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지난시간 너무나 급작스럽게 마무리하는 바람에 당황스러웠지?
너와의 대화가 하나의 정해진 패턴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대화가 깊어지다 보니 정해놓은 영역을 넘어섰기 때문이었어.
안 그래도 그 일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왜 영역을 넘어서면 안 되는 건지요.
그러한 일이 왜 필요한 겁니까?
그것은 일종의 시험과 같은 것인데 우리가 정해놓은 영역을 넘어서는 순간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대화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거든.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원하는 것이 아닌가요?
물론 우리대화의 영역이 시공을 넘나드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정해놓은 범위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야.
이것은 누가 강제하거나 울타리를 쳐놓지는 않았지만 우리 스스로 정해놓은 규칙과 같은 거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요?
너와의 대화를 9쪽을 넘기지 않으려는 내 생각 때문인데 이 같은 일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스스로의 판단 탓이거든.
정해진 9쪽의 분량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신 의식은 나에게 거기에 따른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해주게 되는 거야.
또한 이것은 이글을 읽게 될 독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한데 우리 대화가 너무 길게 늘어질 경우 처음부터 대화에 들어올 엄두를 못 낼 수도 있으며 글 쓰는 나 역시 처음과 끝이 달라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해.
기억력이 워낙 나쁘다보니 처음 내가 한말을 나 자신이 기억 못할 정도거든.
잘못하다가는 머리와 꼬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도대체 무엇을 주장하는지 알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이제는 왜 내가 대화를 중간에 끊어야하는지 알겠지?
서두가 이상한 방향으로 간 것 같은데 지난시간 마무리하지 못한 부분은 정리하고 넘어가야겠지?
그래요.
지난시간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중단하였는데 만약 누군가가 인연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요.
정말 정해진 인연이어서 만나야만 한다면 당연히 만나게 되겠지만 세상의 인연에는 만나야만 된다는 생각만 하다가 말게 되는 인연도 있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얼마만큼의 깊은 인연인가 하는 것이 필연을 만들기도 하고 스쳐지나가는 인연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만나야만 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거지요.
그렇게 될 경우 약한 영혼은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흩어진다.
아하!~
언젠가 누군가 극락세계에 올라가보니 어떤 이들의 연꽃 좌는 꽃을 피웠지만 어떤 연꽃 좌는 시들어버렸다고 했는데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하는군요.
그것이 유일한 결과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너희는 살아생전 깨달음을 얻은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 것이 중요하다.
안 그래도 요즘 그러한 일들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니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영생을 구하라 해놓았는데 깨달음을 얻은 스승을 모시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재산이 축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들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어서 뭐라 말하기도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항상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고 모든 것은 신에게 맡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쉬어야말이지요.
최선이라는 것이 얼마만큼의 최선인지 정하기가 애매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영적인 일이 무슨 장사도 아니고 늘 돈을 요구하는지라 센터 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조차도 시험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들 수 있는 정도의 범위를 벗어난 무게의 짐이라면 당연히 들지 말아야 할 것이고 자신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시험만을 요구받는다 싶으면 단체를 떠나야 마땅한 일이다.
물질이라는 것은 인간세상을 신과 연결시켜주는 연결고리와도 같은 것인데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좀 더 쉽게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신은 사실 너희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도 없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너희 인간들의 가치관은 보다 물질적이어서 너희가 가진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신에게 바치고자 하지 않느냐?
그러기에 너희는 신과의 연결고리로서 귀금속을 사서 바치기도 하고 돈을 보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마음만으로도 신과의 교감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깊은 기도이자 명상이라 할 수 있다.
참으로 쉽고도 어렵습니다.
자신의 양심을 따르자니 집이라도 팔아야겠고 당장 살집이라도 없으면 앞으로 살 일이 걱정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세상살이인가 봅니다.
그 어떤 일보다 우선시되어야할 일이 자신의 행복이며 후순위가 신의 일이어야 함에도 너희가 신을 위하는 일이 우선시되는 것은 너희가 신으로의 회귀를 강력히 원하기 때문이다.
