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지난시간 나 홀로목사가 신랄하게 비판하며 다시는 오지 말라 했는데 불구하고 아직까지 머물고 계시는 분들은 아주 영적인 것 같습니다.
웬만하면 자존심상해서라도 오지 않을 것인데 변함없이 온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상당한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육신은 습관에 매여 있지만 영은 벌써 깨어나 있기 때문이지요.
물질적으로 치우친 사람들은 아마도 더 이상 이곳을 방문하기 어려울 겁니다.
와봐야 별다른 재미도 못 느낄 것이고 늘 반복되는 이야기만 주어지는지라 읽어지지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글을 쓴 나조차 물질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일 경우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인데 물질적으로 치우친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런 의미로 여러분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물질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쉽기도 한데 육신인 우리자신은 어렵지만 우리내면에 거하시는 성령이신 하나님이라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을 영적인 삶으로 인도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문제는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이지요.
그런데 말씀을 하고보니 누군가의 질문이 생각납니다.
내면의 성령을 깨우려면 어떻게 기도하느냐고 하셨는데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가 확인을 했었습니다.
야곱의 아내들 편에서도 보았고 지난 시간에도 보았지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차례 기도하는 방법(명상, 묵상)에 대해 이야기한 걸로 압니다.
아직도 궁금하신 분들은 차분하게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읽어보시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기도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깨울 수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심지어 20년 넘게 명상했으나 성령은커녕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다고 하지요.
이분들은 나 홀로목사와 함께 관음법문이라는 영성단체에 속한 명상회원들인데 가끔씩 푸념하듯이 물어옵니다.
그럴 때면 나 홀로목사는 자신들 삶을 돌아보라고 충고해줍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물질적인 삶에 뺏기고 있는가를 확인해보고 하루에 영을 생각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를 되돌아 보라고하지요.
심지어 조용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시간조차 물질적인 일을 생각하느라 바쁘지 않느냐고 말하면 모두들 할 말이 없다합니다.
물론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가치관은 바뀌어야한다는 겁니다.
영보다 물질이 앞서는데 어찌 영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며 온 마음이 물질로 채워져 있는데 영이 들어설 틈이 있어야 자리를 잡을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하루에 20시간을 명상하는데 명상 속에서 물질적인 일을 생각하고 있다면 어찌 제대로 된 명상이라 할 것이며 긴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30분이라도 정말 영에 대해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값지고 효과 있는 기도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모든 것은 가치관에 대한 문제이기도합니다.
영적인일을 물질적인 일보다 우선시 여기게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입니다.
다만 이럴 경우 물질이 떠나가고 영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지요.
이것은 아주 간단명료한 일이며 자신의 현재상태를 살펴보면 해결점이 뭐라는 것 또한 알게 됩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수차례 언급했었던 일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올 이야기이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성령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육신이 쌓아놓은 잘못된 습관 탓이지요.
이런 습관은 반복되는 훈련만이 해결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반복해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겁니다.
이제 해결책을 알았으니 성경 속으로 들어가 반복되는 하나님말씀에 귀기울여봅시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눅6:1)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눅6: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눅6:3)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눅6:4)
How he went into the house of God, and did take and eat the shewbread, and gave also to them that were with him; which it is not lawful to eat but for the priests alone?
이 내용은 안식일의 규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안식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바트(Shabbat)의 원래 뜻은 “멈추다 ,중지하다”로서 모든 일을 멈추고 금식하며 오로지 하나님께 기도만 드리는 날을 뜻합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인식일의 규범이 이러한데 예수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는지라 율법에 어긋남을 바리새인이 지적한 겁니다.
이 내용은 구약 사무엘상21장 6절에 해당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마가복음 3편에 상세하게 풀어놓았음으로 참조하시길 바라며 여기에서는 중요한 점만 살펴보겠습니다.
4절을 살펴보면 약간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 전에 들어가서 진설병을 먹었다고 하는데 진설병에 해당하는 shewbread는 “유대인이 제단에 올리는 빵”으로 원래 히브리어 뜻은 “그 얼굴의 빵”입니다.
먹는 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나타내는 말인데 먹는다는 표현 탓에 그 얼굴의 빵이라고 해석한 거지요.
이렇게 보면 다윗이 성전(자신의 내면)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먹는 율법이 아니라고 했으며(which it is not lawful to eat) 제사장만 위한 것이라(for the priests alone) 기록한 겁니다.
종합해보면 해석이 다음과 같이 바뀝니다.
그가(다윗이) 하나님 전에 들어가(How he went into the house of God) 진설병을 집어먹고 그와 함께 한 이들에게도 주었다고 하는데(and did take and eat the shewbread, and gave also to them that were with him;) 이것은 먹는 율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제사장을 위한 것이다.(which it is not lawful to eat but for the priests alone)
예수님말씀인즉 구약에 기록된 내용은 다윗이 부하들과 함께 안식일에 진설병을 먹었던 것이 아니라 다윗이 제사장의 등급에 오른 일이라는 거지요.
