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죽으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죄의식이 결여되어있다는 겁니다.
아무렇게 살아도 상관없으며 죄를 지어도 들키거나 잡히지만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합니다.
일반인들은 당연하게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종교를 가진 사람들 중에도 이런 이들이 생각 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마음 한쪽 구석에는 늘 찜찜함이 자리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함으로 왠지 자신에게 불이익이 초래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를 수 있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상대편의 잘못을 지적할 때 어느 순간 자신도 같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래서 과거 중세유럽에서는 천당행 표를 사고파는 일이 생겨난 거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은 넘쳐납니다.
지인 중에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분이 있는데 찬송을 할 때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스러워합니다.
옆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몇 번 본적이 있으니 절대 가식적인 눈물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정말 기독교인이 맞는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나와함께 어떤 일을 함에 있어 법을 어기는 일과 양심을 어기는 일의 귀로에 섰을 때 서슴없이 세상 법을 따르는 모습을 보며 이 사람이 영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양심의 소리는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되지만 법을 어기면 감옥 간다는 말을 할 때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 겁니다.
영생을 꿈꾸는 이라면 양심이 도덕적 잣대가 되어야지 세상법이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본인은 교회를 다니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양심을 어겨도 상관없다 여길지 모르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양심은 우리 안에서 되살아나는 하나님과 같으며 내영혼의 앞날을 결정짓는 재판관이라 봐야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일에 대해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And the LORD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to know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 ever: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
사람의 몸은 하나님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 지을 줄 아는 지혜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창3:22)(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 ever)
사람의 근본은 모두가 동일하다는 것이니 어느 누구에게나 기회는 동등하게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도서에는 인생의 혼과 짐승의 혼은 가는 곳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어떻게 살아가느냐하는 것이 내영혼의 향방(向方)을 결정짓는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가끔씩 어떤 이들은 이러한 점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받아들여 제멋대로 행동합니다.
우리자신이 하나님이나 다름없는데 얼마든지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여기고 짐승의 혼과 사람의 혼은 다르다고 생각하며 사람은 짐승처럼 심판받지 않는다 생각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일에 대해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전3:19)
For that which befalleth the sons of men befalleth beasts; even one thing befalleth them: as the one dieth, so dieth the other; yea, they have all one breath; so that a man hath no preeminence above a beast: for all is vanity.
보시다시피 짐승이나 사람의 아들이나 다름없다고 말해놓았습니다.
그것도 인자(the sons of men)와 짐승이 동일한 호흡이 있다 했지요.
여기에서 말하는 호흡이란 숨 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을 뜻합니다.
삼라만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언행을 얼마나 조심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살아생전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사느냐에 따라 인자가 될 수도 짐승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요.
이러한 점을 성경에서는 또 다른 비유로서 말해놓았습니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창25:26)
And after that came his brother out, and his hand took hold on Esau's heel; and his name was called Jacob: and Isaac was threescore years old when she bare them.
이 내용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면 이삭이 육십 세에 쌍둥이를 낳았다 할 겁니다.
그렇지만 이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삭이 영적인 삶에 자신을 묶어두고 거듭난 상황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60은 부활을 뜻하는 6과 완성을 뜻하는 10 이 연합한 숫자입니다.
또한 60에 해당하는 단어 threescore는 three(3)와 score(점수를 득함)가 합하여진 단어로서 삼위일체(3)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통한 현현(顯現)으로 볼 수 있지요.
리브가의 뜻이 “그물끈”이라는 점을 볼 때 이삭은 영적인 삶에 자신을 묶어두고 구도의 길을 걷는 도중 거듭남을 경험했으며 그로인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제어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에서의 뜻은 “털 복숭이”로서 짐승 같은 마음, 즉 육적인 면을 뜻하는 것이며 야곱은 “발꿈치를 잡다”이니 스스로의 행동에 제동을 걸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야곱이 훗날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이유를 알 수 있지요.
여기까지만 살펴보아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왜 선각자들이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만 했는지 왜 돈과 도가 함께 할 수 없는지를 알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제한된 육신의 삶보다 영원한 영의 세계를 앙망하는 이들이 선택할 삶입니다.
또한 우상 숭배자들이 선택할 삶도 아니며 영원한 자유를 원하는 이들이 꿈꾸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은 저 하늘에만 있지 않으며 우리들 마음 안에 있기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스스로를 결박하여 대자유(大自由)를 얻을 자들만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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