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요한복음17.

배가번드 2022. 5. 3.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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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당량의 눈이 내렸지요.

아마 젊은이들은 눈 내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을 것이고 운전자들이나 골목에서 장사하시는 분

들은 눈살을 찌푸렸을 겁니다.

눈이 내려 질척거리면 차가 더러워질 뿐만 아니라 추워서 얼기라도 하면 사고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듯 똑같은 상황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희비가 엇갈립니다.

내리는 눈을 축복으로 볼 것인가 재앙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상태

에 달렸습니다.

그러니 축복과 재앙은 한 몸이나 다름없지요.

이런 이유로 나 홀로목사는 재앙이 닥치게 되면 그것을 재앙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봅니다.

예를 들자면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가져오고 멸망은 창조를 가져온다고 여기지요.

절망과 희망이 한 몸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기에 겉으로 울면서 속으로 웃습니다.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이 나 홀로목사의 이런 점을 얼마나 이해하실지 모르지만 선악과는

선과 악으로 구분된 과일이 아니라 선악이 한 몸이 된 상태의 과일이라는 점을 말씀드리며 요

한복음9장의 문을 열겠습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9:1)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

이까 그 부모오니이까(9: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

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9:3)

Jesus answered, Neither hath this man sinned, nor his parents: but that the works

of God should be made manifest in him.

 

위 내용은 예수님이 일으킨 많은 기적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일입니다.

태생이 장님인 사람을 눈뜨게 만들었으니 이보다 큰 기적은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위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많은 뜻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게 되면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은 윤회와 업장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당사자의 영혼이 죄가 커 불구자의 몸을 받아 태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으며 부모의 업장

으로 인해 불구의 몸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다 여겼던 겁니다.

이러한 그 당시 사람들의 신앙행태에 대해 예수님은 윤회사상을 넘어서는 법문을 3절을 통해

하셨습니다.

현상을 초월해 우리의 근본을 되찾는 최고의 상승 법문을 하신거지요.

소경으로 태어난 것을 죄의식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 일을 위해서라 설하신 겁니다.

만약 윤회의 과정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된다 생각한다면 불구의 몸을 벗고 영생을 얻게 되기까

지 얼마나 많은 생을 살아야할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하고자하면 이런 과정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며 예수님과 같이 성령이 드

러난 분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깨닫게 되면 그 즉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뜻

이지요.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말이 이해됩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9:4)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9:5)

As long as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4절을 보면 사람의 일생을 밤과 낯으로 구분 짓고 있습니다.

성령이 깨어나지 못한 삶을 밤, 성령을 만나 깨어나는 전체과정을 낯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예수께서 자신을 빛으로 묘사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낯에는 일을 하고 밤에 쉬는 것처럼 성령()이 드러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을 하

지 못한다는(역사하지 않음)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달리 표현해서 예수(성령)를 만나지 못하면 어두운 밤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5절 내용은 예수님이 빛(성령)이심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러면 성령이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9:6)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9:7)

And said unto him, Go, wash in the pool of Siloam, (which is by interpretation,

Sent.) He went his way therefore, and washed, and came seeing.

 

!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땅에 침을 뱉어 이긴 진흙을 눈에 발라 장님이 눈을 뜨게 만들었으니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에

기적이지요.

그런데 내가 놀라워했던 것은 액면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담긴 뜻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창조의 과정과 구원자의 역할에 대해 말해놓은 것으로 단순하게 장님이 눈을 뜬 것

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흙을 빚고 숨결을 불어넣어 인체를 만든 과정을 비유로서 나타낸 겁니다.(창세기)

clay는 진흙이라는 뜻 외에 인체, 육체의 뜻이 있으며 그가 땅에 침을 뱉었다는 것은 하나님

이 숨결을 불어넣은 과정을 묘사한 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의 뜻은 보내신 자, 파견된 자등으로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이런 뜻을 적용하여 해석해보면 인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눈을 뜨고자하는(영안을 열고자

하는,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사람(장님)을 구원자(실로암)이자 메시아인 예수님께로 보냈다는

내용이 됩니다.

그래서 가서 씻고(가르침을 받아 깨끗해짐) 볼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He went his way

therefore, and washed, and came seeing.)

아마도 많은 분들은 나 홀로목사의 해석을 달가워하지 않고 기존의 기적을 믿을 걸로 봅니다.

그렇지만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기적을 경험하고 싶다면 나 홀로목사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거라 생각합니다.

기존 크리스천들의 해석대로 받아들일 경우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누릴 사람은 이 세상

에 없습니다.

예수처럼 장님을 눈뜨게 해줄 수 없다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없다는 등식이 성립됨으로 그 누구도 성령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식이다보니 어떤 종파에서는 예수의 공중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며 예수만이 메시아라 믿는 겁니다.

이래서는 우상숭배의 늪에서 헤어나기 어렵지요.

