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이나 교회를 가보면 절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각자 바라는 바를 불상이나 교회십자가 앞에서 기원하는 행위들을 하지요.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행위를 기복신앙이라 말하며 우상 숭배자들로 치부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렇게 하지 않는 종교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본인 안에 거하시는 부처님과 예수님을 본적이 없으므로 이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자신과 가족들에게 불이익이 돌아올까 봐 감히 부처님이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부처님이나 하나님이 비천한 자신의 몸 안에 거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다보니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스님에게 일상생활에 대해 묻게 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목사님께 자신의 행사를 의논하게 됩니다.
그래서 웬만한 사찰의 스님들은 모두가 사주관상정도는 기본적으로 볼 줄 알아야하며 실지로 신도들이 이사를 해도 스님께 택일을 부탁할 정도입니다.
교회신자들 역시 목사님들께 이런저런 가정사부터 각종행사의 대소사를 묻곤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이 기복신앙의 전형적인 행태라는 사실을 성직자들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직 영적수준이 우상 숭배자에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상승법문을 말해봐야 소용이 없음을 아는지라 그 수준에 맞춰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생존당시에도 이러한 우상 숭배자들로 넘쳐났기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던 거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16: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마16:2)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3)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마16:4)
영적인 시각을 갖췄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육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는 사두개인 모두는 예수님에게 기적을 보여 달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정말 하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맞는다면 기적을 행사해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으로서는 펄쩍 뛸 노릇이었던 것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동등한 자녀이고 성령이신 하나님이 각자의 몸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이러한 천국복음은 무시한 채 오로지 예수님에게 하나님과 하나 되었음을 증명하라 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몸소 십자가에 매달리는 퍼포먼스를 통해 삼일 만에 되살아나는 기적을 보이겠다는 말씀을 하신거지요.
이러한 일은 비단 예수님생존당시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으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이런 구태(舊態)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과거 내가 처음 명상단체 입문할 당시만 하더라도 스승의 법문이 좋아서 세상을 버릴 결심을 했었습니다.
스승께서 말씀하시길 여러분이 처음에는 나를 스승으로 모시겠지만 결국에는 본인내면에 스승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 하셨지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과 나는 하나라는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만물동일체의 높은 법문을 하시는지라 스승이 예수님과 같이 자신 내면의 성령이 드러나신 분이라 생각했기에 그분을 예수님처럼 믿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만히 지켜보니 법문은 최상승 법문인데 제자들 하는 짓이 하나같이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지요.
처음에는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고 제자들 수준에 스승이 맞추는 것이라 생각하며 참아왔지만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내가 중국으로 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몸을 다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료수행자들의 철없는 우상숭배를 참아내기에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기에 센터와 거리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2002년 중국으로 들어갈 때 센터와는 마음속으로 결별을 생각했고 2006년 헝가리법문을 끝으로 마음속에서 명상단체를 지우기로 마음먹었지요.
나 홀로목사의 길을 걸어가리라 마음먹었을 때가 그때일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몇몇 인연 있는 동수들로 인해 발목이 잡히고 지금까지 연극 아닌 연극을 이어왔던 겁니다.
나로서는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 어떻게 단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가 싶기 때문입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명상을 했으면 적어도 본인 안에서 불성을 봐야 마땅한 것이며 아니면 우상숭배자의 자리에서라도 내려와야 한다는 거지요.
어떻게 된 심판인지 날이 갈수록 우상숭배의 믿음은 깊어만 가고 본인 내면에 내재한 불성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으로 보자면 교회는 그나마 덜한 것 같지만 핵심을 모르기는 매일반입니다.
성경에 담긴 뜻을 말해주면 알아들으려 노력하기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점에다 나를 집어넣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겁니다.
영적인 체험을 토대로 말을 해주면 들어야 마땅할 것인데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내가 모른다 생각하며 언젠가는 내 생각이 바뀔 거라 말합니다.
정말 어이가 없지만 어떻게 그 생각을 바꾸어줄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조차 못한 일을 내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저 내가 생각하는 바를 글로서 표현하고 인연 있는 사람들이 보도록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극히 적은숫자이기는 하지만 내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겉보기에는 그들이 못 알아듣지만 그들의 내면에 자리하는 성령이 내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겁니다.
그 사실을 내가 명확하게 느끼고 있기에 이일을 계속하고 있는 거지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심신상인(心身相印)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느껴지는 이들만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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