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안에.

배가번드 2023. 9. 7.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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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비가 심하게 오는 바람에 산사태가 발생하고 여기저기 물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늘을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어제 함바집 사장님께서 하나님도 부처님도 비가 오는 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은연중에 신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신이 있다면 사람들로부터 욕먹을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그 이유였지요.

뉴스에 온통 물난리소식이 나오고 있으며 내가 일하는 현장에서도 피해가 발생하는지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식당에 손님이 확연하게 줄어들어 수입이 반 토막이 났는데 좋아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다보니 함바집 사장님의 입에서 신을 원망하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인데 우리로 하여금 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신을 믿지 않거나 신이라는 존재를 저 멀리 높은 곳에만 있다 인식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자신이 철저하게 피조물로서 신령한 힘에 의해 조정당하는 한낱 미물(微物)로 여기기에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 안에 신이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며 육신이 자신의 전부인양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얄팍한 생각으로는 함바집 사장님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알고 보면 신이 있음을 깨닫게 하기위해 재앙을 내리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산천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발전시킨다고 자부하며 스스로가 신 됨을 자랑하지만 그 모든 것이 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거지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재앙이 곧 축복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게 만들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번 재난이 축복일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이불공장을 할 때 이런 일을 해마다 경험했었는데 홍수가 나고 나면 이불이 불티나게 팔립니다.

주로 싼 이불 위주로 팔리는데 홍수가 나면 이불이 물에 잠겨 못쓰게 되는지라 새로 구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흙탕물이 스며들면 아무리 빨아도 소용이 없으며 무조건 새로 구입해야만 하기에 장마철이 지나고 나면 이불이 잘 팔리는 거지요.

누군가에게는 홍수가 재앙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축복이라는 생각을 장마철마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누군가는 아직도 재앙이 축복일수도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시각을 아프리카 초원으로 돌려보면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는 4년 주기로 화산폭발이 일어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 화산이 폭발하면 주위가 잿더미가 되어 동식물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식물이 창궐하여 온갖 생명들이 넘쳐나게 됩니다.

화산재에 담긴 미네랄로 인해 풀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라나며 영양가 높은 식물을 먹기 위해 동물들이 몰려드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홍수로 인해 일부지역의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맞이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좋은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당장의 육신적인 편안함과 즐거움을 추구하다보니 먼 앞날을 볼 수 없는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이모두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서 이지요.

나만 편하고 싶고 나에게는 즐거움만 가득했으면 하는 마음에 모든 현상을 재앙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하면 욕을 먹어먹게 됩니다.

내말은 구도자의 인식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달라야한다는 겁니다.

본인의 내면에 신이 있음을 알고 신이 삼라만상을 움직인다는 점을 알아야하는 것은 구도자의 기본인식이라 할 수 있지요.

자신의 영혼조차 모르고 있는 일반인들과는 달라야하며 신이 내외(內外)에 공히 존재함을 알아야 성령과 하나 될 자격이 있는 것인데 이런 일이 대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or else believe me for the very works' sake.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

Yet a little while, and the world seeth me no more; but ye see me: because I live, ye shall live also.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At that day ye shall know that I am in my Father, and ye in me, and I in you.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있지 않은 몸은 없으므로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the Father in me)

또한 하나님이 삼라만상을 지었으므로 우리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지요.(I am in the Father)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이 하는 일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보통의 경우 이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짐승 같은 짓을 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비천한 짓을 하며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삶을 살았기에 영혼이 죽어있거나 잠들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겁니다.

그저 욕망과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살았으며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하지만 예수님 같은 분은 성령이 깨어났기에 언행이 하나님과 같습니다.

19절을 보면 세상이 예수님을 다시보지 못한다 했는데 이는 육신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죽을 것을 예고한 것으로 뒷부분에 산다한 것은 육신을 버리고 빛의 몸인 성령이 된다는 뜻이며 세상 사람들은 영안이 막혀있어 이를 볼 수 없지만 지혜안이 열린 제자들은 볼 수 있을 거라 했습니다.

볼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성령이 되살아났다는 말이지요.(I live, ye shall live also)

그래서 20절에서 성령이 살아나는 날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품안에 있음과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음이 같다는 점을 알게 되며 제자들의 몸 안에 성령이신 예수님이 있다는 점을 알거라고 한 겁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해서 말해왔듯이 성령은 곧 빛이며 빛은 시공이 무너진 영역에 존재함으로 생각만으로도 서로의 몸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한꺼번에 여러 명에게 나타날 수도 있지요.

불교에서는 이 같은 일을 두고 부처를 이루게 되면 천백억화신이 된다고 합니다.

편재하신 하나님과 하나 된 성령과 같이 세상만물에 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일이 실지로 일어났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마17:1)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17:3)

 

 

아마 영적인 체험이 없는 이들은 이 장면을 두고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성령을 깨달을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영적 체험을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겠지만 나 같은 경우 이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깊은 묵상 속에서 내가 모시는 육신의 스승과 내면의 신이 직접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했던 거지요.

그러한 경험을 했기에 이 장면을 보는 순간 곧바로 영적체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겁니다.

내말을 믿든 말든 자유이지만 본인들의 영혼을 되살리고 성경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의 세계를 알아야한다는 점만 말해둡니다.

아울러 남의 체험을 우습게 여기면 본인에게 체험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