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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9)

배가번드 2018. 10. 11.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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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오늘은 어떤 주제로 너와의 대화를 엮어 나가볼까?

 

내가 사는 모습이 꼭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사는 사람 같으니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 알아보면 좋겠다고?

 

그래!

그것도 좋겠지.

 

그러나 아들아!

사이비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진정 내가 사이비를 믿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것 같으니 우선은 기존의 종교와 사이비종교의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으며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믿는 종교가 최고라고 하고 남의 종교는 모두 잘못된 믿음, 혹은 사이비종교라는 악평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지?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기성종교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으니까 살펴보도록 해.

 

일반적으로 기독교라 하면 예수님이 만든 것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은 유대교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보다 근본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거야.

 

현재 이스라엘 국민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바로 유대교인데 구약성경을 믿고 있으며 예수님이 탄생한 이후에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종교라고 보면 간단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별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종교를 만든 것이 천주교라고 하는데 그 천주교가 부패하여 개혁이 일어난 후 만들어진 것이 기독교라고 보면 대충의 설명은 될 거라고 생각해.

 

지금 여기서는 사이비검증의 주제로 얘기중인만큼 속 깊은 종교역사는 다루지 않기로 하고 궁금하거나 더 알고 싶으면 컴퓨터를 검색 하면 지겨울 정도의 자료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걸 이용하길 바라.

 

이렇게 한 뿌리에서 탄생한 종교지만 노선이 너무나 달라서 절대로 합치거나 서로인정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왜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이비가 있는지 알게 돼.

 

좀 더 분석해보면 기독교내에서도 사이비가 엄청나게 많아서 똑 같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쉽지가 않은 모양이야.

 

종파만 해도 여러 개인데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해야 할지 걱정되지 않겠니?

 

기독교 쪽은 그렇다 치고 불교 쪽은 어떨지 볼까?

 

불교는 원래가 인도에서 생겨났는데 원뿌리를 생각해보면 지금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도 힌두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여러 계급의 신중에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엇비슷하리라 보여.

 

원래 석가모니부처님 당시에는 종교를 만들지 않고 승단만 만들어 수행하던 것을 부처님 입멸 후 300년쯤 후 아소카 왕이 오늘날 불교로 발전시킨 것으로 알고 있어.

 

우리가 알기로도 불교 역시 많은 종파가 있고 부처님을 믿고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하는 곳만 해도 수십 개는 될 터인데 모두들 사이비취급을 당하고 있어.

 

한마디로 정통 불교가 아닌 것은 모두다 사이비라는 건데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나 별다를 바 없어.

 

한마디로 내 것이 최고라는 것이지.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대표 격인 종교들이 모두 한국에 들어온 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과 발생지에서는 이미 다른 종교와 융화되거나 퇴색되었다는 것이 조금은 아이러니 하지 않니?

 

물론 불교는 오래 전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 이미 우리나라에도 종교가 존재하고 있었고 한국에서 발생된 것은 아닌 만큼 타 종교를 사이비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

 

많은 사람이 믿는 것이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처음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얼마나 박해를 받았는지를 보고 그 당시 천주교신자가 얼마나 되었나를 생각해보면 그 말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그러한 점에서는 불교도 마찬가지일 테고 기독교는 말할 필요도 없을 거야.

 

우리한국인들의 적극성은 세계 어디를 가도 최고라 할 만해.

 

호주 살 때 개척교회 축하 차 오신 호주목사님의 찬조연설에서도 말씀했듯이 그 목사님이 젊었을 때는 한국으로 전도를 나갔었는데 이제는 다시 한국교회가 호주로 전도를 오는 것을 보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고 하시더구나.

 

이미 퇴색해가는 서양에서의 종교가 한국사회를 평정하다시피 하고 다시 서양으로 뻗어나가고 있으니 그런 말도 나올만하지 않겠니?

