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태복음6.

배가번드 2016. 3. 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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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홀로(lonely) 조용히 앉아 모든 이들의 홀로(holo)됨을 바라며 홀로(only)거룩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나 홀로 목사입니다.

지금까지 나 홀로 목사가 성경에 대해 말했던 것이 오늘로서 9번째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다지 긴 시간인 것 같지는 않은데 벌써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서서 유명해 지고자 한다는 둥 혼자 잘난 체 한다는 등의 말들을 합니다.

참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말들을 하고 있는데 나 홀로 목사가 뭐가 답답해서 세상의 명예를 탐하고 재물을 탐하겠습니까?

이미 20년 가까운 세월을 물질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유명해 지고자 하며 세상의 명리를 탐할까요?

하나의 종교를 만들고 싶어 한다고요?

웃기는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15년 전에 누군가로부터 하나의 종파를 만들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한마디로 거절을 했으며 지금까지 여러 사람으로부터 그럴듯한 제의를 받아왔지만 그 어떠한 권위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그때는 성경을 보기도 전이었고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 제의를 받았지요.

그런 사람이 왜 그러한 것을 원하겠습니까?

죄송하지만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할 수밖에 없군요.

처음 나 홀로 목사의 출범시간에 말을 했듯이 언제든지 성경해석을 그만둘 수 있다고 말을 했지요?

지금 경고들에 빨간불이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성경해석이 필요한 것은 성경해석을 잘못하고 있고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이미 알고 있는 이에게는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정말 성경해석이 명확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여기에 올 필요도 없고 그는 이미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좀 더 알아야하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출범을 알리는 시간에 말을 했듯이 가족들에 대한 연민에 의해 교회를 나가고 있으며 그들의 성경해석이 보다 물질적인데 대한 잘못된 인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지 어떠한 물질적 보상이나 정신적 보상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 홀로 목사가 하고 있는 성경해석은 가족들에게 물질적인 신세를 진일에 대한 보답차원일 뿐이며 직업으로 삼고 있는 지금의 일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을 맺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많은 시간을 희생하며 성경해석을 해주는 대신 그 어떠한 비난이나 겸손치 못한 반응도 접수하지 않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곳에 얼씬 거려서도 안 되고 한 번 더 경고등이 올리는 순간 성경해석의 시간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다시는 이와 같은 해석을 접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 홀로 목사는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 그 누구와도 동조를 하지 않으며 그 어떠한 종파나 종교에 구속됨이 없이 오로지 홀로(holo)되신 하나님께만 동조를 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끌어다 앉혀 놓을 수 있겠지만 내 의식을 바꾸거나 억지로 자신들의 일에 협조하도록 만들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다만 내면적으로 기도를 하며 진심으로 성령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내면의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들을 도울 것이며 비록 육신은 그들에게 반대적인 입장을 표명하더라도 성령은 그들과 늘 함께할 것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 홀로 목사의 성경해석도 어찌 보면 진심으로 알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안배이기도하며 성령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허락된 시간만큼 성경해석에 최선을 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두가 길었지요?

지난시간은 예수님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신 내용을 보았는데 오늘은 그이후의 일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마4:14)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마4:15)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6)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이 말씀은 이사야서 9장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9:1)

Nevertheless the dimness [shall] not [be] such as [was] in her vexation, when at the first he lightly afflicted the land of Zebulun and the land of Naphtali, and afterward did more grievously afflict [her by] the way of the sea, beyond Jordan, in Galilee of the nations.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9:2)

The people that walked in darkness have seen a great light: they that dwell in the land of the shadow of death, upon them hath the light shined.

 

 

이렇게 예문을 올려놓고 보니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이사야서 9장의 내용은 8장의 연장선에 있는 내용이고 8장은 7장의 연장이니 정말 기가 막히도록 대단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난시간 마태복음2편에서 7장의 내용을 보았듯이 그 일연의 일들이 모두 연결고리들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이문장 하나만으로 그 모든 것들을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인용한 이 내용이 뜻하는바가 뭐라는 것은 조금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만큼 몇 구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쓰라(사8:1)

Moreover the LORD said unto me, Take thee a great roll, and write in it with a man's pen concerning Mahershalalhashbaz.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 하시더니(사8:2)

And I took unto me faithful witnesses to record, Uriah the priest, and Zechariah the son of Jeberechiah.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며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사8:3)

And I went unto the prophetess; and she conceived, and bare a son. Then said the LORD to me, Call his name Mahershalalhashbaz.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을 세밀하게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2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 선지자(the prophetess)에게 임하여 아이를 갖게 한다고 나와 있지요.