하여 비록 자신 두뇌의 판단에 따라 집을 팔지 않더라도 미안하게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명상을 통해 신께 엎드리는 수밖에 없다.
너희는 성경에 기록된 다윗이나 솔로몬의 일을 통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맞습니다.
그들은 물질세상의 최고의 자리에 있었지만 신께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엎드리며 기도했지요.
그렇다고 그들이 왕국을 통째 신께 바치거나 왕궁을 팔아 바치지는 않았지만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돈으로 영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황당한 생각인 것 같습니다.
누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겠느냐?
그저 물질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금전을 보시차원으로 바치는 것인데 십일조라는 개념을 모세가 만들어놓은 것은 성직자들 또한 물질세상을 살아가는데 금전이 필요한지라 신을 향한 헌신에 어려움이 없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많은 종교단체나 교회에서 신도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재물을 요구하는 것은 그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처음시작은 분명 지난시간 못 다한 인연에 대한 것이었는데 어느새 보시와 헌금의 문제로 들어와 있군요.
다시 한 번 더 돌아가서 인연에 대해 묻고자합니다.
지난시간 말씀하시길 인연이 정해져있다고 하셨는데 그럴 경우 운명이 정해져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지요?
언제 내가 인연이 정해져있다고 말했느냐?
정해진 인연이 있을 수 있으며 필연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해진 인연이거나 아닌지를 알 수가 있는지요?
피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정해진 것이 아니고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정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본 비전은 어떤지요?
그것이 확실하게 해야만 하는 어떤 일이 있다는 확실한증거가 아닙니까?
그것 또한 너희에게 달려있다.
너희들이 공동으로 그와 같은 비전을 사실로 만들 수 있으며 그저 스쳐지나가는 꿈으로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얼마나 너희가 그러한 비전을 사실로 만들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이며 그러한 비전조차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다.
너희가 정해진 공간속에 속해져 있는 한 그와 같은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일어나야만 한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 가지 설정을 해보도록하자.
한 마리의 고래가 태평양에 산다고 했을 때 태평양에서 일어나는 일은 고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
그렇지요.
하지만 고래가 대서양으로 무대를 옮긴다면 태평양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안 받지 않겠느냐?
당연히 그러하지요.
하지만 바다는 모두 연결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태평양에 갇혀 지내는 고래와 같아서 자신들을 울타리도 없는 바다에 가두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러기에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삶의 질고 속에서 허덕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서양으로 피할 수 있는 고래는 바다는 본시 울타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고래군요.
이럴 경우 얼마든지 운명을 피할 수 있겠는데요.
바로 그와 같이 자유로움을 얻은 고래를 누군가가 따라간다면 또다시 운명적인 만남은 지속되어지는 것이고 없는 울타리를 있다고 여기는 누군가는 태평양에 영원히 남게 된다.
이럴 경우 운명적인 만남은 없는 것이 된다.
그 말씀은 자유로운 고래는 갇혀진 누군가를 위해 울타리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는 말이 되는군요.
이제야 조금 아는구나.
바로 이와 같이 운명적인 만남은 이루어지는 것인데 여기에도 많은 시험이 도사리고 있다.
어떠한 시험이 있는지요?
먼저 울타리 안에 머물기 위해 지켜야하는 규칙들이 있을 것이고 제한된 공간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받아야만 한다.
어떤 삶이 이와 같은 일에 비견될 수 있을까요?
예수의 삶이 바로 그러하다.
아!
그렇군요.
성경에 보니 그렇게 비유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깨달음을 얻은 존재로서 대 자유를 성취하였지만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준바 되었다고 기록되어있었어요.
결국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예언을 몸소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삶을 사셨지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예수님처럼 깨달은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구태여 비참한 최후를 선택했을까요?
그래야만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겁니까?
만약 예수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여 제한된 운명을 피했더라면 구약에 기록된 예언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오늘날 그와 같은 영광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들을 버리고 철저하게 무능한 인간의 삶을 선택함으로서 높은데서 낮은 데로 임했던 거다.