바로 이러한 말씀 끝에 다음내용이 나옵니다.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눅6:5)
And he said unto them, That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인자는 성령을 깨달은 이,혹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이고 안식일의 주인인 하나님을 가리키니 그리스도나 성령을 깨달은이가 바로 하나님과 하나 된 자이자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5절까지의 내용을 보건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려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에 대한 다른 가르침은 어떤 것이 있을는지 성경에 집중해보겠습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눅6:6)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눅6:7)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눅6:8)
But he knew their thoughts, and said to the man which had the withered hand, Rise up, and stand forth in the midst. And he arose and stood forth.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눅6:9)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눅6:10)
And looking round about upon them all, he said unto the man, Stretch forth thy hand. And he did so: and his hand was restored whole as the other.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눅6:11)
And they were filled with madness; and communed one with another what they might do to Jesus.
위 내용은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예수님께서 바로잡아 주기위해 행한 일로서 메마른 손을 낫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필이면 손이 메마른 사람을 등장시킨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손이 모든 일을 하기에 손 메마른 사람이라 비유했으며 특히 오른손을 말한 것은 올바른(정의로움) 견해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지요.(6절)
그리고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등장시킨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가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7절)
그들의 안식일에 대한 생각을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인지라 그들을 손 마른 사람에 비유했으며 한쪽에 치우친 그들의 잘못된 인식을 고쳐주기 위해 중심을 잡고 한가운데 서라 하셨던 겁니다.(stand forth in the midst)(8절)
이런 까닭으로 9절에서 선과 악, 그리고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습니다.
정의로운 일(오른손)이라면 아무리 안식일이라 해도 마땅히 해야 한다는 거지요.
무리전체를 둘러보며 정견(正見)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식견을 넓히라고(네 손을 내밀라) 말하자 그 말을 믿은 이들은 손(식견)이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10절)(his hand was restored whole as the other)
하지만 이렇게 예수님말씀을 듣고도 자신들의 종교적 견해를 바꾸지 않은 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의논했습니다.(11절)
그런데 11절의 표현은 참 재미납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같은 율법 가들을 광기로 가득한 사람들로(they were filled with madness)묘사했다는 거지요.
한마디로 광신도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예나지금이나 잘못된 성경해석은 광신도를 양산(量産)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마도 여기오시는 여러분가운데도 지금껏 그런 부류에 속해졌던 분들이 있으리라 여겨지며 아직까지도 물리적인 기적에 목을 매는 분들이 있을 것 같으니 다른 복음서에 나와 있는 동일한 내용을 통해 인식의 폭을 넓혀보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마12:9)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마12: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마12:11)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마12:12)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12:13)
마태복음과 비교해보면 왜 누가가 그렇게 기록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석은 마태복음19편과 마가복음4편에서 다루었던 만큼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스스로가 지혜롭게 판단하기 바라며 다음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2)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6:13)
And when it was day, he called unto him his disciples: and of them he chose twelve, whom also he named apostles;
12절에서 말하는 산은 높은 인식의 세계를 비유한 것이며 제자들과 함께 밤새기도(묵상, 명상)한 끝에 밝은 빛을(when it was day)본 이들을 열두 사도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눅6:14)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눅6:15)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6:16)
이중에 가룟유다는 훗날 제외되고 맛디아라는 사람이 채워집니다.
하지만 나중에 바올이 사도로 불린 사실을 볼 때 반드시 12명만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도의 뜻은 “신이 보낸 사람”이 란걸 생각해볼 때 내면에서 밝은 빛을 본 사람들은 사도의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신이 보낸 사람들인 12사도들과 예수님이 무엇을 하였는지 성경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눅6:17)
And he came down with them, and stood in the plain, and the company of his disciples, and a great multitude of people out of all Judaea and Jerusalem, and from the sea coast of Tyre and Sidon, which came to hear him, and to be healed of their diseases;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높은 인식의 세계)에서 세상으로 내려온 것을 평지에 선 것으로 묘사했습니다.(he came down with them, and stood in the plain)
그리고 제자들과 인연이 있는 이들과(the company of his disciples) 영적인 사람들(people out of all Judaea and Jerusalem)은 물론 이방인들까지(from the sea coast of Tyre and Sidon)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왔다 했지요.(came to hear him, and to be healed of their diseases)
이 말씀을 보건데 예수님께서 12사도들과 같이 복음전파를 통해 많은 이들의 영혼을 구원하기위해 노력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나 홀로목사의 말을 뒷받침해줍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눅6:18)
And they that were vexed with unclean spirits: and they were healed.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눅6:19)
And the whole multitude sought to touch him: for there went virtue out of him, and healed them all.