이것을 보고 많은 성경학자들이 이사야의 아내가 예언자(선지자)라고 하며 이사야가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스알야숩이고 둘째가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합니다.

정말 그러한지 상세하게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2절에 이어 계속되는 장면이라는 것을 3절 and 라는 접속사가 말해주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분명 이사야가 자신의 아내와 동침을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의 몸에 임하여 아이를 잉태했다는 말이 됩니다.

선지자란 원래 이스라엘백성들의 영적지도자를 뜻하는 말로서 성경에 나오는 많은 영적지도자들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과 하나 됨의 은총을 입었던 영적인 스승을 뜻하지요.

이렇게 보면 이사야는 7장에서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로 8장에서도 구도의 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비유로서 말해놓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헬살랄하스바스가 어떤 뜻인지 알아야겠지요?

히브리어로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전리품(노략물)이 속히 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구도자(여선지자)의 몸에 성령(하나님)이 임하면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러한 아이에게는 전리품이 바로바로 주어진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이 심어지게 되면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한 결과(전리품)가 곧바로 주어진다는 말이 되는 거지요.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남몰래 하는 못된 짓에 결과가 오지 않는다면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증거가 바로 이어져 나옵니다.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니라(사8:4)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란 영적인 길에 반대되는 육적인 산물들을 말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물질세계의 왕(앗수르)에게로 옮겨진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간 시간에 이사야서 7장을 보면서 말해주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잠시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왕 베가가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을 치러온 사실을 통해 이사야가 영적인 구도자의 내면세계를 말해 놓은 것이라고 했었지요.

바로 이러한 상태를 말해놓은 겁니다.

7장 내용과 8장에 나온 내용은 전혀 다르다는 분이 있다면 다음 장면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라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사7:8)

 

 

65년이란 사람의 일생을 말한 것이며 사는 동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으면 물질적인 방해물들은 마음 안에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며 이와 같은 일들을 믿지 않으면 영적인 성과를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7장과 8장이 연결된다는 것을 확인 하였으리라 여겨지는바 다음구절로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사8:14)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사8:15)

 

 

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두 집은 예루살렘을 쳤던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를 말하는 것으로 영적인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의 방해물을 말하는 동시에 물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구도자의 마음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마음의 두 가지 측면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물질을 추구하고자 할 때에는 사사건건 거치는 돌이 되며 걸리는 반석이 되고 영적인 길을 목표로 삼고 걸어갈 때에는 구도자(예루살렘)의 마음을 붙들어 두며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는 함정과 올무가 되는 겁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은 자신의 삶을 살펴보면 확연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말씀이 착하게 살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현실은 거짓말도 해야 하며 때로는 악하기도 해야 하는지라 참으로 힘든 매일이 되곤 합니다.

물질세상을 보다 잘살기 위해서는 믿음생활이 걸림돌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목표가 영적인 삶일 때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이의 삶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며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거민이란 성지 안에 거주하는 자를 말하는데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말해도 전혀 틀린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라고 한 겁니다.

이제는 명확하게 이해가 되었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은 우리들이 아주 깊이 상고해야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사8:16)

Bind up the testimony, seal the law among my disciples.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8:17)

And I will wait upon the LORD, that hideth his face from the house of Jacob, and I will look for him.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자신의 제자에게 율법으로 봉함을 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 말씀은 분명 하나님도 제자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과도 같은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여기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가 바로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으니 그가 바로 성령이 함께하는 그 시대의 스승인 것이며 그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를 스승으로 모실수가 없습니다.

이미 이사야는 죽고 없으니까요.

그럼 하나님의 제자가 영원히 될 수 없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가 말한 모든 내용을 실현시킨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하신다)이며 그가 바로 스승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아직도 살아있는가요?

아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요?

예수가 되살아날 동안 기다려야 할까요?

많은 분들이 그렇다고 하는군요.

그런 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는 이사야가 다시 올 것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말까지 스스럼없이 했는지요?

예수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고요?

그렇다면 왜 그는 구약의 많은 구절들을 인용하며 자신이 구약에서 예견된 인물이라고 말을 했을까요?

