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운명(運命)도 선택이다.

배가번드 2022. 7. 15.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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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겪게 될까를 궁금해 하며 앞날을 예측하길 즐겨하지요.

그래서 점집을 드나들기도 하고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늘의 운세를 찾아보기도 하는 겁니다.

가끔씩은 나 역시 타로 점을 보기도하니 이런 점으로 잘잘못을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신통하게 맞아 들어간다는 생각은 않고 있으며 그저 재미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똑같은 상황을 타로 점 운영하시는 분들마다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주제를 놓고서도 여러 가지 각도로 나온다는 것 자체가 그다지 신뢰할 것이 못 된다는 거지요.

실지로 나 같은 경우 타로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곳저곳을 보기도 했는데 그중에서 내 마음에 드는 타로 점을 내가 선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선택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맞아 들어간 적이 거의 없었지요.

만약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할 경우 타로점이 다들 일치되었을 테지만 이곳저곳이 다르게 나온다는 것은 정해진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내가 걸어갔으면 하는 길을 내가 선택하고 있음을 확인했던 셈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 잘 말해주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갈림길을 만나 자신이 가야할 길을 점치기로 마음먹고 신발을 던졌지요.

신발 코가 향하는 길을 선택하기로 했는데 마음에 드는 길이 나오지 않자 몇 번이나 던진 끝에 마침내 자신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 하던 길이 나왔고 그길로 가더라는 겁니다.

비근한 예로 어떤 사장이 넥타이를 고르기 위해 비서를 불러놓고 이것저것을 대보며 어떤 것이 좋을까를 물었다고 합니다.

비서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자 결국에는 자신이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넥타이를 매고 가더라는 거지요.

이처럼 모든 운명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자신이 만들어간다는 말이 맞는 겁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비서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권을 비서에게 줌으로 인해 스스로의 운명을 제한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점집을 드나들면서 자신의 운명을 제한시키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목사님들조차 점집을 드나들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만 수행인으로서 해탈이나 영생을 논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아야할 일이지요.

아직도 영생에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스스로를 제한시키는 일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고 자신이 자유로운 영혼이라면 이런 일 따위는 한낱 장난으로 치부해버립니다.

해보면 알겠지만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점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나온다 해도 그대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식의 범위를 초월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꿈이나 점사 등의 일들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러한 인식의 범주아래 놓였기 때문이고 영생이나 해탈은 그 범위를 넘어서 있음으로 인해 제대로 맞아 들어갈 수 없지요.

이런 상황에 대해 잘 말해주는 것이 축복과 저주가 하나라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좋지 않은 상황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점사나 꿈 따위는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겁니다.

사업이 망하는 것을 신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점사가 무슨 소용이며 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입니다.

또 한 가지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남녀가 싸움을 해서 헤어지려 했는데 그이유가 상대방의 말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서로 화가 나서 할 말 안할 말을 쏟아냈는데 약간의 시간을 두고 차분한 마음으로 대화를 해보니 서로를 이해하게 되어 다시 사랑하게 되었지요.

그날 여자는 습관처럼 오늘의 운세를 보았고 일진이 좋지 않게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싸움 끝에 화해를 하고 서로 사이가 좋아졌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좋은 겁니다.

마음에 부정적인 것들을 끄집어내어 사랑이 더욱 크게 확장이 되었으니 그날의 점사는 틀리게 된 셈입니다.

물론 처음에 싸운 것은 맞는 셈이지만 결말에 가서 더 큰 사랑을 얻었으니 축복과 저주가 하나라는 것을 실천한 셈이 된 겁니다.

이렇듯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알아야할 것은 싸움을 했던 연인들은 수행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을 향한 목적지가 동일했고 마음에 하나님을 품고 있었기에 이런 결말을 얻을 수 있었던 거지요.

이별 행 버스를 멈출 정도로 강력한 파워가 이들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사랑을 지켜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며 이런 일에 대해 성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장 5.6절)

여호와의 히브리어 뜻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우리를 존재케 하는 힘이자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지요.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며 하나님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경이로운 존재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내면에도 있습니다.

단지 우리스스로가 제한함으로 인해 작게도 크게도 작용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인식에 머물고자 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