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성령이 임하시면 영육이 자유롭다.

배가번드 2024. 4. 7.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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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고 있으며 사람을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라 말합니다.

본인의 도량(度量)과 수행력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 하나님을 담을 수 있기에 이러한 비유는 그야말로 지혜롭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만들었다 했으니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 되려면 큰사랑이 되어야하는 겁니다.

그릇이 커야 하나님을 담을 수 있고 하나님이 큰 그릇에 사랑을 담아줄 것이니 주는 이와 받는 이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있다 없다 따지지 말고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나를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 좋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먹기 위해 성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행12:1)

Now about that time Herod the king stretched forth his hands to vex certain of the church.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12:2)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행12:3)

 

헤롯의 뜻은 “영웅의 아들”이고 요한은“야훼는 은혜로우시다”이며 야고보는 야곱의 희랍어로 “발꿈치를 잡는 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은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을 가리키며 영적인 세계와 적대관계에 놓인 인물이지요.

1절을 보면 헤롯이 손을 뻗어 교회의 어떤 이를 귀찮게 한다 했는데(vex certain of the church) 2절에서 갑자기 죽였다고 하니 담긴 뜻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3절에서 야고보를 죽인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이 마음 안에서 성령을 죽였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욕구를 따라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일이 합당하지 않거나 불의한 일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받기 마련입니다.

특히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의 불씨가 내면에서 피어남으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적이지 못하고 육에 속한 이는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고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는 선택을 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양심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며 성령의 불씨는 꺼져버리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을 헤롯이 야고보를 죽였다고 표현한거지요.

무교절은 누룩을 넣지 않는 빵을 먹는 날로 알려져 있지만 속뜻은 성령(순수한 영혼)을 깨닫는 날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여 해석 해보면 성령을 깨닫고자 노력하는(교회) 유대인(하나님찬양)들이 물질세상의(헤롯) 유혹에 넘어갔다는(영이 죽음) 것을 비유로서 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구도자들이 영적인 길을 중도에서 포기하자 헤롯은 더욱 신나하며 베드로에게까지 그 마수를 뻗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확인해보겠습니다.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행12:4)

And when he had apprehended him, he put him in prison, and delivered him to four quaternions of soldiers to keep him; intending after Easter to bring him forth to the people.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12:5)

Peter therefore was kept in prison: but prayer was made without ceasing of the church unto God for him.

 

베드로가 연쇄살인마도 아닌데 감옥에 잡아 넣어두고 네 사람씩 네 패에게 지키게 한다는(four quaternions of soldiers to keep him) 것은 담긴 뜻이 따로 있음을 알게 합니다.

몇 차례 말해주었듯이 4는 사람의 숫자이자 인자의 숫자입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인자가 되듯이 육신(감옥)에 갇힌 베드로가 부활을 통해(after Easter) 영적으로 거듭나게 되면 백성들 앞에 정금같이 모습을 드러낼 것을 비유한 겁니다.(4절)

결국 이러한 점에 입각하여 생각해보면 베드로가 일시적으로 일탈을 하거나 단련 받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종내는 성령의 도움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에 언급된 기도하는 이는 성령을 가리키며 교회는 영적인 길의 최종목적지인 영생을 뜻하므로 성령이(prayer) 영생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 않게(without ceasing of the church)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요.

마치 요나가 세상의 유혹에 빠져 고래뱃속에서 기도를 멈추지 않은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이러한 해석이 타당함을 이어지는 내용이 확인해 줍니다.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행12:6)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행12:7)

And, behold, the angel of the Lord came upon him, and a light shined in the prison: and he smote Peter on the side, and raised him up, saying, Arise up quickly. And his chains fell off from his hands.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 대(행12:8)

And the angel said unto him, Gird thyself, and bind on thy sandals. And so he did. And he saith unto him, Cast thy garment about thee, and follow me.

 

글의 형식은 헤롯이 잡아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군사와 두 쇠사슬은 우리몸 안에 두 개의 감옥이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6절)

하나의 육신의 것이고 또 하나는 영혼의 몸이 갇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며 영혼의 세계에도 이세상의 감옥과 같은 곳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영육이 모두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7절은 보여줍니다.

주의 천사가 베드로에게 오자(the angel of the Lord came upon him) 감옥 안이 밝게 빛났다고 했으니(light shined in the prison) 빛이신 성령을 천사에 비유한 겁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다고 했지만 영어성경은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on the side는 옆구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스럽다는 뜻입니다.

육신과는 별도의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기위해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때린 것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성령은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임하신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자 물질세상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손에서 쇠사슬이 벗겨졌다 표현하고 있는데(his chains fell off from his hands) 그동안 억압되고 속박된 세상에 매여살고 있었지만 성령이 임하심과 동시에 자유로워 졌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물질세상으로부터는 자유로워졌지만 새로운 종속(從屬)관계가 형성되었다는 뜻으로 8절에서 너 자신을 매고(Gird thyself) 신발 끈을 묶으라고 했습니다.(bind on thy sandals)

성령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매달고(행사를 맡기고) 영생을 향해 부단히 걸어간다는 것을 이렇게 비유로서 말해놓은 겁니다.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 것은 육신을 입은 채 성령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성령은 사람의 육신을 통해서라야 일 할 수 있다는 거지요.

만약 이렇지 않다면 사람의 육신은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 혼자 알아서 하면 그만이지요.

내말을 오해 하지 않는 사람만이 성령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며 교실 문을 닫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