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아들아!(136)

배가번드 2022. 4. 6.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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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오늘은 내가 한 잘못한 일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겠구나.

지금까지 남들의 잘못만을 꼬집었으니 이제 내가 했던 잘못에 대한 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사실 내가 지금껏 말한 남들의 잘못들은 내가 그렇게 여긴 것이라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들의 잘못은 아니라고 말을 했고 또한 그들이 실질적인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은 내 잘못이기도 하다 말을 해나왔지만 좀 더 명확한 내 잘못을 말해보려 하는 것이고 그 잘못들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살펴보자는 거지.

누구나가 살아가면서 남에게 실수를 하기도 하고 남에게 피해를 당하기도 하는지라 이 같은 일은 어쩌면 아주 중요할 수가 있거든.

당하는 사람은 당하는 데로 피해가 있겠지만 가해자라 할 수 있는 상대편도 알고 보면 더욱 큰 피해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야.

내가 오늘 이일을 말하게 된 결정적인 일이 이번 태국선 에서 일어났어.

동수들 몇 분과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동수한분께 실언을 한 거야.

그분은 공무원이었는데 평상시 자주 뵙고 차를 마시는 사이였지.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분의 직업을 빗대어 철밥통 이라는 말을 하게 된 거야.

10일 가까이 걸리는 선행사에 어떻게 오실 수 있었나 안부를 묻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이야 철밥통 이니 누가 자르기야 하겠냐는 식의 말을 한 거였어.

그저 당연히 이해할거라 여기고 말을 했던 것인데 가만히 돌이켜보니 잘못하면 그것이 오해의소지가 다분히 있겠구나 싶었지.

이 같은 자각도 최근 어느 동수의 메일을 받고 나서였는데 3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서로 간에 좋지 못한 결과가 오게 된 거야.

김치를 처음 한국으로 들여갈 때 사업자 등록증이 필요하여 식품회사를 경영하는 사형한분에게 부탁을 한일이 있었는데 그 일처리 과정에서 내가 확실하게 처리를 못해준 것이 그 사형에게는 마음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지.

그 당시 연말정산용으로 세금계산서가 필요하다기에 보세 장치 장엘 들렀더니 세금 계산서 발행을 위해서는 사업자 등록증이 필요하다 해서 서로 간에 전화를 연결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일처리 과정에서 사형으로서는 내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았어.

내가 직접 쫒아 다니면서 해 주었어야 마땅하지만 팩스로 주고받으면 아주 간단하게 처리가 될 문제라 내 위주의 생각만 했던 것이 불찰이었던 거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일처리 방식이 있었을 수도 있겠고 말이야.

여태껏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며칠 전 내게 삼자를 통해 그 같은 불평을 하더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어.

그동안 한두 번 마주친 것도 아닌데 어째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할까 이상했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 사형은 사형대로 내가 다음에 만났을 때 그 일에 대한 말이 없었던 것이 서운했던가 보았지.

어찌되었건 내가 신세를 지기도 했고 그분이 생각하기에 내게 서운했다면 그 말은 맞는 것이라 더할 말이 없어 사과를 하였어.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 기억의 저편으로 묻힐 뻔 했으니 앞선 공무원 사형이나 뒤늦게 내 잘못을 지적해준 사형께 죄송하다는 말씀과 더불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사형님들 죄송합니다.

꾸벅~ 정말 죄송하니 이제 그 같은 기억은 잊어주세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내 잘못을 짚어 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제가 한 잘못이 있으면 그때그때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들아!

이것은 그냥 대충 넘어 갈일이 아니라 보다 실질적이고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우리들의 대부분은 상대방이 내게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를 하라고 배웠고 그 같은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자답다고 배우고 있어.

그렇지?

하지만 내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더라는 거야.

이번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때 당시 내 잘못을 그 자리에서 지적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더라는 거지.

그때 당시 내가 철밥통이라고 말을 했을 때 그 자리에서 왜 그러한 말을 함부로 하는가라고 지적을 해주었다면 세금계산서 발행을 제때 처리 못해 3년이 지나 욕을 얻어먹어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 아니겠어?

