아내를 데려왔는데 순결하지 않으면 이혼증서를 써서 보내라고 했고 그 후에도 재가를 한 전처가 또다시 남편에게 버림을 받거나 죽어서 다시 올 경우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으니 순전히 남자들 위주로 말씀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문제는 아닙니다.

모세가 혼전 순결만을 고집한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여길 문제가 아닌 것이 남편이 아내의 수치를 발견하고 기뻐하지 않거든 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남편이 아내의 혼전순결 유무를 이해할 경우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살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이라는 점을 우리들이 감안한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 존재하는 밀림지역의 원주민 사회에서는 여성이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시집을 왔을 경우 신랑이 신부를 마음대로 죽이는 풍습이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신사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멀리 원주민 사회를 볼 것도 없이 중동지역의 이슬람국가만 봐도 그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고 차도르를 벗지도 못하고 지내고 있는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으니 성경속의 모세는 그 시대의 여성권위를 주장하는 사람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

그때당시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생활풍습을 모세가 바로잡기 위해서 말을 해놓은 것입니다.

또한 문란한 성생활을 막기 위해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세의 말씀을 올곧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부로 아내의 트집을 잡아 이혼을 하고 새로운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자 그 당시 사람들의 잘못을 예수가 지적한 겁니다.

그때의 시대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모세시대만 하더라도 부족 간에 전쟁이 숱하게 있었을 것이고 예수시대에도 전쟁이 있었던지라 아이가 딸린 과부들이 많았었지요.

그러한 과부들의 생계를 위해서 누군가 책임을 져야하는지라 불가피하게 일부다처제가 만연했을 겁니다.

그 시대가 만들어놓은 생활풍습이었는데 그러한 것들이 고정된 사회통념으로 자리 잡을 때 부작용들이 발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아내를 함부로 버리고 취하는 것을 나무랐던 거지요.

당연히 이 같은 말은 이 시대에도 통할 수 있는데 우리들이 얼마나 바르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좋게 해석할 수가 있지요.

한때는 나 홀로 목사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일평생을 보내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게 여겨진 적이 있습니다.

남자가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여러 여자를 취해도 된다고 생각했었지요.

성경에도 많은 이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성을 하나의 귀속 물로 여기거나 남존여비사상에 물든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그와 같은 생각이 힘을 얻지만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이 될 때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일부다처제가 좋다고 할 수 있으려면 일처다부제도 허용되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누군가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주장한다고 하면 그분은 언젠가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의 나라에 다시 태어날지도 모릅니다.

사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선택의 장들을 눈앞에 두고 많은 유혹을 받곤 하는데 그 모두가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저지르는 일들은 모두가 자신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한다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토록 엄하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나 홀로 목사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예쁜 여성을 보면 끌리는 마음이 들지 않느냐는 거였지요.

그때 말하길 당연히 끌리는 마음이 있으며 눈길이 가지만 육체적인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가 두 가지 있었는데 첫째로 내가 여러 사람을 책임질 만큼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가 그 같은 일을 슬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 다시 묻게 된다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겁니다.

 

 

“우리의 인식이 육적인데 머물게 된다면 육신이 끌리는 데로 행동하겠지만 자신의 내면에 성령이 심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성령은 이미 만물 안에 깃들어 있는지라 구태여 누구와의 관계를 새삼스럽게 가질 필요도 없이 우리들은 하나가 되어있습니다.”

 

 

어떤가요?

여러분들도 나 홀로 목사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을 살다보면 불가피하게 이성간에 접촉을 하게 되는 일이 참으로 많으며 신체적인 접촉이 잦다보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할 때 두뇌는 참으로 빠른 회전을 합니다.

자신 행동의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온갖 말들을 성경에서 찾으려고 하지요.

그러다보면 정말 그와 같은 구절을 찾게 되기도 하는데 그 모두가 자신 안에서 깊숙이 도사리고 있던 마귀의 장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를 물질세계에 잡아두려는 마왕의 속임수이지요.

앞서 우리들이 예문을 통해 보았듯이 그 시대에는 거기에 맞는 생활방식이 있으며 그곳에 합당한 규범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일들을 이 시대에 적용시키려고 한다면 그기에 상응하는 일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물질 세상의 감옥이 될 수도 있으며 입장을 바꾸어서 경험을 할 수도 있으며 인식속의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사자의 인식정도와 관계가 있으며 믿음생활을 하는 구도자라면 자신의 믿음정도와 비례하게 될 겁니다.

이제 우리들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은데 자신의 내면에서 성령을 확인한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세상법도에 맞게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을 깨닫지 못한 이들은 성령을 깨닫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하고 성령과 함께 하는 이는 모범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킬 것이 분명하니 율법이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틀린바가 없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지요.

또한 우리들은 율법이란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도 배웠는데 다음시간에는 성경을 통해 모세의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의 율법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확인해 보도록 하고 오늘의 시간은 여기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영원 속에 거하시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과거, 현재, 미래에 공존하고 계시지만

인간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의 조상은 과거에 살았고

나의 후손은 미래에 살 것이고

나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믿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말들을 합니다.

 

당신이 그들과 함께 한다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는지요.

 

 

당신과 함께 한다는 것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영원 속에

있음 일진데 어찌 조상이 있고 후손이 있고

내가 있는지요.

 

 

육신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분리되어 있어도

육신을 벗은 우리들은 당신과 하나일진데

 

 

그렇지 못하다 여기는 것은

죄를 짓는 내가 있고 벌을 받는 내가 있기 때문이지요.

 

 

세상에 많은 이들은

귀가 있음에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음에도 보지 못하니

당신을 향한 그리움은 깊어만 가옵니다.

 

 

간절히 청하옵건대

당신의 권능으로 귀를 열고 눈을 열어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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