그저 자신이 홀로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기적의 힘을 써서 보여주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나 홀로 목사는 예수를 폄하하거나 예수를 불신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속의 많은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일수가 있어야만 여러분들도 예수와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그토록 심하게 외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망령에서 멀어질 수가 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령이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가 세상을 떠나고 난후 2천년동안의 긴 시간동안 예수와 하나가 되거나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예수만이 유일하게 구원의 메시아라고 한다면 성경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거짓말을 기록한 것이 됩니다.

정말 간곡하게 부탁하건데 깨어나십시오.

야곱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잘못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이사야가 알았기에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신다는 말을 한 겁니다.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면 이사야가 말한 다음내용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사8:18)

 

 

이사야 자신과 제자들이 하나님 말씀의 실현자라는 말로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제자가 되는 올바른 방법을 일러줍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하라(사8:19)

And when they shall say unto you, Seek unto them that have familiar spirits, and unto wizards that peep, and that mutter: should not a people seek unto their God? for the living to the dead?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8:20)

To the law and to the testimony: if they speak not according to this word, [it is] because [there is] no light in them.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사8:21)

And they shall pass through it, hardly bestead and hungry: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when they shall be hungry, they shall fret themselves, and curse their king and their God, and look upward.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사8:22)

And they shall look unto the earth; and behold trouble and darkness, dimness of anguish; and [they shall be] driven to darkness.

 

 

 

19절의 말씀은 구도의 길을 걸어가다 어려움에 마주쳤을 때 누구나가 한번쯤은 경험하는 일이기도 한데 영을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에 영적인 일을 알고 있다고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어떠한 일이 발생되는가를 말해놓은 것이며 개인의 구도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해놓은 것이기도 하지요.

이사야시대에 이와 같은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기에 진정한 영적 스승을 알아보는 방법을 말했으며 영적인 일을 안다고 하는 이들의 말이 율법과 증거의 말씀에 합당한지를 보라는 말입니다.

앞서 말한 여러 가지의 일들에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들에게는 빛(성령)이 없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또한 이것은 자신이 걸어가는 믿음의 길이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길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해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정말 제대로 된 성령이신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한다면 증거라고 할 수 있는 빛(성령)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구도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빈곤에 처하게 되며 그러한 빈곤은 조급한 마음을 만들어 내게 되고 급기야 하늘을 쳐다보며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저주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영적인면만(하늘) 아니라 물질적인 면(땅)에서도 환난과 고통의 어둠속에 놓이게 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처음 예문으로 들었던 이사야서 9장 1절의 내용이 이해가 갑니다.

8장 후반부에 보았던 흑암 속에 거하던 이들이 하나님의 저주에서 해방이 되어 빛 속으로 나오게 되는데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9:2)

The people that walked in darkness have seen a great light: they that dwell in the land of the shadow of death, upon them hath the light shined.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사9:6)

For unto us a child is born, un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shall be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lor, The mighty God, The everlasting Father, The Prince of Peace.

 

 

구도자들의 믿음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커다란 빛이 비추게 되면 더 이상 고통의 흑암 속에서 헤매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우리 안에 났다는 것은 자신 안에 성령이 완전히 깨어남을 말하는 것으로서 큰 빛(성령)을 본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이사야서 내용을 완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겨서 살았던 겁니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4:13)

 

 

이제는 왜 그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구약을 연구하며 평생을 지내는 이들이 즐비한 이스라엘에서조차 성경에 대한 해석을 잘못했기 때문인데 아기라는 말을 자신 안에서 성령이 심어지는 것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태어난다고 믿었기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들을 다스리고 이끌어줄 정치적이고(the government)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며(The mighty God)영원히 살아 숨쉬는(The everlasting Father) 지도자를 기대했던 거지요.

하지만 예수는 이사야서가 말하는 것이 어떤 뜻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처럼 큰 빛을 본 사람이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보았듯이 예수는 빛이 함께 했지요.

빛(성령)이 함께 했다는 것은 빛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사십일 주야를 묵상한가운데 빛(성령)을 보았다는 것을 예수가 알고 있었기에 광야로 가서 자신역시 40일 주야로 묵상을 하였고 자신내면의 시험을 받았던 겁니다.

그 당시에 모세는 예수의 멘토였습니다.