물론 아직 철밥통이라는 말을 한 내행동에 대한 과보가 돌아오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그날의 분위기상 그것이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하는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좀 더 이야기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철밥통이라 말을 한 내행동을 예로 든 거에 불과해.

그 사형은 아직 나에게 어떠한 불평이나 불만을 말씀하신 적이 없거든.

이것이 언제 돌아오던지 나는 소화를 시킬 자신이 있어.하지만 그러한 마음에 감정을 억지로 가지고 있는 분은 정말 어려울 수가 있고 나중에는 더욱 큰 감정의 골을 만들 수가 있는 거야.

앞에 말한 세금계산서 건을 봐도 알다시피 3년 동안이나 그 같은 일을 마음에 담고서 나를 만났다고 한다면 참으로 그 사형은 얼마나 불편했겠어.

나를 볼 때마다 그 일이 생각이 나지 않았겠냐 이거야.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불평을 말했을 텐데 말을 하지 않는 바람에 결국은 이상하게 관계가 발전이 되고 말았던 거지.처음 그 같은 일이 발생을 했을 때 지적할 것은 지적을 하고 넘어 갔더라면 더욱 큰일은 일어나지 않지 않겠어?

물론 큰일이야 일어나지 않았다만 좀 더 사이가 좋아질 일이 좋지 못한 감정을 만들어 내게 된 거야.

아들아!

말을 하다 보니 더욱 중요한  느낌이 들어 작정을 하고 분석해 봐야겠구나.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량을 베풀고 용서를 하라고 하거든.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자신이 소화를 시킬 수 있나 하는 것을 스스로가 살펴봐야해.

진짜 그 사람을 용서를 한 것인지 아니면 용서를 하는 척을 한 것인지 결과가 말을 해 주고 있어.

만약 진짜 그 사람을 용서를 한 것이라면 그다음 그 사람을 보았을 때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데 아직도 그러한 일을 언급한다는 말은 용서가 안 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아니겠냐 말이야.

이래서는 용서라는 말이 무색해지고 말아.

용서라는 말은 그 같은 일을 다시 거론하지 않을 때 해당이 되는 말이지 그것을 내도록 가슴에 품어 두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지.

내가 철밥통이라는 말을 할 때 그 자리에서 불만을 말하는 것이 절대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소리야.

그 당시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그대로 두게 되면 몇 년이지나 이상한 형태로 분출이 되기 쉽다는 소리가 아니겠어?

차라리 이러한 것 보다는 그 당시 아주 기분 좋게 해소가 가능하다는 말이거든.

 

"사형! 그 말이 지나치네요.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가 있는 앞인데 철밥통이 뭐요"

 

이 한마디면 내입에서 실수였습니다 죄송해요 라고 하지  않겠냐 이거야.

물론 다른 반응을 예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의 일을 그 당장 해소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이지.

결코 내가 이러한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잘했다는 소리가 아니거든.

우리들은 대부분 인내심을 덕목으로 삼고 있지만 이것도 자신이 소화를 시킬 수 있을 때 말이지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터트리면 더욱 좋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거야.

까짓것 한번 싸우면 어때?참지 못해 가슴에 담아두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어?

물론 나 역시 참을 때는 참고 있는데 언젠가 나와 친하게 지내는 분이 나보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호랑이가 고양이 흉내를 낸다고 말이야.

그분은 내가 사람들과의 다툼이 싫어서 할 말을 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는데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무슨 소릴 합니까?

지난번에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껏 보여준 것만 하더라도 순전히 자신의 폭력성에 대한 변명으로 일관되어 있는데요.

인내심이라고는 아무리 봐도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도대체 언제 인내심을 발휘했다는 거지요?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 그런 것도 같구나.

하지만 나는 말이야.

내 수준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거든.

네 수준에서는 내가 인내심이 없다고 볼지라도 내 수준에서는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했다 이 말이야.

다시 말해줄까?

네가 생각했을 때의 이 정도는 돼야 인내심이 있다는 기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인내심은 발휘를 했다는 말이지.

아들아!

만약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이야.

인내심의 기준을 내게 말해주렴.

