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 유목민들은 계절 따라 이동을 합니다.
가축에게 싱싱한 풀을 먹이기 위해 불가피하게 이리저리 옮겨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립식인 “게르”에서 살고 있으며 언제든지 이사를 다닐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살아갑니다.
계절이 바뀔 때면 풀을 찾아 먼 곳까지 이동해야함으로 매일이사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가축이나 사람이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를 이어 이렇게 살아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지요.
요즘은 워낙 빠르게 문명이 발달하고 있음으로 인해 유목생활도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오토바이와 차가 등장하고 있으며 발전기를 통해 전기를 이용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인터넷을 이용하는 곳도 생겨납니다.
이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문명사회의 정보가 빠르게 전달이 되고 있으며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 교육시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유목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아이들은 도시에 나가 기숙사에 기거하며 공부를 하는 겁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더 이상 유목생활을 하지 않고 도시에 머무는 선택을 하고 있으며 일부는 복잡한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또다시 초원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기도 하는 등 빠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요.
이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며 문명사회에서조차 일어나는 일입니다.
시골에서 대도시로 공부를 하러 갔다가 눌러앉기도 하고 도시생활이 싫어 시골로 돌아가는 일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몽고유목민들의 삶을 통해 한 가지 변함없는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계절의 변화에 맞춰 이동을 할 때면 강을 건너야할 때가 종종 있는데 가축들이 물을 싫어함으로 강 앞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이럴 때면 유목민들은 주저 없이 양이나 염소 무리 중 한 마리를 골라 뿔에 줄을 걸어 강을 건너게 만듭니다.
이렇게 하면 다른 양이나 염소들이 하나둘 따라 강에 뛰어들게 되며 모든 가축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건너는 겁니다.
이 같은 일은 가축들을 위한일인 동시에 유목민들을 위한 일입니다.
싱싱한 풀을 먹지 못하면 가축은 살아갈 수 없으며 가축을 기르며 살아가는 유목민들도 살수가 없습니다.
싫어도 강을 건너야하고 강을 건너기위해서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유목민들의 삶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일단 목적지가 정해지면 이런 일은 당연히 발생하게 되어있으며 누군가는 앞장을 서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것은 선구자입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모든 선지자들이 바로 그 시대의 선구자들이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특출한 이가 오늘날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리스도 예수라고 할 수 있으며 2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용기를 주기위해 먼저 뛰어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본보기로 보여준 겁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 죽음을 자초하고 부활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던 거지요.
골고다의 뜻은 해골산으로 죽음을 뜻합니다.
십자가는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하는 업장의 짐으로 봐야하고 골고다 언덕길은 인생길을 비유한 것으로 죽음이라는 도착지점을 가리킵니다.
누구나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성령에 대해 알고 있는 예수님과 같은 인자는 죽음이후 성령으로 부활한다는 것이 십자가사건에 심어진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표본이 된 거지요.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회는 모세오경을 하나님말씀처럼 여기며 살던 시대였으며 감히 하나님 이름조차 부르기 힘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인간스스로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고 말하며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친다 했으니 일반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을 깨닫게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퍼포먼스를 해야만 했을 거라 짐작 됩니다.
업장덩어리인 육신이 죽고 성령으로 부활해야함을 몸소 보여준 셈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자신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피 흘리며 돌아가셨다는 거지요.
이러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사야서를 주로 인용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Surely he hath borne our griefs, and carried our sorrows: yet we did esteem him stricken, smitten of God, and afflicted.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But he was wound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bruised for our iniquities: the chastisement of our peace was upon him; and with his stripes we are healed.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All we like sheep have gone astray; we have turned every one to his own way; and the LORD hath laid on him the iniquity of us all.
4절을 보면 우리의 슬픔을 견디고(borne our griefs) 우리의 슬픔이 전달되어진다고(carried our sorrows) 했습니다.
육신을 입고 있음으로 해서 업장이 전달되어 진다는 뜻이지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세포하나 속에 엄청난 정보가 공유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그가 부상당하는 것도 우리의 위법한 행위로 인해서라 말하고(he was wounded for our transgressions) 그가 상처받는 일도 우리의 부당한 일들로 인해서라 말하는 겁니다.(he was bruised for our iniquities)
이는 성령이 드러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로서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했던 유마거사의 말과 같습니다.
이 말을 잘못 받아들이면 성령이 드러난 사람이 모든 사람의 죄를 가져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는 동안은 육신을 입고 있는 지라 자신의 십자가는 자신이 져야합니다.
다만 성령의 씨앗이 심어짐으로 인해 사후에 성령의 영접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가 징계를 받는 것이 곧 우리의 평화요 그가 채찍에 맞는 것이 우리의 나음으로 이어진다 한 겁니다.
각자가 각양각색의 삶을 사는 동안 숱한 죄를 지었겠지만 성령이 심어지고 나면 사후에 성령으로서 부활하게 됨을 말해놓은 거지요.
지면관계상 더 이상 길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이 내용은 결코 예수의 탄생을 예고한 것이 아닙니다.
시공을 초월한 성령으로서의 예수를 말하면 옳다고 볼 수 있지만 육신예수에 초점을 맞추면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모두 가져갔다고 믿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러한 믿음으로는 성령이 되살아나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믿음보다는 성령이신 예수님이 본인의 내면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이사야는 예수탄생 8백 년 전의 인물이라는 점을 아시기 바라며 오늘날의 우리를 위해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헛되게 만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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