누구라도 기존의 기독교교리에 머물고 싶을 경우 주변에 늘려있는 교회를 나가면 지겹도록 기

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이곳을 서성거릴 이유가 없다는 뜻에서 말씀드렸으니 이

해하기 바라며 각설하고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9:8)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9:9)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9:10)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9:11)

He answered and said, A man that is called Jesus made clay, and anointed mine

eyes, and said unto me, Go to the pool of Siloam, and wash: and I went and

washed, and I received sight.

 

위내용을 보면 장님이 눈뜬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예수가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른 것이 아니라 축성을 드렸다는 사실을 알

게 됩니다.

바른다는 뜻으로 사용된 anoint 기름을 바르다, 성유를 바르다의 뜻이지요.

그리고 실로암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 파견된 자로서 메시아를 뜻합니다.

따라서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은 메시아(예수)의 가르침에 몸을 담그라는 뜻이 됩니다.(Go to

the pool of Siloam, and wash)

이렇게 가르침을 통해 몸을 정화시키고(씻고) 나자 보게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보게 되었다는 부분도 가만히 살펴보면 보게 됨을 받아들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지요.(I received sight)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들을 종합해보면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시야가 트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영안이 열렸다고 하자 유대인들은 궁금해 합니다.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9:12)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9:13)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9:14)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

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9:15)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

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

(9:16)

Therefore said some of the Pharisees, This man is not of God, because he keepeth

not the sabbath day. Others said, How can a man that is a sinner do such

miracles? And there was a division among them.

 

유대인들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과거에는 자신들에게 가르침을 구걸하던 사람이 갑자기 영안이 열려 성경에 대한 말을(창세기

내용) 하는지라 그를 가르친 예수에 대해 알고 싶었던 거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예수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은 안식일을 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경시여기는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만약 죄인이라면 창세기에 대한 완벽한 해석을 할 수가 없을 거라는 주장도 있었기

에 쟁론이 펼쳐졌다 합니다.

위의 내용을 보건데 바리새인들 가운데도 성경에 정통한 이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겠지요.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

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 대(9:17)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9:18)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9:19)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9:20)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9:21)

But by what means he now seeth, we know not; or who hath opened his eyes, we

know not: he is of age; ask him: he shall speak for himself.

 

17절을 보면 눈뜬 이는 예수님더러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란 예로부터 하나님을 대변하는 이들로 알려져 있지요.

대표적인 인물로 모세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사실상 하나님의 대변자였습니다.

이와 같은 이들은 성경에 수없이 많이 있으며 그들 모두는 영적스승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볼 때 눈을 뜬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영적인 가르침을 받았고 그로인해 영안

을 열었기에 선지자라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18절에서 20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영적으로 장님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소경임을 생각할

수 있지만 21절을 보면 상황은 완전히 바뀝니다.

앞부분을 직역해보면 그가 지금 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입니다.(by

what means he now seeth, we know not)

장님이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야가 트였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며

뒷부분에서 그에게 직접 물어보라했던 거지요.

기자(記者)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기적 속에 담긴 뜻을 이렇게 슬쩍 비춰놓은 겁니

.

또한 요한은 인연 없는(공덕 없는) 이들이 예수님의 기적에 초점이 맞춰지게 사실을 살짝 비

틀어 놓았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런 나 홀로목사의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

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9:22)

These words spake his parents, because they feared the Jews: for the Jews had

agreed already, that if any man did confess that he was Christ, he should be put

out of the synagogue.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9:23)

Therefore said his parents, He is of age; ask him.

 

22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단순하게 장님을 눈뜨게 만든 것이라면 신기하게 여길 일일뿐 그리스도라고 인정받을 일

은 아니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정하다로 쓰인 단어 confess는 인정하다보다는 자백하다로 많이 쓰인다

는 겁니다.

예수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이 단어를 사용한 거지요.

인정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자백한다는 것은 기정사실화

된 일을 고백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점을 볼 때 유대인들 중 상당수는 예수가 그리스도인줄 알고 있었습니다.(22)

그리고 23절은 소경이 영적으로 성장하였기에 영적인 일은 그에게 물어보라는 뜻이지요.

육신적으로는 자신들이 부모이지만 영적으로 보자면 그가 어른이라는 뜻입니다.(He is of

age)

이와 같은 부모의 말에 유대인들은 또다시 소경을 불러 물어봅니다.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9:24)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

는 그것이니이다(9:25)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9:26)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

자가 되려 하나이까(9:27)

 

24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유대인들도 소경의 영안(靈眼)이 열린 점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장님과 다름없던 이가 제대로 된 해석을 하는지라 그 점만큼은 인정할 수밖

에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취급

을 합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응에 소경은 자신으로서는 예수님이 죄인인 것보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된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지요.(25)

그러자 그 말이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든 유대인들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영안이 열리게 되었

는지 궁금해 하며 물었습니다.(26)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기했던 겁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꼬치꼬치 캐묻자 소경이었던 이는 유대인들에게 당신들도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은가를 되묻고 있지요.

