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오늘은 앞서 말했던 영지주의와 천부경에 대한 이야기로 해탈을 향한 여정의 문을 열어보자꾸나.
천부경이나 영지주의의 숨겨진 복음서들이 하나 같이 우리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실생활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시킬까 하는 것이 중요해.
사실 천부경이나 숨겨진 복음서의 내용들을 제대로 풀어서 설명하려면 책을 몇 권 써도 모자람이 있어.
우주의 생성비밀을 81자로 줄여서 압축해놓은 천부경을 그 비슷하게 설명을 한다 해서 어떻게 제대로 된 설명이라 할 수가 있겠니?
당연히 몇 단계의 설명이 더 필요할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지혜로운 이들은 그야말로 단박에 알아볼 수도 있는데 그들이 바로 근원에 가까운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인거지.
한마디로 내면에서 빛과 소리를 경험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어.
이것은 아주 간단한 이치인데 자신이 그러한 경험을 한지라 경전에 나온 말의 뜻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알아볼 수밖에 없음이거든.
내가 성경을 보았을 때 바로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로 내 인생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곧바로 수행지침서라는 것을 알게 된 거야.
결코 이것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는데 물질의 멸망을 몇 번이나 거듭한 뒤에야 알게 되었어.
입문을 하기 전에는 성경을 보아도 전혀 보이지도 않던 개념들이 이제는 훤히 보이게 된 거지.
이것이 바로 고통과 절망이 나에게 가져다준 선물이 아니겠어?
이래서 신은 인간들에게 늘 축복만을 준다고 하는 것인데 인간들의 관심사가 오로지 돈에 있다 보니 자신들이 무엇을 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에 현실을 비관하고 자살들을 쉽게 하는 거야.
대부분의 자살자들이 진정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희망을 상실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거든.
고통과 괴로움이 신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못 깨달았기 때문인데 이 또한 무지가 가져다주는 열매라고 봐야해.
이러하기에 우리들은 스스로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만 하는 거야.
물론 당신말씀은 충분하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만 일반인들이 그 같은 사실을 깨닫기는 쉽지가 않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빛과 소리를 듣고 보지는 못하니까요.
그러니까 다들 교회나 절을 다니고 각자의 수준에 맞는 믿음을 가지는 거지요.
그야 그렇지.
그렇지만 우리가 명심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절대 내가 가고 있는 믿음의 길과 남들의 길이 다르다고 심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아무리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이 고귀하고 거룩한 길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남들에게 강요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그 말씀이야 맞지만 채식과 지구 살리기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닌가요?
더군다나 스승님이 그렇게 지시를 하셨으니 까요?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러나 그 말이 맞다하더라도 우리들의 목적이 달라져서는 안 되거든.
왜냐 하는 이유가 영주주의 복음서인 “도마 복음서”에 나와.
“그대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대에게 ‘보라!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말하면 새들이 그대보다 먼저 그 곳에 다다를 것이다.
그들이 그대에게 ‘하나님 나라는 바다에 있다’라고 말하면 물고기들이 그대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이는 그런 뜻이 아니라 자아발견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그대들 안에 있고 또 그대들 밖에 있다는 말이다.
그대들이 스스로를 알게 되면 알려지게 될 것이며 또한 그대들이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스스로를 알지 못하면 빈곤 속에 거하게 될 것이며 빈곤은 바로 그대들이 된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채식이 깨달음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토끼와 소와 같은 채식동물이 먼저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가 되겠지?
다시 말해서 프루테리언이 되었건 워터리언이 되었건 깨달음과는 무관하다는 말도 되는 거야.
그렇다면 스승님은 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요?
분명하게 “내 인생의 새 이야기” 세미나에서 비건이 되어야한다 말씀하셨고 모든 문제들의 해결은 채식이라고 하셨거든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승만이 아시겠지만 내가 보았을 때는 그런 것이 아니라 생각해.
인과의 벽을 넘지 못한 제자들을 위하여 생명존중의 마음을 실천함으로서 내면의 사랑을 일깨우게 하려는 거라 보이거든.
내가 그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증거가 있어.
“내 인생의 새 이야기” 책을 보면 앞에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의 평론이 담겨져 있는데 그중에서 영적인 스승이 남기신 말씀이 바로 내말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는 거야.
그는 대만의 영적 스승인데 이렇게 말을 했지.
“스승은 자신의 영혼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을 위하여 무척 애를 쓰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스승이 내 인생의 개들이나 새들에 대한 책을 낸 것은 어디까지나 제자들을 위해서라는 말이거든.
다시 말하자면 개와 새들이란 자신의 제자들을 말하는 거지.
