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배가번드 2025. 5. 12.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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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법 많은 이들과 안면을 터고 있으며 모두들 반갑게 맞이해주십니다.

속으로 나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을지라도 겉으로는 조금도 분별없이 대하고 있으며 나 역시 갈수록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나와 성경을 보는 관점이 틀리다 할지라도 일단은 삶의 목표가 영생을 얻는데 있으므로 서로를 대함에 있어 편안하며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특히 이번 주일에 목사님의 설교는 평상시 내가 주장하던 바와 상당히 근접해 있었지요.

구약이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를 먹지 말아야하는 이유를 아주 잘 설명해주었던 겁니다.

그래서 인지 그분의 얼굴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으며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말씀이 끝나버렸습니다.

청령한 음료를 마신 것처럼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다만 약간의 시각 차이는 있었지요.

그러므로 오늘은 목사님이 인용하신 신약내용을 상고함으로서 약간의 차이점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But whoso shall offend one of these little ones which believe in me, it were better for him that a millstone were hanged about his neck, and that he were drowned in the depth of the sea.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18:7)

Woe unto the world because of offences! for it must needs be that offences come; but woe to that man by whom the offence cometh!

 

6절에서의 나는 예수님의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바다는 세상을 비유하고 있으며 맷돌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 믿음을 뜻합니다.

믿는 마음에 기초가 되어 영생을 얻게 하는 반석 같은 믿음이 아니라 돌고 돌아 윤회를 하게 만드는 잘못된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즉, 성령을 믿는 자를 공격(범죄)하면(offend one of these little ones which believe in me) 윤회를 벗어날 수 없고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 속에 빠진다는 표현을 한 겁니다.

7절을 보면 공격의 원인으로(because of offences) 세상에 고통이 있다 했는데(Woe unto the world) 이는 분명 윤회의 기본원리인 인과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범죄 했으므로 공격당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공격이 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t must needs be that offences come)말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공격하는 사람에게는(hat man by whom)고통이 주어질 거라고(he offence cometh)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었으니 당연히 고통이 와야 한다는 뜻이며 그러할 때 똑같이 반응을 하게 되면 인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

Wherefore if thy hand or thy foot offend thee, cut them off, and cast them from thee: it is better for thee to enter into life halt or maimed, rather than having two hands or two feet to be cast into everlasting fire.

 

이 말씀을 액면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손발이 남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범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육신은 있을 수 없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으로 성령을 깨닫고 윤회를 벗어나 영생을 얻어야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두 손, 두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속으로(지옥)(into everlasting fire) 들어가기보다 삶을 멈추거나 불구로 살아가는(enter into life halt or maimed) 것이 낫다고(it is better) 한 겁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육신이 아니라 빛이신 성령임을 깨달아 알라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함은 물론이지요.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9)

And if thine eye offend thee, pluck it out, and cast it from thee: it is better for thee to enter into life with one eye, rather than having two eyes to be cast into hell fire.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동하므로 눈이 죄를 범케 하면 빼버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눈을 가진 채 죄 됨을 보지 않을 수도 없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없으므로 육신너머 성령을 깨달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 눈으로 지옥 불에 던져지는 선택을 하는 것보다(two eyes to be cast into hell fire) 한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했으니 이는 분명 성령을 깨닫고 영안을 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두 눈을 하나로 만들면 온몸이 밝을 것이라는(thine eye be single, 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light) 마태복음 내용과 동일한 가르침이지요.(마태복음6장22절 참조)

이러한 까닭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18:10)

Take heed that ye despise not one of these little ones; for I say unto you, That in heaven their angels do always behold the face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없음)(마18:11)

For the Son of man is come to save that which was lost.

 

10절에 언급된 이작은자는(one of these little ones)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성령을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천사는(their angels) 성령을 비유한 것이며 성령은 이미 천국과 우리 몸 안에 동시에 있으므로(시공을 초월함) 천국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the face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항상 뵙는다는(always behold) 표현을 하고 있는 겁니다.

11절 내용은 한글성경에서는 없음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영어성경은 인자는(the Son of man) 잃어버린 자를(which was lost) 구하러 온다고(come to save)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연 이 세상에 성령을 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비록 본인이 모르고 있지만 성령은 모든 이들에게, 심지어 만물 안에 담겨있음을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점을 모르기 때문에 윤회를 하는 것이며 예수의 재림 때 또다시 세상을 와야 한다 말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로서 언제나 우리에게는 기회의 순간이 옵니다.

벗어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 그것이 문제라는 말씀을 드리며 상고(相考)의 시간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