깨끗지 못한 영으로 인해(with unclean spirits) 괴롭힘을 당하던(vexed) 이들도 치유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18절)
그런데 19절은 번역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합니다.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한다 했지만 이는 NIV성경을 해석한 것입니다.
예문으로 올린 것은 KJV로서 그들 모두가 치유된 것은 (healed them all) 그의 고결함이 드러났기 때문임으로(for there went virtue out of him) 사람들이 그(성령, 고결함)와 접촉(닿기)하기위해 노력했다 입니다.(the whole multitude sought to touch him)
17절부터 19절까지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예수님께서 아직까지 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해안으로부터 온 사람들) 자신 안에서 성령(고결함,virtue)을 찾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성령 찾는 방법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6:21)
Blessed are ye that hunger now: for ye shall be filled. Blessed are ye that weep now: for ye shall laugh.
눈을 들어 보았다는 말은 제자들을 높이 평가했다는 말로서 제자들 내면의 성령을 보고 말한다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
그래서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 했으며 하나님왕국이 너희 것이라 했던 거지요.
여기에서 가난한자란 육신의 덧없음을 깨달은이를 가리킵니다.
육신의 보잘 것 없음과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 때 내면의 성령이 드러나는지라 하나님왕국이 이런 이들의 것이라는 말입니다.(20절)
21절은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린 자에 해당하는 hunger는 배고픔을 뜻하는 외에도 갈망, 기아, 공복, 굶주림 등이 있습니다.
성경이 영적인 책이란 걸 감안하면 당연히 갈망으로 바꿔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자신의 영을 깨닫길 갈망하는 이는 그 갈망하는 마음이 채워진다 했으니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우는 자에 해당하는 weep는 눈물을 흘리다, 슬퍼하다, 한탄하다, 등의 뜻이 있으니 사는 동안 슬프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복이 있어 웃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지은 죗값을 치렀으니 이제 웃을 날만 남았다는 말입니다.(21절)
이 또한 깨달음에 대한 말씀으로서 자신의 내면에서 고결함(성령)이 드러나게 되면 이 같은 이치를 알게 되는지라 슬픈 일을 당하는 것조차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드러내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한계를 철저히 깨닫고 자신에게 닥치는 온갖 슬픈 일조차 신의 축복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을 만날 수(드러낼 수) 있다는 거지요.
뿐만 아니라 성령을 깨닫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6:22)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3)
Rejoice ye in that day, and leap for joy: for, behold, your reward is great in heaven: for in the like manner did their fathers unto the prophets.
예수님처럼 성령을 깨달은 사람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거나 소외당하거나 악하다는 말을 듣거든 기뻐하라고 했습니다.(22절)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들의 조상이 선지자들에게 하는 방식과 똑같은 것이니 기뻐하고 뛰놀라는 거지요.
바꾸어 말하면 선지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면 많은 이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하니 이어지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6:24)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6:25)
물질의 풍요로움으로 인해 영을 알고자하는 마음이 상실된 이들을 향해 부요한자라 칭하고 그들이 더 이상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물질세상이 덧없다는 것을 느끼려면 가난해져야하는데 부자가 된다는 것은 영을 깨닫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25절)
그렇기 때문에 26절에 더 이상 영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어진 거지요.
물질의 풍족함은(배부른 자여) 영적인 빈곤(주리다)을 가져온다는 것을 비유했으며 지금당장은 어려움 없이 지내는지라 웃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할 때 애통해하며 울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위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반인들이나 이방인들보다 영적인 길을 걷는 구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특히 성직자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아래말씀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말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6)
오늘날의 많은 목회자들이나 성직자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지만 그다지 반기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러한 지경에 빠진 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볼 때 예수님처럼 고결한 성령이 드러났는지 아닌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니 말할 것은 없겠지만 적어도 세상과 타협하여 온갖 불의한일을 행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팔아 치부하는 짓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는 자들이 하는 짓이지요.
그러면 예수를 믿는 이들은 어떻게 행동해야할는지 성경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6:27)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눅6:29)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며(눅6:30)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6:31)
27절에 듣는 자에게 이른다는 말은 들을 자격을 갖춘 자를 뜻하는 말로서 믿음 안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일반적인 수준의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해놓았습니다.
위의 내용은 한 구절씩 해석하기보다 전체를 봐야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시각으로 봐야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생각해보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이지요.
원수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자를 선하게 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며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뺨을 치는 이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고 물건을 뺏기고도 돌려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니 사람으로서는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가가 이렇게 기록한 것은 우리의 영혼(진아,眞我)을 제대로 알고 깨달으라는 말이지요.