그렇게 네가 해준다면 나도 그만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그거야 뭐 불쌍한 사람에게는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몸이 성치 않은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따뜻하게 대해주며…….

 

그만 하렴.

네가 말을 하지 않아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말이니 더 말해봐야 무슨 쓸데가 있겠니?

내가 앞서도 말을 해주었지만 우리들은 이원성의 벽을 넘지 못하고서는 절대 신을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았니?

네가 지금껏 내가 해준 말을 제대로 소화 시켰다면 절대 그러한 말을 할 수는 없어.

사랑이라는 것에 기준이 있을 수가 없으며 폭력 속에도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제대로 들렸다고 한다면 절대 이러한 말이 나올 수 없거든.

나를 바라보는 네가 나를 인내심과 사랑이 부족하다 보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네 목적이 해탈에 있고 신을 알고자 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이원성의 벽을 넘지 못하고서는 그 같은 일은 정말로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아.

이것은 네 목표점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며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사랑이 부족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것은 너의 해탈과는 아무런 함수관계가 없다는 거지.

시시비비와 선악이라는 것은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앞서 말을 했지?

내가 앞서 예를 든 일들도 기준을 어디쯤에다 잡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을 달리 할 수 있고 내주장을 강하게 해볼 수도 있어.

다시 말해서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는 말이거든.

내가 정당한 이유를 몇 십 개는 족히 잡아내고 남음이 있다 이 말이야.

하지만 그러한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내가 그 모든 것들을 소화를 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겠어?

그 당시 일의 잘잘못을 말하자는 게 아냐.

지금 네게 말하는 것은 참고자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말하는 거다 이 말이거든.

참을 수 있는 만큼은 참아야 하겠지만 도저히 그러지 못할 때는 터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거지.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얼마든지 조용하고 편안하게 해피엔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인 거야.

무려 4년 동안이나 참아주다 한번만 나무래도 사람들은 견디지를 못해.

명상을 하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래야만 한다는 인식들을 다들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여기에는 어떤 기준이라는 것이 없거든.

그저 자신에게 물질적인 이익을 주고 편안함만 주면 다들 좋아해.

그러고서는 말을 하지.

 

"역시 수행을 하시니까 달라요.

정말 높은 법문을 하시니까 돋보이네요.

부처님 같으시네요.

보살님 같아요.

마음이 넓으셔서 바다와 같습니다.

정말 큰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이러다가 단 한번만 심하게 나무라면 금방 말이 바뀌는 거야.

 

"수행을 그토록 오래했다면서 그따위로 밖에 행동을 못해.

야! 야!

부처가 웃겠다야.

하나님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채식과 수행을 수십 년 하면 뭐해.

참을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걸.

물질적인 것을 떠나야 한다면서 제 돈이 아까워 벌벌 떠는 주제에 남에게 설법은 왜하는가 말이야.

정말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자신이 불편한 것도 참아야 하고 명상이 방해 받는 것도 참아야 하고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견딜 줄 알아야지 인내심도 없게 행동하는 사람이 무슨 깨달음을 논하고 있어"

 

이것이 바로 사람이야.

이래도 우리들은 끝까지 인내하고 참아야만 그들을 돕는 것이 되는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사람들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나 자신의 수행에 도움이 되겠는가 이 말이거든.

그래서 나는 참을 수 있을 때는 참아야 하겠지만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이 서로를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싶을 때는 해소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물론 방법을 폭력적이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야.

얼마든지 이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겠니?

그 당시 전화를 하든지 다음번에 만나든지 했을 때 말을 하면 얼마나 좋아.

 

"어이!

사형!

오랜만입니다.

전에 그 일은 일처리가 매끄럽지 못한 것 같았어요.

왜 많이 바빴던 모양이지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철밥통이 뭡니까?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실례 아니요. 앞으로 말을 좀 가려서 하면 좋겠네요."

 

이정도만 돼도 누가 감정을 상해하겠냐 이 말인 거야.

만약 이 같은 말을 그 당시에 못했다 하더라도 다음번에 전화를 하든지 아니면 만났을 때 얼마든지 말을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때는 사형 말이 좀 심했던 것 같더라.