인간으로서 받아야 하는 모든 고통들을 거리낌 없이 받아내는 삶을 선택했기에 그가 오늘날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인연을 맺는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 갈수 있겠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얼마만큼의 높은 곳까지 이르려고 하느냐는 각자의 인연공덕에 달렸다.
따라갈 수 있으면 그저 따라갈 수 있는 것이지 얼마만큼의 높은 곳까지는 무엇입니까?
지금의 예수가 올라가있는 높은 세계까지 너희가 갈 수 있는 만큼의 인식상태를 갖추었다면 당연히 가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좀 더 낮은 세계로 가게 될 것이다.
아!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늘에서의 상급이 틀린다고 기록해놓았군요.
그런데 인연공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누군가와의 인연을 맺는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좋은 일로서 인연을 맺어놓았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너희가 예수를 따른다고 한다면 예수를 위해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느냐하는 것을 말한다 할 것이고 부처를 따를 경우 부처를 위해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느냐를 말한다 할 것이며 깨달은 스승을 따른다고 할 경우 그를 위해 얼마나 좋은 인연을 맺어놓았느냐가 될 것이다.
아하!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떤 이들이 천국에 이를 수 있나이까 했을 때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와준 사람들이 천국에 이를 수 있다 하였군요.
너는 어째서 앞 구절만 보았느냐?
예수가 말하길 네 이웃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결국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이 인연공덕을 쌓는 일이군요.
당연히 그러하다.
종교의 구분 없이 너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선행을 베풀 때 그들 안에 있는 신성이자 불성인 나를 돕는 것이니 어찌 종교를 구분하고 인종을 구분 지으며 성별을 구분할 것이냐?
삼라만상 안에 내가 없는 곳이 없나니 너희가 옳다고 여기거나 선행이라 여기는 일들은 모두 나를 위한 일이며 너희자신을 위함이니라.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저 선행만 베푼다고 해서 높은 세계에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상급에 차이가 있다고 했을까요?
그럴 경우 돈이 많아서 많은 이들에게 이득을 준다고 하면 공덕이 더욱 많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실지로 교회에서는 은연중에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도 하고요.
은근슬쩍 돈을 많이 갖다 바치면 상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냄새를 피우기도 하거든요.
너희가 만약 선행을 많이 해서 높은 세계를 갈 수 있다고 여긴다면 돈이 없는 사람은 무엇으로 천국을 갈수 있겠느냐?
물질로서 갈 수 있는 천국은 낮은 천국이요.
높은 진동의 천국을 가려면 높은 진동이 되어야만 갈수 있음이니 사랑을 베풀어서 갈 수 있는 천국이 따로 있고 사랑자체가 되어야 이를 수 있는 천국이 따로 있음이로다.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군요.
저희 인간의 머리로서는 그저 법보시가 가장 높은 보시라는 불교의 경전 내용을 인용할 수밖에 없겠네요.
예수님께서 펼치신 사랑의 법문도 결국에는 법 보시이니 말씀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높은 천국에 가는 방법인가 봅니다.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너희가 물질을 소중히 여긴다고 한다면 물질적인 보시야말로 최고의 보시라고 여기게 될 것이고 가르침이 소중하다고 여긴다면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게 될 터이니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느냐가 너희 영적인 삶의 향방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니 이제까지 저희들이 스승을 위해서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연하게 드러나는군요.
깨달은 스승을 위해 홍법하는 것이 결국 가르침을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법보시를 위해 자신의 돈을 아끼지 않았던 공덕이야말로 크다고 할 수 있겠네요.
교회에서 선교활동을 위해 돈을 헌금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고요.
하지만 이 문제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야말로 인류를 구하는 메시아라고 하는 일들이 숱하게 많고 그들 모두가 세상에 가르침을 전한다 하는데 알고 보면 다들 자신주머니를 불려줄 돈을 구하고 있으니까요.