 

왜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자꾸 퇴색해가고 있는지는 각자가 인터넷이나 서적을 통해서 알아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사람들의 잘못된 타 종교 비판행위만 이야기하기로 하자꾸나.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종교관은 우리식구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모양이니 한번 살펴보도록 해.

 

네 주위에만 보더라도 할머니와 고모, 호주 사는 네 삼촌과 내 외가식구들 모두가 크리스천이고 나 역시 네 엄마와 결혼할 당시 혼배성사까지 받았던 가톨릭신자라고 할 수 있으니 비록 지금은 명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크게 보면 크리스천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내 쪽은 넓게 보면 모두가 크리스천이라 할 수 있으니 네 외가 쪽으로 시선을 돌려볼까?

 

네 외할머니는 아주 신실한 불교신자시지 않니?

 

그렇지만 네 외할머니 외의 네 이모들은 모두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으니 가톨릭신자라고 볼 수도 있을 거야.

 

이렇게 두 가지 종교가 한집에 있는 경우도 잘 없지만 종교로 인해서 다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점은 높이 살만해.

 

이렇게 네 외갓집의 종교를 알아보았으니 다시 내 쪽의 종교로 돌아가 보자꾸나.

 

다들 크리스천이긴 한데 거기에도 많은 갈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먼저 네 할머니와 고모를 들 수 있어.

 

기독교의 많은 종파 중에서도 침례회에 속하는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너도 알지?

 

만날 때마다 구원 받으라는 소리 때문에 네가 제일 겁내지 않니?

 

겁나기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가족을 사랑하는 고모의 마음은 고맙게 받아들여야 함을 네가 잊어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 내가 네 고모를 사랑하고 있으며 고모 가족들까지 모두 사랑하고 있거든.

 

이렇게 극성스러운 믿음을 갖고 있는 네 할머니와 고모식구들과는 또 다른 기독교신자들이 내 외가식구들 아니겠니?

 

너도 호주 살 때 반강제로 교회를 다녀서 알고 있듯이 브리즈번 장로교회였었지.

 

그 교회수석장로님이 내 외삼촌이어서 우리식구모두가 교회를 다녀야만 했었는데 타 종교를 비방하지만 않으면 좋은 종교라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 내가 명상을 하고 채식을 하는 관계로 나 와는 마찰이 조금 있었어.

 

아들아!

 

그 분들 역시 나를 사랑해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는 만큼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 같음을 말하고 싶구나.

 

이렇게 우리주변을 살펴봐도 많은 종교가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같은 출발점을 갖고 있긴 해도 전혀 다른 종파를 이루어가고 있음을 볼 수가 있는데 다양한 종교와 종파를 불구하고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

 

그것은 바로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이 최고라는 거야.

 

이러한 점은 믿음이 강할수록 더욱더 강해져서 타 종교는 절대로 진리로 향하는 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이비이고 사이비가 되어야만 한다는 거지.

 

이 분들의 마음을 이해는 할 수 있는 것이 내가 가는 믿음이 최고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믿음은 절대 진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거든.

 

종교가 인생자체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 만큼 절박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거지.

 

이러한 생각의 주된 원인이 성경이나 경전에 대한해석에 따른 문제와 영혼의 참된 의미를 몰라서라 할 수 있어.

 

똑 같은 성경이나 경전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거든.

 

마치 관악산에서 서울을 봤을 때의 서울모습과 북한산에서 본 서울의 모습이 다른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을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나와 같이 산에 올라가볼까?

 

네가 초등학교4학년쯤에 우리가족들이 모두 함께 가보았든 불암산을 가보도록 하자꾸나.

 

그 당시 우리가 올라가다 보니 중간 중간에서 사람들이 합류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처음우리가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올라가는 산길이 그렇게나 많은 줄도 몰랐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있는 길만 있는 줄 알았지만 올라갈수록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니?

 

우리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산길을 통해 많은 이들이 산을 올라와서는 똑같이 정상에 올라 야호소리를 신나게 외치는 것을 보았지.

