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확장된 인식 속에서는 모두가 가족.

배가번드 2025. 8. 13.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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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휴가 때 산속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어떤 여인의 영상을 보았습니다.

60대 초반의 나이에 졸혼(卒婚)을 하고 산속에서 혼자 생활하시는 분이었는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지요.

이혼은 하기 싫고 그렇다고 남편과 함께 살기는 싫다보니 이렇게 사는 것이 요즘은 유행이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바람직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이며 사랑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영적으로 표현하면 사랑이 영에 이르지 못하고 육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권태기가 온 것이며 상대방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겁니다.

이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다만 육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느냐 겉으로 드러내느냐의 차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그러나 각자(覺者)의 경우에는 육을 넘어서있는지라 육적인 판단과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며 관조자의 인식에 초점을 맞춥니다.

상대방의 행위가 밉게 보일 때면 내가 육신의 감정에 치우쳐 있다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시각에도 내가 그렇게 보일 수 있음을 자각한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재주가 출중하여 배우자를 먹여 살릴 정도로 능력 있는 이들은 이러한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동등한 위치에 있을 때 적용할 수 있는 것이지 빌붙어 사는 주재에 무슨 할 말이 있겠냐는 생각을 하게 됨으로 배우자의 생각이 나와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인간의 감정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며 내가 느끼는 감정을 상대방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 상대방의 잘못을 내 것으로 여기게 되며 내 잘못이 상대방을 통해 투영(投影)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지금 주어진 현실은 내가 넘지 못한 산이나 건너지 못한 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난 생에서는 서로의 입장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현생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시각에 따라서는 반대의 결과가 주어질 수도 있지요.

예를 들어 전생에 누군가에게 신세를 진일이 있다면 이생에서는 되갚아야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며 지금 생에서 누군가를 이롭게 한다는 것은 내가 복덕을 쌓는 일이 되므로 오히려 상대방에게 고맙게 여겨야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 대한 시각은 고정적일수가 없는 것이며 육신의 판단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예수께서는 사람을 동등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 눈에는 티가 없고 네 눈에만 있다가 아니라 똑같다는 의미에서 비판하는 만큼 비판당하고 헤아리는 만큼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길을 걷는 구도자라면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우편에 앉기를 원하는 구도자가 이렇게 생각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거듭남을 증명할거냐는 거지요.

너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시공의 영역이 사라진 상태가 영생의 하늘인데 분별하는 마음에 머물러서는 거듭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시각으로 보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노력은 해봐야 합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하나님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정원을 가꾸는 것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원을 가꾸게 되면 여러 가지 꽃들을 심게 됩니다.

그런데 키우다보면 한쪽 꽃은 번성하는 반면 다른 꽃은 맥없이 시드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럴 경우 정원을 가꾸는 이가 정리를 하여 서로 균형을 맞추게 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밭이 균형 잡히지 않으면 내재하신 성령은 우리에게 과하게 웃자란 꽃을 뽑아내는 심정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본인의 주장만 내세우는 이는 한 가지 꽃만 주장하는 사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꽃과 잡초가 분명히 다르며 선호도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지만 하나님의 시각에는 잡초도 훌륭한 식물이며 없어서는 안 되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내 눈에는 상대방의 행동이 어처구니없게 여겨질지라도 그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나는 일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는 정원을 가꾸기 위해 잡초를 제거하는 것은 당연하다 말하며 잘못된 상대방의 행위를 고쳐주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자 사랑의 매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알아야할 것은 상대방도 나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 밭을 일구는 심정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남의 정원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본인의 정원에도 초점을 맞추고 정원의 영역을 점점 더 확장하여 너와 나의 경계가 없어지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 됩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말씀은 기록되어 있지요.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3:15)

 

사람은 시대를 달리하고 육신을 달리하여 존재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성령으로서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아들로 혹은 아버지로 생활하고 있지만 하나님 시각으로 보자면 역할을 바꿔가면서 하고 있다는 거지요.

영원의 세계에 거하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두가 자녀일 뿐 누가 누군가의 자식이고 아들일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시각일 뿐 우리 인간들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세상에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비는 아비로서, 아들은 아들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역행의 순간에는 시각의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불효막심한 짓을 한다고 했을 때 지난 생에는 내가 불효막심한 아들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거지요.

왜 우리 시어머니는 나에게 못되게 구는가만 생각하기보다 내가 부모에게 불효하지는 않는지 혹은 전생에 누군가에게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킨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내 남편이나 아내가 왜 저 모양일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나도 내배우자에게 저 모양으로 비치지 않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내 과거를 용서받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다른 이의 경우에는 내가 관여할 바 아니지만 내 가족들은 이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물론 나를 가족으로 여기는 모든 이가 여기에 해당되며 확장된 인식 속에서는 가족 아닌 사람이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며 졸혼(卒婚)에 대한 상고의 시간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