높은 영의 세계에는 너와나의 구분이 없고 선악의 경계도 없으며 네 것 내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불쌍하게 여기게 되어 기도하게 되며 내 것을 뺏어간 사람조차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이렇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이 주어졌을 때 그 결과를 이렇게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이며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른 일이라는 사실을 31절에 말해놓았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받으려면 누군가에게 주어야한다는 것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인과응보를 말하는 동시에 인과를 넘어서는 높은 법문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눅6:32)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눅6:33)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눅6:34)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6:35)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6:36)
위의 내용역시 전체를 한꺼번에 해석해야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말씀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인과응보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지요.
나에게 누군가 부당한 일을 행하였을 때 똑같이 대해주는 것은 인과응보에 따른 일이겠지만 사랑과 용서와 포용의 마음을 실행하면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내면에서 성령을 만난이가 할 수 있는 일이며 인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높은 영(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행위는 타인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Give, and it shall be given unto you; good measure, pressed down, and shaken together, and running over, shall men give into your bosom. For with the same measure that ye mete withal it shall be measured to you again.
37절에 정죄(condemn)는 죄라고 규정짓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비판(심판)하는 것 때문에 비판받는 것인데 그 비판의 근본원인은 죄라고 규정짓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자신이 용서받는 길이라는 거지요.
38절은 약간의 수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라는 뒷부분부터 바뀌어야합니다.
후하게 되어(good measure)는 좋게 판단하라는 말이니 긍정적이 되라는 말이고 누르고(pressed down)는 상대방의 행동에 똑같이 행동하지 말고 인내하라는 말입니다.
또 함께 흔들어(shaken together)는 선악의 구분 없이 경계를 허물라는 말이고 넘치도록(running over)은 자비심과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라는 겁니다.
이렇게 적용해서 번역하게 되면 다음과 같아집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인내하며 선악을 구분치 말며 자비가 흘러넘치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안겨지리라 너희의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좀 더 매끄러워졌지요.
물질적인 시각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확실히 옳다는 걸 말씀드리며 다음구절로 넘어가겠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눅6:39)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눅6:40)
어찌 보면 앞 구절과는 다른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의 연장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는 말은 자신이(예수) 스승이 된 것은 밝히 아는바(깨달음을 얻은 자, 그리스도) 되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39절)
그러니 제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자신(예수)을 능가하지는 못하겠지만 온전케 된 자(성령을 깨달은 자)는 선생(예수)과 같다는 말입니다.(40절)
이 말씀은 내면의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서 육신적으로는 스승과 제자의 구분이 명확하고 위아래가 정해져있지만 성령은 하나라는 겁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달음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6:41)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6:42)
액면으로 보면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먼저 없애야한다는 말이지만 여기에는 담겨진 다른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제자들은 모두가 물질적인 일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천국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진 이들이지요.
그러니 먼저 자신의 영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에서 하신말씀입니다.
천국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물질적이고 육적인 일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인다면 하나님의 종노릇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다음내용을 보면 이 말씀에 대한 보충설명이 이어집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눅6:43)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눅6:44)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근본이 좋다면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근본이 좋지 못하면 좋은 열매가 맺을 리 없다는 말이며(43절) 자신에게 다가와 있는 현재(열매)가 영적인 것이라면 영적인 사람일 것이고 물질이라면 육신적인 삶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지요.(44절)
영적인 결실을 맺으려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말인데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자신의 속에 영적인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영적인 것을 말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이 선함으로 가득하다면 선한 것만 말하게 되고 악함으로 그 마음을 채우고 있다면 악함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45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가르침을 주신 것인데 다음내용역시 동일한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눅6:46)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눅6:47)
Whosoever cometh to me, and heareth my sayings, and doeth them, I will shew you to whom he is like:
예수님을 향해 주여 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하나 된 이로 믿는다는 말인데 그러면서도 예수님말씀처럼 행동하지 않느냐는 거지요.(46절)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이 아직 성령을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와서 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이가 누구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여기에서 누구는 바로 하나님, 즉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육신적으로 하나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품안에서 하나 됨을 뜻합니다.
사실 이것은 성령을 깨닫는 하나의 방법이기도한데 성령이 드러난 예수님 같은 분의 말씀을 믿고 행동한다면 그 역시 성령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씀인데 다음내용을 보게 되면 왜 우리가 성령이 드러난 사람의 말을 믿어야하는지 그이유가 나옵니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눅6:48)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눅6:49)
예수(성령이 드러난 이)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다면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며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흔들림이 없고 내면에 자리 잡은 하나님왕국(성전)이 온전히 보존 될 거라는 말이지요(48절)
그러나 믿음이 약하면 행동으로 옮겨지지도 않을 것이니 이런 사람은 세파(탁류)에 휩쓸려 성전이 무너진다는 겁니다.(49절)
어떤가요?
여러분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셨습니까?
아직도 입으로만 “믿습니다.”를 외치며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영적인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부디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내재한 성령을 만나는 영광을 얻길 바라며 누가복음 6장을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