에이.
설마요.
스승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개와 새에다가 비유를 했을까요?
대만의 영적 스승이 잘못 보았겠지요.
아마도 그가 아직 덜 깨달았기 때문에 잘못 본 것일 겁니다.
그는 모르긴 해도 수준이 2세계정도 밖에 안 되는 스승일거예요.
푸하하하.
웃기지도 않는구나.
바로 이러하기에 너는 한시라도 빨리 네 영혼의 위대함을 알아야만 하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바로 스승이 개와 새 법문을 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너희들의 그러한 밑도 끝도 없는 분별 심을 없애주기 위해서 각가지의 방법으로 법문을 달리해야 하는 거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나 본데 깨달음의 세계라는 것은 등급이 없어.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과를 넘어서야만 생기는 개념이긴 하지만 이 같은 내말이 이해가 안 된다면 인과를 못 넘었다고 보면 아주 정확해.
이것도 내가 말하면 내수준이 낮아서라고 할 것이 분명하니 내가 한 가지 증거를 보여주마.
예수께서는 젖을 빨고 있는 갓 난 아기들을 보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기들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같다.”
그들이 예수께 여쭈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린아이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너희들이 안을 밖과 같이, 밖을 안과같이 만들 때, 그리고 위가 아래와 같아지고, 또한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동일하게 만들 때……
너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면 말이야.
마음이 순수한자라야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거든.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란 이만큼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말이며 분별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 거지.
많은 사람들은 도마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할거야.
“이제 나는 더 이상 너의 스승이 아니다.
너와 나는 쌍둥이 형제니라.”
만약 일반적인 동수들의 말처럼 등급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달라져야해.
“이제 너는 2세계를 넘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3세계가 될 것이고 그다음은 4세계 또 그다음은 5세계……”
물론 이 말도 맞는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인과의 벽을 넘지 못한 상태에서는 등급이 존재할 수밖에 없겠지만 인과를 넘어서면 더 이상의 윤회나 등급은 존재할 수가 없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이원성의 벽을 넘어서야지만 신의 품으로 돌아 갈수 있다는 말이거든.
지금처럼 업장이니 등급이니 해서는 절대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놓으신 거야.
그렇다면 스승님께서는 왜 그렇게 등급을 말해 놓으신 걸까요?
내가 말해주었지?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등급을 고려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말이야.
윤회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한 제자들을 위해서 별의별 방법을 동원해서 애를 먹고 있는데 참으로 대단한 인내심이고 노력이라고 생각이 되거든.
스승이 개와 새에 비유해서 말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너는 혹시 아는가 모르겠구나.
안 그래도 그게 궁금했어요.
많은 동수들이 동물을 기르는 붐이 일어났는데 센터가 개판이 된 것 같기도 해요.
나도 안다.
내가 세미나에 가보니 스승주변에는 사람들보다 개와 새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어.
내가 감히 스승가까이 가기가 겁이 날 정도더구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들을 개와 새에 비교하다니요.
빨리 사과하세요.
안 그러면 동수들로부터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요.
아직도 네가 나를 잘 모르는구나.
내가 그런 것이 무서웠으면 이렇게 너와 대화를 하지도 않았고 이러한 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그까짓 철없는 개와 새떼들의 불평이야 얼마든지 받아주지.
갈수록 더 심하시군요.
정말 사과를 하지 않으시면 큰 낭패를 당하십니다.
하하하하.
드디어 너는 지옥문을 열고 있구나.
사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
일부 동수들이 말하듯이 개와 새가 사람보다 등급이 높은 것은 아니라는 거지.
가만히 자신들의 마음상태들을 살펴보렴.
자신들이 개와 새에 비교 당했을 때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말이야.
왜 우리들이 개와 새라는 말인가 하는 분노의 마음이 들었지 않니?
바로 여기에 우리들이 알아야만 하는 스승의 가르침이 있거든.
스승의 참된 뜻은 우리들이 신을 향하는 마음이 새와 개만큼 순수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거야.
이 같은 내말은 동물을 키워본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갈 것인데 그들은 정말 사람들에게 사랑만을 주거든.
절대 거기에는 계산이 깔려져 있지 않아.
스승은 바로 이러한 점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지 길거리에 늘려있는 개떼와 새떼들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라는 말이 아닌 거지.
그렇다고 해서 동물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니 괜히 내말을 오해는 하지말기바라.
아들아!
나는 이렇게 말을 할 때마다 스승의 지혜로움에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곤 해.
참으로 대단한 스승이구나 싶은 거지.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보고 싶군요.
