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시종(始終)은 일점(一點)에서 만난다.

배가번드 2023. 7. 11.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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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언제나 이성적 판단보다 빠릅니다.

생각을 제대로 정리할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생각이 일어남과 동시에 말이 뱉어지기에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진심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말은 중요하며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마음이 어떠하든지 말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게 됨으로 속마음이 따로 있음을 짐작하더라도 일단은 그 사람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평소 그 사람의 행동양식을 보게 되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할 때가 있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같은 일은 상대방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보더라도 그러함을 알 수 있지요.

나도 모르게 돌발적인 말이 튀어나오거나 내생각과는 관계없는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 이런 말을 들어도 실감이 가지 않는 이들이 많겠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의 언행을 본인이 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면 스스로의 하루를 되짚어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기를 써보면 이런 일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되돌아보고 기록하는 것이 일기인지라 본인도 모르게 자신의 언행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매일같이 이렇게 하다보면 평소에도 자신의 언행을 살피게 되며 스스로의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지요.

기도와 명상을 하는 근본이유도 알고 보면 이러한 점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육조혜능은 좌선에 대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앉아 스스로의 잘못을 들여다보는 것이라 했습니다.

육조혜능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시비를 따지는 일의 허망함을 깨닫게 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본인의 진정한 영혼이 드러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다툼을 벌이게 되었을 때 시비가 분명한 일에도 억지를 부리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워낙 다반사로 일어나기에 세상에 고소고발이 난무합니다.

어느 한쪽이 양보를 해버리면 다툼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모두가 자신이 옳음을 주장하기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명상이나 기도를 하는 이들은 다툼의 근본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도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잘못까지 인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에서는 잘못한일이 없는 것 같다면 지난 생에서라도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심어 놓았기에 지금의 억울한 순간이 왔음을 안다는 거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영혼을 일깨우기 위한 첫걸음이며 이것이 모두는 아닙니다.

사실 이러한 말은 하기는 쉬우나 실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힘듭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들여다보라 했지만 항상 남의 잘못만 보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해본사람은 알지만 처음에는 오로지 남 탓만 하며 본인의 잘못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보다는 상대방의 잘못만 보이기 마련이지요.

내 언행에 대해서는 당위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면서도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 오히려 잘못된 점만 찾아내려 노력합니다.

물론 모두가 이렇지는 않으며 어느 정도의 시기에 도달할 때까지는 이럴 수 있다는 겁니다.

기도와 명상이 깊어지게 되면 상대방의 잘못이 곧 내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시기가 옵니다.

영의 세계를 알고 나면 시공간의 벽이 허물어져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으며 사람에 따라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고 몇 생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한순간에 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생존 당시에 하나님 왕국을 볼 자들이 있다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아생전 하나님 왕국을 볼 수 있을까요.

이 같은 점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처음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영역이 넓어지게 되지요.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이고 우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확대되어 전체의 하나님이 되어 갑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넘어 상대방을 통해 역사하시기도 하고 삼라만상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점을 깨닫기 까지는 많은 과정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이치를 깨닫게 되면 성령이 한순간에 깨어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이신 하나님이 상대방의 입을 통해 역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됨으로서 시공이 무너진 영의 세계를 인정하게 되는 거지요.

상대방이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한다는 생각을 넘어 내 잘못을 깨닫게 만들어주기 위한 성령의 안배와 배려로 여김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영의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라는 개념은 육적이고 물질적인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경계의 벽이 허물어진 영의 세계에서는 이것저것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만이 존재합니다.

찰나의 순간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태를 뜻하는 겁니다.

언제나 말을 하듯이 전체를 알려면 부분을 알아야하며 부분은 곧 전체를 알기위한 도구입니다.

내 것만을 고집하면 도구에 머물게 되어 전체를 알지 못하게 되며 전체만 생각하면 도구에 머물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과 하나 되고 싶다 말하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 이런 기회가 주어지면 모두가 등을 돌립니다.

말도 되지 않고 어처구니없는 순간조차 신의 손길이라는 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은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는 적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출발점은 언제나 종점이며 도착지점이지요.

마지막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작점입니다.

이렇듯 태초의 하나님은 영원한 세상에서 밝히 빛으로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