앞으로라도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우리야 동수라 괜찮겠지만 남들은 이해를 못할 수도 있거든"

 

물론 이것은 좋은 경우를 말한 것이고 정 안되면 나에게 호통을 쳐도 좋아.

이렇게 풀어버려야 가슴에 앙금이 생기지 않는 법이야.

그런데 아들아!

우리들 수행자들은 대부분이 마음들이 여려.

그래서 말을 못하고 가슴으로 안고만 있거든.

그러다 보니 자꾸 가슴에 응어리만 생기는 거야.

이래서는 절대 자신의 수행에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워.

이 같은 일은 절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크나큰 장애가 되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만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이것이 나에게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참지 못하거든 터트려.

나는 정말이지 내 잘못을 아주 미화를 잘하는 것 같구나.

내가 생각해도 아주 비상하다 못해 출중한 것 같아.

하지만 이 같은 일은 나또한 반대되는 경우를 무척 많이 당했어.

나이도 어린 친구들이 함부로 말을 하거나 심지어 발로 툭툭 차가면서 말을 한 적도 있어.

그래도 나는 참아냈으며 그다음 그 사람을 봐도 아무렇지 않게 차도 마시고 떠들고 놀곤 했거든.

그 당시의 일은 그 당시로 끝이 나야했고 그것을 그 자리에 남겨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물론 그 사람이 또다시 반복해서 행동할 때는 나에게 혼이 나야해.

 

"어이 젊은 친구 그러면 못써.

사람이 위아래도 없이 놀면 안 되지.

앞으로 조심하시오.

그 같은 행동이 당신에게도 돌아올지 모르니 고치는 게 좋아요"

 

아마 나에게 이러한 쓴 소리를 직접 들었던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해 주었어.

 

직접적으로는 단 한사람에게도 말을 한 적이 없다면서 모두에게 어떻게 말을 해줄 수 있지요?

내면으로 말을 했다는 소린가요?

 

아니지.

내가 내면으로 말을 해서 알아들을 사람들이라면 그런 말이 필요 없어.

내면은 내가 말을 하든 안하던 모두 알고 있으며 육신이 말을 필요로 하는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 직접 말을 하지 않고 그 사람에게 말을 합니까?

그것은 말이야.

제삼자의 말을 그 사람에게 말해줌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어.

누군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기분이 나쁘더라 하면서 말을 해주는 거지.

직접대고 말을 하면 자존심이 상해할 수도 있으니 다른 이의 예를 들어 자신의 행동을 들여다볼 기회를 주는 거야.

그래도 못 알아들을 때면 어떻게 하냐고?

그때는 강도를 조금 더 높여서 말을 해 주어야지.

그렇게 안배를 해주어도 못 알아듣고 또다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다고 하면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것이 아니겠어?

아들아!

내가 하는 방식이 이러하기에 나는 누군가 내 앞에서 남의 얘기를 하면 나에게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어떨 때는 남의 얘기에 내가 흥분할 때가 많아.

그날의 화제에 오른 사람을 극구 변호하며 반론을 펼치는 거지.

이럴 때면 사람들은 의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게 되는 거야.

 

"아니! 저 사람은 남의 얘기에 왜 저토록 열을 올리는 거지?

제 얘기도 아닌데 말이야"

 

이것이 바로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거든.

이러하기에 나는 이러한 말을 좋아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 말은 성경에도 나오고 코란경에도 나오는 구절로 알고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절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방법만 잘 선택해서 이 같은 일을 행하면 그야말로 아주 좋은 법문이 되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누구처럼 마구잡이식으로 대하라는 말이 아니라 참아보고 안되거든 최대한 폭력적이지 않게 해소를 시키라는 말이거든.

알겠지?

아들아!

내가 오늘 너에게 이 같은 설명을 하기위해 이분들의 이야기를 했다만 이분들과의 일은 모두가 소화가 되었음을 네가 알았으면 해.

앞서 너와의 대화속의 모든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이고 말이야.

내 마음에 앙금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오늘의 얘기를 마무리 하자꾸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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