왜 당신은 그렇게 위대하신 스승의 일을 하시지 않는지요.
센터도 건성으로 다니는 것 같고 스승님의 거룩하신 일에도 비협조적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래.
너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말이야.
나는 스승의 일만이 위대하고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차라리 그를 도와 밑에서 일을 하는 동수들이 더욱 위대해 보이거든.
마치 개와 새들처럼 맹목적으로 스승을 따라 움직이는 그들을 보노라면 그야말로 거룩하다 싶은 거지.
자신들의 재산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몸도 돌보지 않으면서 일을 하는 그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와.
그렇다면 더더구나 그들과 동조를 해서 일을 하셔야지요.
그런데 말이야.
나는 그들만이 그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한다고는 생각을 않거든.
채식도 하지 않고 명상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야말로 더더욱 대단하신 부처님들이고 신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것은 마치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의 세상에서 먹이사슬의 최하층부에 자리한 이들이야말로 그 위 모든 상위계층을 직접 먹여 살리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들이야말로 거룩하신 부처님들 이라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나는 세상의 누가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근본에 있어서는 동일하게 고귀하다 생각하는 것이며 그 어느 한사람도 누구보다 더 고귀하거나 비천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따라서 나는 그 어디에도 머문바가 없음이며 누구를 위해서도 일을 하는 존재는 아니야.
그저 나를 위한 일만 하는 자일뿐…….
이것은 어쩌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다분한 말인데 솔직한 내 마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이거든.
너와의 대화가 일반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마치 도깨비 방망이 두드리듯이 뚝딱하면 나오는 줄 알겠지만 그런 게 아니야.
글 한편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서는 어떤 때는 한주일 어떤 때는 몇 개월이 걸린 적도 있어.
뭐 하러 이러한 글을 올리느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야만 하고 다시는 얼씬도 해서는 안 되거든.
자신이 하는 일은 거룩하고 남이 하는 일은 아주 허접한 일이라고 하는 분별 심에서 나오는 인식인데 한마디로 내방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사람인거지.
그래서 나는 내말에 동조를 할 수 없으면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하는 건데 그들이 비난적인 에너지를 방출하면 글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거든.
자꾸만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염을 보내게 되면 그 영향을 받아 우리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거야.
애당초 대화의 목적지가 세상 모든 종교의 통합과 영혼의 차원상승이라 했던 만큼 그러한 부정적인 에너지는 도움이 안 되기도 하거니와 본인에게도 좋지 않아.
이제야 이야기이지만 너와의 대화를 가장 많이 지켜보는 사람들은 내가 아직까지 육신적으로 속해져있다 할 수 있는 단체의 동수들인데 이들과 나는 하나의 연극을 하고 있어.
그들이 나에게 온다는 것도 내가 알고 있고 그들 또한 내가 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가 모른 척을 하고 있는 거야.
서로가 연극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신의 표현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이거든.
왜냐하면 아는 척을 하게 되면 연극이 깨어질까 두려운 거지.
만약 그들이 나에게 와서 내 글을 본다는 것을 말하게 되면 더 이상 내가 삼자적인 시각을 갖기가 어렵거든.
그렇게 되면 그들을 인식하는 글만 올리게 되고 비판적인 시각은 물 건너가게 되는 거야.
그들의 비위가 상할까봐 그들에게 좋은 이야기만 한다면 우리들의 대화는 아무런 쓸모도 없어.
이래서 내가 자꾸만 비난 섞인 에너지를 나에게 보내지 말라는 말을 하는 거야.
자신들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싶으면 조용히 내방에서 나가면 되는데 왜 자꾸 쓸데없이 오는가 말이지.
아들아!
이야기 방향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지?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더 집중해 보기로 해.
어디까지 얘기 했지?
아!
우리의 대화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려다가 옆길로 샜구나.
내가 항상 말을 했지만 내 이야기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값진 것이 될 것이고 값어치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한 푼어치의 값어치도 없어.
하지만 여기 오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값어치가 있다고 여기고 있기에 오거든.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하는 지금의 이일이 어떻게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냐는 거야.
가끔씩 동수들과 차를 마시다보면 나에게 왜 스승님 일을 하지 않는가 하는 비난 섞인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들이 내 글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말을 해.
“더 이상 센터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요.”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신들과의 연극이 더 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서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들에게 실망을 주기 싫어서 억지로 꾸며서 말을 하는 거지.
그런데 왜 지금 연극을 깨려하시는지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연극을 희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글쎄다.
더 이상 내가 이 같은 대화를 즐기기 싫어서라고 해야 할 것 같아.