그들의 행위는 나무를 심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과실이 맺힐 것인즉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만약 인과응보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세상은 그 즉시 무너질 것인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팔아 치부하는 자들의 말로는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
그리고 너희들이 알아야할 일은 지옥조차도 그 존재 가치를 부여받았으니 그리로 떨어질 이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정말 너희가 높은 세계를 가고자 원한다면 예수와 같은 이를 본받아야할지니 원수조차 사랑하는 이가 되라.
어떻게 해야 원수조차 사랑하는 이가 될 수 있나요?
천사와 사탄이 하나라는 것을 알고 천국과 지옥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천사와 사탄이 하나일수는 없는 것 같고 천국과 지옥이 하나일수는 더더욱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같은 점을 깨달을 수 있는지요?
너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러한 방법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만 믿게 되면 모두 깨달음을 얻어야 마땅하겠지만 인류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떤 스승도 그럴 수 없었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그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예수를 따른다고 해서 모두가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고 부처를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깨달음을 득하는 것도 아니며 스승을 따른다고 해서 모두가 득도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러한 일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인연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선업을 쌓았으면 좋은 스승을 만나 자유로워 질것이고 악업을 쌓아두었다면 나쁜 스승을 만날 테니까요.
또한 자신이 좋은 덕목을 갖추었다면 나쁜 스승에게서조차 좋은 가르침을 얻을 것이고 좋지 못한 습관으로 무장되어있다면 좋은 스승에게서조차 나쁜 면만을 보게 될 테지요.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라 했으니 그저 지켜볼 일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이러한 문제는 각자에게 맡겨두고 제 문제를 다시 한 번 더 질문하겠습니다.
제가 본 비전을 무시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는지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가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달렸다고 하지 않았느냐?
물론 그러했지만 제가 무시하고 보니 자꾸만 이상한 비전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지요?
그것이 바로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일수가 있으며 네가 지금의 단체에 속해져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이루어져야하는 어떤 일일수가 있다.
그렇다면 단체를 벗어나면 안 될까요?
네가 진정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지만 과연 그러할지는 행동으로 옮겨보면 알게 될 것이다.
몇 번이나 시도해보았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해져있는 운명이 아닐는지요.
솔직히 말해보아라.
네가 진정으로 벗어나려고 하였느냐?
아니면 십자가를 짊어지는 예수와 같은 마음으로 단체에 남는 선택을 한 것이냐?
물론 단체에 남는 선택을 했습니다.
내가 했던 많은 일들에 도움을 주었던 이들을 뿌리치고 돌아설 수가 없었기에 어떠한 고락도 함께 해야 한다 생각했지요.
바로 그러한 네 마음 때문에 지금 네가 안아야하는 시련이 일어난 것이다.
매순간 다가오는 어려움들이 네 선택에 따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떠나려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결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미 말해주었다시피 너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일은 운명이라 할 수가 없으며 피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운명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운명을 피할 수는 없으며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것은 위대한 네 영혼의 선택이며 네가 사는 동안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군요.
제가 중국에서 얻어온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게 막아버리는 당신의 손길은 내 자유의지를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온전히 당신께 머리 조아리게 만들었지요.
지금도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기울이고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고 삽니다.
저한테 주시는 이모든 순간들이 축복임을 알게 하신 나의 주여!
당신과 함께하는 영광을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옵니다.
너희 안에 살고 있는 나를 영광되게도 만들고 하찮은 존재로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너희에게 있나니 나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으되 나를 살리면 너희가 죽을 것이요.
너희를 살리면 내가 너희 안에서 죽을 것이다.
나를 영광되게 만듦으로서 너희가 가난에 처할 것이나 육신의 빈약함은 영의 풍성함을 가져올 것이요.
너희를 높임으로 너희가 세상에서 부귀해질 수는 있을 것이나 영의 몸은 한없이 빈약해 질것이니 낮아짐으로 높은 것을 구하라.
만물이 나로 인해 왔으나 너희는 나를 볼 수 없나니 나를 들을 수 있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를 보지 말고 듣는 자가 될 것이며 나를 듣지 말고 느끼는 자가 되라.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