27절을 보다시피 소경이었던 사람은 자신이 영안이 열린 과정을 유대인들에게 미리 말해주었

습니다.

그렇기에 말해준 것을 듣지 않고 또다시 듣고자하느냐 소리쳤으며 제자가 되고 싶은가를 말했

던 겁니다.

만약 장님이 눈을 뜬것이었다면 제자가 되고 싶은가를 묻지 않았겠지요.

이어지는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9:28)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9:29)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9:30)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9:31)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9:32)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9:33)

If this man were not of God, he could do nothing.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

어 보내니라(9:34)

They answered and said unto him, Thou wast altogether born in sins, and dost

thou teach us? And they cast him out.

 

유대인들이 모세는 믿지만 예수는 믿을 수 없다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통한다는 것을 조상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지만 예수가 어디로

부터 왔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지요.(28~29)

그러자 소경이었던 사람은 영안을 뜨게 만든 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30)

또한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숭배하고 뜻대로 행하는 이의 말을 듣는지

라 만약 유대인들 말대로 예수가 죄인이라면 자신이 영안을 열지 못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가 맞으며 만약 예수가 하나님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했지요.(31~33)

이렇게 현명한 대답에 유대인들은 격분하여 그를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29절 내용은 우리가 곱씹어봐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소경이었던 사람더러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났다고 한 것은 육신을 가리킨 겁니다.

성경은 영혼을 깨닫지 못한 육신을 죄인으로 보고 있으며 영혼을 깨닫지 못하면 죄의식 속에

살다가 영혼까지 죽게 된다는 것을 기록해놓은 거지요.

이것은 나 홀로목사가 누군가를 겁을 주거나 없는 말을 지어서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사람들에

게 물어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에게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를 물어보면 모두가 죽으면 그만이라 말하

지요.

이들의 말처럼 자신의 영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지라 당연히 영혼도 함께 죽는 겁니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생전 영혼을 깨달아야만 하며 성령이 우리 안에서 되살아나게 만들

어야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성령에 대해 어떤 가르침을 주시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

를 믿느냐(9:35)

Jesus heard that they had cast him out; and when he had found him, he said unto

him, Dost thou believe on the Son of God?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9:3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9:37)

And Jesus said unto him, Thou hast both seen him, and it is he that talketh with

thee.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9:38)

And he said, Lord, I believe. And he worshipped him.

 

35절에 인자를 믿느냐고 했지만 직역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입니다.

원래 인자는 “Son of man” 으로 표기하지요.

결론적으로는 인자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이렇게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37절에 나오지요.

예수께서 네가 그를 보았다 한 대목을 직역해보면 너는 그 둘을 보았다 입니다.(Thou hast

both seen him)

육신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신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의 몸 안에 성령이 함께 있으니 그 둘을 동시에 본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자신을 가

리킨다 하신 겁니다.

이런 사실을 알았으므로 소경이었던 이는 공손하게 절을 했지요.(38)

이렇게 예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후 자신이 세상에오신 목적을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

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9:39)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9: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

니라(9:41)

Jesus said unto them, If ye were blind, ye should have no sin: but now ye say, We

see; therefore your sin remaineth.

 

이제 확실하게 진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한다 말

씀하신 것은 눈먼 장님을 눈뜨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보는 자들을 소경으로 만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지요.

따라서 이 말씀은 영적으로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보고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는 뜻입니다.(39)

그렇기 때문에 40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도 소경인가를 물었던 거지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차라리 볼 수 없다고 했으면 죄가 없을 것이지만 본다고 했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죄에 해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영은 깨달아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뜻으로 죄가 남는다고 한 겁니

.(your sin remaineth)

한마디로 말해서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영안이 열리셨는지요?

모르긴 해도 몇몇 분은 영안이 열리는 체험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안이 열렸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9장의 내용을 장님이 눈을 뜬 것으로 볼 것인지 영적인 세

계를 보는 눈이 열린 내용으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판단으로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나 홀로목사의 이 같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영안이 열렸다는 것이

어떤 환상의 세계를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물의 실체를 꿰뚫어본다는 의미란 점을 안다면

성경을 통해 얼마든지 영안을 열 수 있지요.

부디 여러분 모두가 나 홀로목사의 말을 이해하길 바라며 9장의 막을 내리겠습니다.

 

눈은 보는 도구(道具)

귀는 듣는 도구며

코는 냄새를 맡는 도구이고

입은 맛을 보는 도구이며

피부는 감촉을 느끼는 도구로서

뇌를 통해 반응한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도구에 불과하니

자체로는 작동 할 수 없으며

대상이 필요하나니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일지라.

이 둘이 각자 따로 있으매

감흥이 없겠으나

주인이 허락하면 감각이 일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며

느끼고 판단을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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