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코로나에 걸려 무척 고생을 했습니다.
벌써 석 달 가까이 냉증치료에 매달리다보니 면역력이 최악에 다다랐고 급기야 코로나까지 걸리게 된 겁니다.
심한 고열과 근육통증에 잠을 설치는 매일이 이어져 힘든 나날이 되고 있었지요.
입맛을 잃어버려 먹기도 힘든지라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나마 물에 밥을 말아서 먹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심하게 아파보니 평상시 내가 누리고 있던 일상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신의 축복이었는지, 아침 일찍 책상에 앉아 좌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를 아파보니 절실하게 느끼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저 밥 먹는 일조차 신이 축복하였다는 것은 입맛을 잃어본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지요.
특히 나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신이 축복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글이라는 것이 생각만하면 줄줄 나올 것 같지만 막상 써보면 영감이 떠오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뭔가를 생각해야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법인데 심하게 아프면 생각자체가 떠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머릿속에서 온갖 영상이 한꺼번에 떠올라 뭐가 진정한 내 생각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됩니다.
사람의 몸이 병드는 것은 신이 없어서 이거나 인간을 외면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잘못된 생활습관을 바로잡아주려는 신의 손길 탓이기도 합니다.
나 같은 경우, 하루 네다섯 시간의 수면습관을 유지한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육체적인 노동일을 하는 중에도 매일같이 글을 써왔으므로 육신의 입장에서는 혹사를 당해온 셈입니다.
심한 노동으로 근육파열이 일어난 것을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다가 또다시 노동일과 글 쓰는 일을 병행하자 육신이 반란을 일으킨 겁니다.
이런 이유로 신은 나에게 육신을 추스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거지요.
지금도 습관적으로 책상에 앉기만 하면 글을 쓰게 되는데 막상 써보면 글이 쉽게 써지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특히 성경을 들여다보고 그 뜻을 헤아린다는 것은 신이 허락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어떤 이들은 나에게 자신의 자유의지와 신의 뜻을 어떻게 구분 짓는가를 묻습니다.
여기에 대해 정확하게 답하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을 볼 필요가 있지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the cattle,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이 말씀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천부경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뜻은 따로 있지 않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다만 본인이 그렇게 여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을 해주면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를 묻지요.
사실 이런 사람은 이미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지만 뭔가 마음한쪽구석이 찜찜하기 때문에 면죄부를 받고 싶은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양심속이는 짓을 늘 하고 살았는지라 스스로가 심판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거라는 말입니다.
또한 일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행위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신의 뜻이 곧 자유의지라는 점을 인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자신의 내면에 신이신 성령이 함께 있음을 확신해야하며 그러한 성령이 내 몸과 말과 행동까지 주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본인의 행동과 말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자신이 져야하는 겁니다.
이때까지는 누구 때문이라는 말이 성립되지만 신이 주관하는 삶을 사는지라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한다는 말입니다.
살아보면 알겠지만 내가 한일에 대한 결과물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가령 내가 누군가에게 서운한 말을 했다면 그 당장 상대방은 대화의 단절을 통해 나와의 관계를 정리할겁니다.
아니면 누군가를 때렸을 경우 경찰관을 불러 손에 은팔찌를 채워 끌고 갑니다.
이렇듯 행위에 따른 결과물은 반드시 주어진다는 거지요.
이러한 일에 대해 나는 신의 뜻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 말해봐야 타인들로부터 비웃음만 돌아옵니다.
타인의 의지 또한 신의 뜻이므로 내행동만이 신의 뜻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발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성경말씀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사람이 하는 일이 곧 하늘이 하는 일이 된다는 것은 철저하게 우리라는 개념이 필요한 일입니다.
만물(萬物)동일체(同一體)의 개념과 인자(人子)의 뜻을 정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내가하는 일이 하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의 영혼을 아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들의 차이는 언행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인생의 목적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신약 속의 12사도는 모두가 순교의 길을 선택했지요.
그들의 목적이 영에 있으므로 물질세상의 영화나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겼던 겁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종교를 가지거나 영적단체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목적은 육신의 편안함이나 물질적 풍요를 원합니다.
어쩌다 영생을 원한다 말하는 신앙인조차 영혼의 안식을 육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죽어서 조차 누군가의 통제를 받아야하고 누군가로부터 축복을 필요로 하는 거지요.
얼마나 못나빠진 영혼이기에 누군가에게 끌려가서 심판을 받아야하는 건지 스스로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모두가 자신이 사는 동안 잘못 살았기 때문이며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겁니다.
본인 안에 마왕을 키웠는지 진정한 성령을 심어놓았는지는 다가와 있는 일이 말해주고 있으며 앞으로 당할 일이 말해줍니다.
타인을 향해 함부로 심판의 칼날을 휘두르며 살았다면 자신이 그 칼날을 안을 것이고 용서와 화합을 통해 타인에게 자비와 사랑의 매를 휘둘렀다면 거기에 걸맞은 일이 주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지요.
겸손한자는 내말을 이해할것이고 교만한 이는 자신의 말만 되풀이하여 주장할겁니다.
자유의지대로 살고 싶은 이들만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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