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깨어있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습니다.
24시간 신을 생각하며 살기위해 몸부림을 쳤지요.
하루에 2시간 반 명상만으로는 내재한 신을 깨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했기에 일을 해가며 아침저녁으로 6시간을 명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을 하는 낮 시간은 눈을 뜨고 염을 하고 아침저녁 3시간씩은 쪼그리고 앉아 명상을 하는 방법으로 3년 이상의 시간을 보냈던 겁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꿈속에서 염을 하는 나를 보게 되었지요.
또 어느 날은 잠을 자는 도중 깨어났는데 뇌의 반은 꿈을 꾸고 있으면서 반이 깨어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내면에 다양한 인식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처음 경험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24시간 깨어나 있는 신이 우리 내면에 있음을 확인했는데도 불구하고 내 삶은 크게 변화되지 않았고 하는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지도 않는 겁니다.
그래서 원인분석을 해보았습니다.
신이 깨어났는데 왜 하는 일마다 어긋나기만 하는지를 상고(詳考)했던 거지요.
그렇게 해서 얻을 결론은 내가 물질적인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육신의 범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만족이 없었던 것이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겁니다.
알고 보니까 사람의 몸은 나처럼 노력하지 않아도 신을 담고 있으며 정확히 그 사람의 인연에 따른 일을 경험하며 살아가더라는 거지요.
다만 본인이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으로 인해 만족이 없는 것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을 만족하면 신이 우리 삶을 주관하는 것이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은 모두가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지요.
돈이 생기거나 육체적인 즐거움이 생겼을 때 우리가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이 모든 것들은 영과는 반대되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인간들에게는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육신에 초점을 맞추면 이것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고 영적인데 초점을 맞추면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하다 여길 수도 있지요.
그래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분은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이며 이들을 일러 염세주의자들이라 칭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세상은 유지가 되지 않으며 개인의 경우에도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삶이 되고 맙니다.
세상에 온 목적이 돌아가기 위해서만 이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내려올 필요도 없었겠지요.
물론 최종적인 목적지는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살아간다면 자신과 세상에 무슨 유익이 있겠냐는 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성경은 다음과 같은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4:37)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4:38)
And he was in the hinder part of the ship, asleep on a pillow: and they awake him, and say unto him, Master, carest thou not that we perish?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막4:39)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4:40)
And he said unto them, Why are ye so fearful? how is it that ye have no faith?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4:41)
And they feared exceedingly, and said one to another, What manner of man is this, that even the wind and the sea obey him?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 내용을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 중에 하나로 인식합니다.
그렇게 본다고 해서 안 될 것도 없지만 실상은 그러한 물리적 기적보다는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주신 겁니다.
세파에 시달리는 인생의 고달픔을 아신 예수께서 구도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대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치신 거지요.
사람의 몸을 풍랑을 만난 배에 비유했으며 성령을 깨달은 예수님과 아직 덜 여문 제자들의 믿음이 어떻게 달랐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똑같이 세파에 시달렸지만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것과 같이 편안하게 대했으며 오히려 세상을 우습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자신 마음대로 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물질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물질을 취하지 않으면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벗어나라는 말이 아니라 노력은 하되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취한다면 세상이 두려울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 세상을 벗어나는 것이 해결책이었다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풍랑 속에 몸을 맡기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 같은 일은 어디까지나 24시간영이 깨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여긴다면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고 나에게도 내재한 신이 있음을 믿는다면 이렇게 살기 마련이지요.
성령이 깨어난 사람은 사람들을 억지로 천국으로 데려가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세상에 몸을 담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일을 합니다.
이 같은 경우를 두고 24시간 명상을 한다 말하고 깨어나 있다 말하는 것이며 24시간 누군가를 사랑한다 말하는 겁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예수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말할지 모르지만 사람의 근본은 누구나가 같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예수님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라도 예수처럼 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다 말하는 겁니다.
다른 이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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