 

 

산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출24:17)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출24:18)

 

 

더욱 많은 예문들이 있지만 모두가 아주 심한 비유의 말들이라 모두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자신 안에 성령이 깨어나지 않고서는 구약속의 비유의 말들을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예수와 같은 이들은 자신 안에서 빛을 본지라 알 수가 있었던 겁니다.

생각에 따라서는 예수가 일부러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구약의 말씀을 이용하여 사는 곳을 옮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만 여겨서는 곤란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너무나 각박하고 힘이 들다 보니까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수가 없기에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며 예수님 같은 이가 바로 그러한 사람인거지요.

만약 예수 같은 이가 이 세상에 없다고 한다면 많은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이유로 종교나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성직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지요.

말을 하다 보니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인도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을 존경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스승을 더욱더 존경하며 따르는데 그이유가 하나님은 세상에 편재하시는지라 직접 인간들 일에 관여를 하지 않지만 스승은 제자들의 일에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은 스승을 하나님보다 더욱 크게 믿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 내면에서 빛(성령)을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스승이 필요하며 그러한 스승을 목숨처럼 아끼며 존경하는 거지요.

예수가 존경받는 이유가 자신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았으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그러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 당시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한 유대사람들의 빛나는 머리에서 나오는 비난의 화살들을 감수하며 사람들에게 영적인 선물을 주고자 했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대단한(머리가 단단함) 사람들이 이 시대에도 충분히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들과 논쟁을 일삼으며 타인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지 못해 안달들을 합니다.

자신스승이 최고라는 초등학생수준의 생각에 빠져 남의 스승알기를 발톱 밑에 때만큼도 여기지 않고 있지요.

그들의 성경해석을 보면 다분히 호전적인 동시에 물질적이며 전혀 영적이지가 못합니다.

때로 옳은 말을 한다싶다가도 여기저기서 듣거나 누군가의 말을 카피를 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나곤 하는데 자신의 깨달음이 아니라 남의 것을 가져다가 급조를 했기에 앞뒤가 맞아들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자신 안에 성령이 완전히 드러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함에도 도무지 겸손과는 담을 쌓고 살고 있습니다.

너무 심했나요?

심하다 싶은 분들은 제발 부탁이니 여기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낮 시간 동안 힘들게 일을 하고 돌아와서 쉴 사이 없이 며칠을 성경을 들여다봐야 겨우 한편을 만들 수 있는데 이러한 성경해석을 보면서 고마움보다는 비난을 하며 조롱을 일삼는다면 욕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알아야합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는 십자가에 못을 박혀가면서 그들을 용서했지만 나 홀로 목사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십자가에 못을 박히는 시대도 아니며 과거처럼 비유로서 말을 해야만 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예수가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주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흑돼지인지 백 돼지인지도 모를 이들에게 무료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주는 이유는 그들 안에 성령이 들어있다면 이글을 다이아몬드로 볼 것이요 성령이 없다고 한다면 돌멩이로 보일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 누군가 도둑질을 하듯이 훔쳐간다고 해도 자신의 집으로 옮기는 순간 돌멩이를 가져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이것은 절대 나 홀로 목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흑암에 머물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성령이 함께하는 예수와 같은 이를 하나님은 보내주셨지만 2천 년 전에는 십자가에 매달았고 근대(近代)에는 기름에 튀겨죽이거나 화형을 시켰으며 오늘날에는 조롱과 멸시를 보내곤 하지요.

이들의 이와 같은 행위 때문에 그들은 죽는 날까지 성령을 볼 수가 없을 것이며 남의 말을 인용하여 전달해주는 앵무새 역할밖에는 주어질 것이 없습니다.

이래서 남의 스승을 함부로 업신여기거나 조롱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정말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되고 싶다면 이러한 행위부터 중단을 해야만 합니다.

예수를 드높이기 위해서 남의 스승을 비난 한다는 것은 예수를 높이는 데는 효과가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예수와 하나 됨을 경험하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조차도 자신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할 때 크나큰 시험을 거친 후에야 시작 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앞서 예문을 통해 보았듯이 자신이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내면에서 성령이 깨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했지요.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 구절을 참으로 많이들 써먹습니다.

그렇지만 모두들 올곧게 해석을 못하고 있지요.

앵무새처럼 말들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만약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이 개인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멸망을 말하는 것이라면 예수도 거짓말쟁이가 되겠지요?

이 천 년 전에 멸망을 말했는데 아직도 지구는 멸망을 하지 않고 잘도 돌아가니까요.