 

게다가 같은 길을 걸어가든 사람들이 문득 사라졌다 싶다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모르는 지름길을 통해서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었어.

 

아들아!

 

그것만 보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잘못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니?

 

이러한 산행 길을 진리에 비유해보면 아주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어.

 

진리를 우리가 올랐던 산 정상 이라고 보면 진리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지 알게 된다는 것이고 어떻게 산 정상을 오르더라도 비난 받아야 할 어떤 이유도 없음을 알 수 가 있거든.

 

간혹 지름길을 선택했다가 헤매더라도 비웃거나 나무라지 말고 야호라고 외쳐주어서 빨리 올바른 길로 접어들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산악인이 아닐까 생각해.

 

산의 정상을 진리라고 할 때 산을 오르는 많은 길들은 세상의 수많은 종교일 테고 같은 길을 가다가 옆으로 빠지는 지름길은 같은 종교의 다른 종파로 보거나 소위 말하는 사이비라고 보면 될 것이고 이렇게 본다면 산행길이 그의 완벽하게 진리를 향한 종교를 설명하게 된다는 거지.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사이비가 꼭 지름길을 가는 사람들만을 이름이라기보다는 많은 이들이 가는 길이라 해도 잘못된 인식과 잘못된 믿음을 가진다면 그들이 바로 사이비라는 것이지 사이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

 

이러한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시 우리가 함께 갔던 등산길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그 당시 네 엄마도 같이 산을 오르다가 등산로 초입에 있던 식당에서 피곤한 관계로 산행을 포기를 했었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사이비를 만든다는 것이 아니겠어?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 중도에서 포기를 하고서는 "그 산은 좋지 않아! 볼 것도 없어!"라고 하거나 정상에 가보지도 않고서는 정상에 갔다 온 것처럼 얘기해서 다른 이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게 된다는 거야.

 

지름길로 갔더라도 냉철한 판단력과 힘이 있다면 처음은 조금 좋지 않은 상황에 직면 하더라도 곧 정상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고 반드시 정상을 밟게 된다는 거지.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믿음의 길을 감에 있어서 동반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가 있는데 이러한 동반자를 그리스도교에서는 교우라고 부르고 불교에선 법우라고도 하며 어떤 단체에서는 동수 혹은 도반이라 부르는데 너희 세계에서는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야.

 

이러한 친구의 역할이 중요하긴 해도 여기서도 문제는 있어.

 

잘못된 친구는 함께 잘못된 길을 인도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점 때문에 어른들이 친구를 잘 사귀라는 말을 하는 것이지.

 

결국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는 것도 자신의 판단에 있는 만큼 모든 것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인연의 고리와 거기에 따른 선택이 각자의 길을 결정하는 것이고 어떠한 길을 걷게 되어도 남으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비난을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는 거야.

 

내가 이렇게 남들을 사이비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한국기독교사회인데 그러한 고집을 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

 

가장 큰 이유로는 그러한 사실이 성경에 없다는 것이고 남들을 인정하게 되면 내 진리를 부정하게 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절대로 용납 못하는 데서 오는 비극이라 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이유로는 신자들을 재산으로 여기는 성직자들의 계산 또한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거지.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일부만이 그렇다는 것이니 너무 속상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그 분들 역시도 산을 오르는 한가지의 길을 선택했을 뿐이고 다른 길이 있음을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보면 아주 즐거운 산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아들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모든 종교 가진 분들이 같은 부모님을 모신 형제라고 여기면 된다고?

 

그래 맞아!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네.

 

이 세상에 하나님의 품을 벗어난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 아님이 어느 것도 없음을 안다면 모두가 하나님의 훌륭한 자식들이고 형제들이지.

 

아들아!

 

이 순간 너는 어떤 산길을 가고자 하니?

 

너의 선택은 어디에 있니?

 

너의 선택이 어떤 길을 선택하여도 너는 변함없는 나의 아들이란 것이 중요하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거야.

 

아들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