하지만 이것은 또한 우리들 모두에게 달려있기도 한데 많은 이들이 연극의 연장을 원한다면 또다시 우리들의 대화는 이어져 갈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어디까지나 글을 올리는 내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이야.
우리 대화의 연속에 대한 결정을 우리들 모두가 하고 있다는 말인 것인 동시에 가장 큰 결정권이 나에게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며 창조주의 의지라는 것이 작용하는 것이 바로 이러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거지.
그러니까 당신 말은 일기장을 비유로 들어 지구촌의 일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창조주의 의지라는 것은 있다는 말이네요.
정확하게 말을 하자면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네가 생각하듯이 창조주가 어느 한사람에게만 머문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해.
분명하게 말하지만 우리들 모두는 창조주의 다양한 표현들이거든.
그렇다고 한다면 모든 이들 안에는 창조주의 품성이 담겨있다는 말인 동시에 우리들의 모든 정보들의 종합이 창조주의 의지를 움직이는 힘이 되는 거야.
내가 어떠한 정보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느냐는 것은 곧바로 창조주에게 전달이 되는 동시에 창조의 근원에게까지 연결이 되는 거지.
이러할 때 우주로 뻗어나가는 또 다른 창조는 이루어지며 우리의 미래들은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내면서 끝없이 작용되고 있어.
이것이 바로 창조의 비밀이며 창조주가 우리들과 함께 일을 하는 방법인거야.
너와의 대화역시 이러한 구조로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우리들은 공동 작업을 해 나온 거라 보면 정확해.
그러기에 우리들 인식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따라 대화의 내용도 다양하고도 깊게 진행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네가 던지는 질문의 수위가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 내 대답도 수준이 높아질 수가 있는 것인데 우리가 한 짝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러한 이유이며 스승과 제자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종교를 믿는 신앙인들의 의식 수준이 그 종교의 값어치를 높게도 낮게도 만든다고 할 수 있어.
그렇다면 신자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수준이 높다는 것이겠군요.
무슨 소리.
숫자가 많다는 말은 보다 보편적이라는 말이지 수준이 높다는 뜻은 아니거든.
종교인들의 인식수준을 말하기 위해서는 “구세주와의 대화”편에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불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뿌리를 모르기 때문에 불에 타 버릴 것이다.
먼저 물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바람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바람이 부는 대로 나부끼게 될 것이다.
그가 걸친 몸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몸과 함께 괴멸 할 것이다……
스스로 어떻게 왔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 자신이 어떻게 가게 될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우리들의 본질인 영혼을 알아야한다는 말이거든.
이 육신이 우리자신이라는 인식을 하는 이상 절대 영혼을 알 수 없다는 말도 되는 거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곳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어.
제자들이 묻기를 “언제…… 새 세상이 오게 됩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벌써 왔으나 너희들이 이를 모를 뿐이다”......
제자들이 다시 물었다.
“언제 하나님 나라가 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는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 ” 라고 말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온 세상에 펼쳐있는데 사람들이 이를 보지 못하고 있다”
어떠니?
너와의 대화 중간 중간 내가 말해 준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지?
저 멀리 하늘에만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천국이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그 같은 천국을 우리들이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거든.
예수님의 이 말을 우리들의 인식에다 접목을 시키면 의외로 아주 간단하게 내 수준을 알 수가 있는 거야.
아직까지 이세상이 천국같이 느껴지지 않다고 한다면 아직도 못 깨달았다고 봐야하며 보이는 사람마다 수준이 낮게 보이고 지옥 갈 사람으로 보인다 하면 아직도 자신이 지옥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야 하는 거지.
사실 이 모든 것은 하나인데 그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지혜로운 이는 알고 있고 무지한 이는 모르고 있어.
근본에 있어서는 알고 모르는 것이 전혀 차이가 없으나 결과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알고 있는 자는 윤회를 하지 않겠지만 모르는 자는 윤회의 사슬을 피할 길이 없는 거야.
그런데 말입니다.
조금 전 말씀하시길 이제는 이러한 연극무대가 필요 없어서 끝을 낼 것처럼 표현하셨어요.
정말 이제 더 이상 우리들의 대화를 지속시키지 않으실 작정이십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만이 아시겠지?
대화를 중단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작용이 큰 것은 내가 맞긴 하지만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들 모두라고 볼 수 있거든.
그러니 우리들의 대화는 이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달려 있는 거야.
아들아!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정말로 크나큰 법문이라고 할 수 있어.
지혜로운 이는 내말에서 창조주를 발견 할 것이며 무지한 자는 내말에서 나의 에고만을 볼 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작별을 하자꾸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