이 말씀은 자신이 죽기 전에 영혼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놓은 것으로서 지금껏 육신에 초점이 맞춰져서 살던 삶의 방식을 성령에 초점이 맞춰진 삶으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치시는 기적을 보인 것들은 모두가 의미가 담긴 비유의 말이라고 봐야합니다.

다음 구절을 볼까요?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4:24)

And his fame went throughout all Syria: and they brought unto him all sick people that were taken with divers diseases and torments, and those which were possessed with devils, and those which were lunatick, and those that had the palsy; and he healed them.

 

 

여기에 나오는 병명들 대부분이 정신병 일색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잠함병(divers diseases)은 기압의 차이로 인해서 일어나는 일종의 두통이라 할 수 있으며 torments는 고통이라는 뜻보다는 고민이나 고뇌라는 뜻으로 해석을 해야 할 것이고 lunatick은 간질환자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지만 정신이상자로 볼 수 있습니다.

중풍환자도 뇌경색을 말하는지라 모두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이들이지요.

동양의학에서는 이러한 병들을 대부분 침술로 낫게 하는데 현대의학은 대부분 완치가 어렵다고 합니다.

특히 간질병은 양의에서는 불치병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뭔가 특별한 의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성경 상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보았듯이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준다고 했으니 그들에게 성령을 알게 함으로써 병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으로 봐야겠지요.

병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 홀로 목사와 교회를 함께 다니는 형제한분은 자녀가 정신병 때문에 상당히 힘들어한 적이 있었습니다.

별의별 방법을 동원 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나중에는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했지요.

평소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분인지라 당연히 아이가 나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했는데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던 겁니다.

그때 그분은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더라는 간증을 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 때마다 성령을 알아야한다고 말씀 하셨으니 당연히 성령과 함께 하실 거라 믿었고 아이가 차도가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갈수록 심해져 갔지요.

결과가 이러하다면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사람들을 낫게 한 일들은 예수님이 의술을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목사님에게 성령이 함께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 홀로 목사는 예수님이 의술을 배워서 치료를 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성령이 함께 한다고 해서 무조건 병을 낫게 하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도 좋겠습니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좋아들 하시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또한 그 아이를 위해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한 가지 조건을 걸었었지요.

그 아이의 부모가 신앙의 길을 잘못 걸어가거나 교만에 빠진다면 원점으로 되돌려도 좋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남의 종교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타인들에 대한 심판을 함부로 할 경우 그들이 져야하는 짐을 그들이 지게 만든다는 조건이었지요.

지금 그 아이가 어떠한 상태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얼마 전까지는 상당히 좋아졌다고 들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나 홀로 목사는 제자신의 기도가 효과가 있다고 선전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제가 기도를 했다 하더라도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나 홀로 목사를 비롯한 여러분 모두에게 내재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은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성령이시며 그 성령이 우리 모두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명확하게 아시는분이시니 성령이 드러나고 안 드러남도 정확하게 아실 겁니다.

부디 그분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시길 바라며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오늘도 나 홀로 목사와 함께 해주신 하나님!

 

 

머리카락까지도 헤아리신다 하셨으니

우리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떠한 행동을 어떠한 목적에서

한다는 것까지도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나 홀로 목사가 교만하고 자랑을 일삼으면

사정없이 회초리를 내려주시고

당신의 정의로운 길을 올곧게 가거든 지혜의 빛을 내려주소서.

 

 

당신이 권능의 힘으로 못하실 것이 없다는 것을 아오니

당신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의 눈을 열어 모습을 드러내 주시고

귀를 열어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게 하소서.

 

 

당신이 허락하시지 않는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오지 않는 그 어떠한 일도 애타게 원하지는 않게 되겠지만

당신이 내재함을 보지 못한 이들은

당신을 보고 싶어 갈망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편재하시는 당신을 아는 이는

더 이상 당신을 찾을 수가 없지만

당신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이들은

본 사람을 찾음으로 당신을 볼 수 있지요.

 

 

성령을 본 일이 없는 이는 성령을 볼 수 있음에 즐거워하고

성령과 함께하는 이는 짐 진 자들의 무거운 고통이 어깨를 누를 따름입니다.

 

 

귀가 있는 이들은 이 말을 알아들을지니

진리가 귀를 열어주고 눈을 열리라.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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