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태어난 손녀가 무척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두 달 남짓 되었는데 벌써 목을 세우고 옹알이를 합니다.
아들이 올려주는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매일같이 성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지요.
그런데 아이의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듣는 것을 먼저하고 보는 것을 뒤에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태어나서 곧바로 듣고 보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보는 훈련을 통해 눈과 귀가 열리는 겁니다.
이러한 점을 깨달음에 비유해보면 돈오(頓悟)점수(漸修)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내재함을 아는 것을 아이의 탄생에 비유한다면 성령의 불씨가 꽃을 피우는 것은 성장하는 과정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게 되는 과정전체는 마치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과 흡사하며 모든 세상일이 이러한 이치에서 벗어남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10:26)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먼저 성령의 불씨를 전달받는 것은 서로 인연이 있어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탄생하는 것도 부모와 아이의 인연에 의해서 이듯이 영적인 길을 걷게 되는 것도 인연이 있어야 됩니다.
인연은 곧 믿음과 결부되며 믿음이 없다면 이심전심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성령의 불씨를 전해줄 방법이 없지요.
이러한 믿음이 밑바탕이 되었을 때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며 성령을 완전히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과 똑같은 과정을 겪게 된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꾸만 영적인 가르침을 들어야하며 자신을 신생아처럼 여겨 순수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과정이 필요하지요.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양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목자를 따라가는 양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양이 되는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The next day John seeth Jesus coming unto him, and saith, Behold the Lamb of God, which taketh away the sin of the world.
이미 성장하여 어른인 예수를 어린양에 비유한 것은 순수한 영혼, 즉 성령을 가리키기 위해서입니다.
다 같이 어린양이지만 일반인들은 목자를 따라가는 양이고 예수님은 그런 양을 이끌고 세상의 죄까지 짊어지고 간다는 거지요.
결국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고 예수님과 같이 성령이 드러난 분은 알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사실 알던 모르던 모두가 하나님 자녀라 할 수 있으며 성령을 담지 않은 그릇은 없습니다.
다만 본인이 믿지 않는 것이며 성령을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도 이 말을 듣고 다들 자신은 성령의 내재함을 믿는다 말하겠지만 본인의 삶을 스스로 들여다보면 성령을 모를 뿐 아니라 믿음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요.
마음에 만족이 없다면 성령이 있음을 모르는 것과 같으며 범사에 감사하지 못한다면 성령과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닥치는 작은 어려움도 견디기 어려워하고 조금의 고통도 용납하지 못하는데 성령을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레1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레16:2)
And the LORD said unto Moses, Speak unto Aaron thy brother, that he come not at all times into the holy place within the vail before the mercy seat, which is upon the ark; that he die not: for I will appear in the cloud upon the mercy seat.
아론의 두 아들은 나답과 아비후인데 그 뜻은 “하나님은 관대하시다”이고“그는 아버지시다”입니다.
하나님은 관대하신분이고 진심으로 아버지라 믿는 사람은 육이 죽고 영이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레위기 10장에 보면 나옵니다.
시간관계상 예문으로 올리지는 않았지만 담긴 뜻이 1절과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2절에서 속죄소 앞의 장막 안 성소에(the holy place within the vail before the mercy seat) 무시로 들어오지는 말라고 합니다.(come not at all times)
그런데 성소는 방주위에 있다 말하고 있지요.(which is upon the ark)
여기에서 방주는 구원을 뜻하며 영생을 가리킵니다.
한글성경은 방주를 법궤로 번역했지만 the ark는 방주가 맞습니다.
즉, 아론이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성소에 수시로 들어올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가진 자가 항시 들어오게 되면 죽게 된다는 겁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육)을 죽이지 않고서는 성령이 드러나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2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나님은 용서의 자리 위(upon the mercy seat) 구름 속에서 나타난다 말하고 있지요.(I will appear in the cloud)
이 말씀인즉, 하나님은 빛이신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구름위에 해가 있음을 성령에 비유해서 말해놓은 것이며 육신 안에 빛이신 성령이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진정으로 성령과 하나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아버지 되심을 믿어야함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죄인 됨을 고백하고(회개) 죄 사함(용서)을 받고나서야 구원(영생)에 이르게 된다 말하는 겁니다.
지금 모세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육신에게 말을 해주는 것이며 모세는 성령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모세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모세의 두 아들 게르솜의 뜻은 “나그네 됨”이고 엘리에셀의 뜻은“하나님은 나의 도우심”입니다.
성령으로서의 모세는 믿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는 고마운 존재가 되는 것이며 믿지 않는 이에게는 나그네와 같다는 뜻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을 나그네같이 여기고 있다는 말도 되며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도 나그네와 같이 여겨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성령에 대해 알고 있고 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손길아래 자신이 놓여 있음을 인정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게 되며 축복과 저주가 하나라는 사실까지도 알게 됩니다.
사는 동안 횡재(橫財)를 만나도 축복이라 생각하고 횡재(橫災)를 당해도 축복이라 여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 놓였다 여겨지는 이는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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